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200화 (200/227)

< 제 69장 - 격노 >

제 69장 - 격노

하늘이 파랗고 어두웠다. 아침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은 새벽이었다.

팔부중들의 성지 가운데 하나인 중앙 사원은 언제나와 같이 고요했다. 사원이 위치한 지형의 특성상 거센 바람조차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조용한 시간.

모두가 잠들었기에 작은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야 할, 온전한 적막의 때.

허나 오늘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바쁘게 오가며 언성을 높였고, 개중에는 격노의 왕의 유모이자 호위병인 키르티무카도 있었다.

“전하! 전하!”

거의 문을 박살낼 기세로 방안에 뛰어든 키르티무카가 연신 소리를 질렀다. 이 방에 머물고 있는 것이 간다르바들의 수장인 동시에 팔부중의 왕인 격노의 왕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실로 엄청난 무례였다.

하지만 키르티무카는 그런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격노의 왕에게 최측근이기에 건방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전하! 전하! 어서 일어나세요! 전하!”

키르티무카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격노의 왕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커다란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던 격노의 왕은 퍼뜩 눈을 뜨더니 비몽사몽간에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아, 안 졸았어요! 아니, 안 졸았소. 그러했소. 으읏… 잘못했어요, 안타오닉스 공. 화내지 마세요.”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마도 꿈결에 예법 스승이었던 마호라가 안타오닉스를 본 모양이었다.

키르티무카는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다시 한 번 격노의 왕의 어깨를 흔들었다.

“전하! 큰일입니다!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키르티무카?”

격노의 왕이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평소 아침잠이 많은 그녀답게 목소리에 맥아리가 없었다.

키르티무카가 격노의 왕의 양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전쟁입니다! 식탐의 왕의 군세가 국경을 넘었습니다! 현재 동부 전선에서 전투가 진행 중이라 합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였다. 격노의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키르티무카는 침대 주변에 널려 있던 옷가지를 챙겨 들며 말했다.

“팔부중 회의가 소집됐습니다. 각 종족의 수장들이 회의실에 집결하고 있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지금 이 장소는 이동 던전 비마나가 아닌 팔부중의 사원이었다. 더욱이 연일 이어진 회의 때문에 팔부중의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격노의 왕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침공 규모는? 팔부중 전체의 회의가 필요할 정도야?”

“아직 명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전면전을 방불케 한다고 합니다.”

격노의 왕과 식탐의 왕이 각자의 병력을 국경 지대에 배치시킨 것이 이미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때문에 침공과 방어 모두 빠르게 이루어졌다.

격노의 왕은 양 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때렸다. 잠기운을 완전히 몰아낸 뒤 키르티무카와 함께 방을 나섰다. 하늘하늘한 잠옷 차림 그대로였지만 느긋하게 옷을 고쳐 입을 상황이 아니었다.

사원 중앙에 자리한 회의실 안에는 이미 팔부중의 수장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모여 있었다. 다들 격노의 왕과 마찬가지로 급히 달려왔는지 잠옷 차림인 자도 있었고, 머리가 부스스한 자도 있었다.

격노의 왕은 자신의 자리인 간다르바의 좌에 착석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전장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총력전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조바심이 나더라도 수장들 간의 회의를 거쳐야만 했다.

일분일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수장들이 모두 모이는데 몇 분 남짓이 소모되었고, 전장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참석한 자의 설명을 듣는 데 다시 몇 분이 소모되었다. 격노의 왕은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식탐의 왕은 정말로 총력전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몇 차례나 있었던 가벼운 신경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동부 전선을 후려치고 있었다.

“색욕의 왕을 경계하기 위해 집중시켰던 병력들까지도 모두 쏟아 붓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용 군단과 대치하고 있던 병력들까지도 이쪽으로 이동 중이라 합니다.”

“이런 미친.”

누군가가 욕지거리를 토했다. 격노의 왕은 동감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격노의 왕 자신이 욕지거리를 토했을 터였다.

식탐의 왕의 공격은 그야말로 미치광이를 방불케 했다. 색욕의 왕은 둘째 치고 용 군단과 대치중이던 병력까지 이동시키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랜스 차징이라도 할 셈이란 말인가?

“식탐의 왕은? 그의 소재는 파악되었나?”

데바들의 수장인 마하바라타가 물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달려온 젊은 마호라가가 급히 답했다.

