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97화 (197/227)
  • < 제 67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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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금을 통틀어 배신은 언제나 치명적이었다.

    배신자는 외부가 아닌 내부의 사람이었다. 아무리 크고 단단한 거성을 지어 외적에 방비한다 할지라도 등 뒤에서 찔러오는 배신자의 칼은 피할 수 없었다.

    던전 상회 특별 경매장은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인 사마엘의 던전답게 평범한 가주들의 던전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역시나 배신자들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오로바스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던전의 절반 이상이 공략된 상황이었다. 사마엘의 사역마들은 오로바스와 비프론즈의 수하들에게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사마엘의 던전 심층과 특별 경매장을 구분 짓는 경계선 앞에 선 오로바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앞에는 사마엘의 심복이자 특별 경매장의 집사장인 인큐버스 로드 카롯이 피투성이인 채로 서 있었다.

    “훌륭하군. 인상적이야.”

    오로바스는 짧게 평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난 찬사였다. 카롯의 주변에는 오로바스의 수하들 가운데 돌격조에 속하는 크림슨 오우거들 이십여 마리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더욱이 카롯이 뒤집어 쓴 피는 크림슨 오우거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지독한 혈향에는 적어도 다섯 종류 이상의 몬스터들의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마도 홀로 시간을 번 것일 터였다. 사역마들이 대피할 시간이라든가, 심층의 방비를 굳힐 시간이라든가 말이다.

    카롯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오로바스를 노려보았다. 조금이라도 여력을 긁어모으듯 차오른 숨을 달랬다.

    왜 배신했는지, 사마엘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런 것은 묻지 않았다. 작금의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오로바스는 그런 카롯을 보며 미간의 주름을 폈다. 작게나마 미소까지 지었다. 예전부터 참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사마엘이 적이 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예비동작이나 준비 자세 같은 것은 없었다. 근 십여 미터를 눈 깜박할 사이에 가로지른 오로바스의 주먹이 카롯을 강타했다. 회피는 불가능했다. 반사적으로 펼친 방어용 마법장은 생성과 동시에 박살이 났다.

    카롯의 왼쪽 어깨가 사라졌다. 무지막지한 물리력에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사마엘의 경우처럼 카롯이 피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바스가 일부러 어깨를 맞춘 것이었다.

    비명은 터지지 않았다. 카롯의 어깨를 날려버린 오로바스의 주먹이 활짝 펴지더니 그대로 카롯의 목과 입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오로바스는 그렇게 움켜쥔 카롯을 거칠게 땅에 내동댕이쳤다. 카롯과 충돌한 지면이 갈라져 깨질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온 몸의 뼈가 박살이 난 카롯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오로바스는 그런 카롯의 남은 오른팔을 발로 짓밟았다. 그대로 힘을 줘 손가락 끝부터 어깨까지 천천히 짓뭉갰다.

    이번에야말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이내 비명 대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팔을 자근자근 짓밟은 오로바스는 카롯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다. 카롯이 죽이기에 아까운 녀석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놈에게는 아직 알아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사마엘이 