“현재까지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동부 전선을 맡고 있던 ‘지진의 마왕’ 쥬디케라스입니다. 전투 중 모습이 확인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투는 진행되고 있었다. 격노의 왕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억눌렀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어진 정보들을 점검하는 한편 상황을 판단했다.

격노의 왕 자신이 식탐의 왕을 공격할 마음을 품은 것은 폭력의 왕과 마몬 가라는 동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반면 식탐의 왕에게는 이렇다 할 동맹이 없었다. 오히려 격노의 왕 자신뿐만 아니라 폭력의 왕과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선공을 취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무리였다.

그렇다면 어찌된 것일까. 식탐의 왕에게 동맹이 생긴 것일까? 혹여 색욕의 왕과 힘을 합치기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한 달이 넘게 이어진 식탐의 왕의 부재는 동맹 체결을 비롯한 여러 물밑 활동을 위해서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꾸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식탐의 왕답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색욕의 왕의 군세는 현재 무얼 하고 있지? 움직이지 않고 있나?”

때마침 가릉빈가들의 수장인 카빌라카가 젊은 마호라가에게 물었다. 머리칼은 물론 깃털까지 모두 새하얗게 샌 그녀는 언제나와 같이 침착했다. 그 침착성에 물들기라도 한 것처럼 젊은 마호라가가 차분히 답했다.

“색욕의 왕은 여전히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상주하고 있는 정찰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색욕의 왕의 휘하 가주들 역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팔부중의 정찰병들 가운데 태반 이상은 하늘을 자유로이 누빌 수 있는 가릉빈가들이었다. 하늘에서라면 천리 밖도 내다본다고 하는 그들의 눈을 피해 대규모 군세를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색욕의 왕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군세는 식탐의 왕에게 합류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격노의 왕은 생각을 끊었다. 더 이상은 생각을 이어봐야 의미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간다르바의 수장인 드리타라슈트라가 아닌 팔부중의 왕으로서 말하오. 나는 지금부터 동부 전선에 합류, 친정으로 식탐의 왕의 군세에 맞설 것이오.”

식탐의 왕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동부 전선을 향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현재 전투가 발생하고 있는 동부 전선은 색욕의 왕과의 국경 지대에서도 멀지 않은 만큼 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평소 격노의 왕의 성향을 떼어놓고 본다 할지라도 충분히 친정을 나설만한 전장이었다.

“우방인 폭력의 왕과 마몬 가에도 협력을 요청할 것이오. 팔부중의 수장들에게는 후방에서의 지원을 부탁하오.”

이미 어제 회의를 통해 폭력의 왕뿐만 아니라 마몬 가와도 동맹 관계가 구축되었음을 밝힌 격노의 왕이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고른 뒤 용왕과 데바왕을 돌아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최악을 가정하겠소. 용왕과 데바왕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북부를 경계해 주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용왕 수구라와 데바왕 아스테리오가 격노의 왕에게 예를 표했다. 격노의 왕이 스스로 밝혔듯이 그녀는 지금 간다르바의 수장이 아닌 팔부중의 왕으로서 말하고 있었다.

“가루라왕, 폭력의 왕에게 사자를 급파하시오. 가르디문디, 다시 한 번 마몬 가에 가 위급을 알리는 한편 도움을 청하라.”

가루라들의 수장이자 가르디문디의 아버지인 비류박차 역시 예를 표해 뜻을 받들었다. 친정에 나서는 격노의 왕의 곁을 지키려 했던 가르디문디였지만 사석도 아닌 공석에서 감히 항명을 할 수는 없었다. 공손히 왕의 뜻을 받들었다.

대략적이나마 큰 그림이 그려졌다. 격노의 왕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예상 밖의 공격임에는 분명하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소. 늘 그러했듯이 이번 위기 역시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오.”

일차적인 회의는 끝났다. 격노의 왕은 서둘러 회의장을 나선 뒤 친위대와 더불어 거대한 신수 아스트라의 등에 올랐다. 몸을 정결히 하고 무장을 걸치는 일은 모두 신수 아스트라의 등 위에서 진행하였다.

완전히 자란 에인션트 드래곤과 동등한 크기를 가진 신수 아스트라가 무지갯빛 날개를 펼쳤다. 높이 날아올라 동쪽으로 향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격노의 왕은 식탐의 신기를 움켜쥐었다.

&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시트리와 사마엘을 구출하고도 벌써 만 하루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용호는 초조한 얼굴로 스카자하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밤중에 잠시 잠을 청하기도 했지만 걱정 때문에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약간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평소 늘 시트리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용호 자신의 마음속에 차지한 비중이 카타리나나 카이완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용호는 눈을 꽉 감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옛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더 이상의 사별 따위는 없었다.

“나온다.”

카이완의 목소리였다. 용호는 급히 눈을 떠 정면을 보았다. 카이완의 말마따나 스카자하와 유스티아가 지친 얼굴로 저택을 나서고 있었다.

용호는 구시온을 데려온다는 약속을 지킴에 따라 스카자하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봉인을 완전히 해제하게 된 스카자하는 자유롭게 저택 밖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유스티아도 비슷했다. 애당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용호를 마몬 가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한 그녀는 마몬 가의 일반 사역마로 재등록을 함으로써 도서관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었다.

밤새도록 한숨도 쉬지 않고 치료 행위에만 집중한 두 사람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용호는 제대로 된 치하의 말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은 시트리의 안위에 대한 것이었다.

스카자하는 어깨를 살짝 늘어트렸다. 다소 침울한 어조로 답했다.

“일단 목숨에는 이상이 없어. 내상이 꽤 깊은 것 같기는 하지만 치유 못 할 정도는 아냐. 다만… 영혼 쪽에 문제가 있어.”

“영혼 쪽에?”

스카자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피어오른 홍련의 불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몬의 말마따나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시트리의 영혼은 지금 뭐라고 해야 할까… 유리병 한 구석에 금이 가 있는 것과 비슷한 상태야. 그 상태에서 죄악의 힘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금이 더 커지고 말았어.”

얼핏 들어도 불길한 이야기였다. 카이완이 못 참겠다는 듯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진화의 권능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한 거야?”

용호는 지금까지 진화의 권능으로 꽤 많은 부상을 치유해 왔다. 직접 그 힘을 체감했을 뿐만 아니라 죽기 일보 직전이던 고블린 욘이 회생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는 카타리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스카자하를 보았다.

스카자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스티아가 말했다.

“진화의 권능이 분명 막강한 힘이긴 하지만 영혼까지 치유하기는 어려울 거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걱정들 하지 않아도 되오. 이미 말했듯이 목숨에는 이상이 없으니 말이오. 더욱이 시트리는 나태의 왕. 의식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스스로의 상처쯤은 돌볼 수 있을 거요.”

카타리나는 입술을 움츠렸고, 카이완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카자하가 다시 말했다.

“사마엘의 경우엔 부상이 훨씬 심하지만 순수하게 육신의 부상이라 치유 자체는 오히려 손쉬운 편이야. 아마 오늘 내일 중에 의식을 회복하지 않을까 싶어.”

사마엘이야말로 진화의 권능으로 단숨에 회복시키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화가 가능했을 때 이야기였다.

설사 사마엘이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된다 할지라도 진화가 가능할 정도로 진화 숙련치를 쌓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더욱이 그녀는 죄악과 신기가 없을 뿐 그 외 나머지 것들은 왕에 필적한다는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였다. 어쩌면 아몬이나 구시온에 필적하는 진화 숙련치를 필요로 할지도 몰랐다.

용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얼굴만 겨우 몇 번 본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사마엘의 안위 따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던전 상회 내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스카자하와 유스티아가 치료를 하는 동안 용호는 공백지의 휘하 가주들에게 던전 상회와의 거래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거창하게 거래 중지 선언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당분간 거래를 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시트리.’

용호는 다시 한 번 초조함을 억눌렀다. 시트리와 사마엘 모두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니 이제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둘 중 하나라도 의식을 회복하면 던전 상회에 대한 의문이 해소될 터였다.

“시트리는 내게 맡기고 이제 그만 푹 쉬어. 주인님 얼굴이 반쪽이다.”

스카자하가 오히려 용호에게 쉴 것을 권했다. 용호는 미안함에 쉬이 입술을 열지 못했다. 지금 가장 지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카자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용호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루시아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주인님!]

[가르디문디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무척이나 급한 용무인 것 같아요!]

겨우 이틀 전에 마몬 가를 방문했던 가르디문디가 돌아왔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용호는 가타부타 말을 잇는 대신 바로 표면의 마몬 가로 향했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그런 용호의 뒤를 따랐다.

&

< 제 69장 - 격노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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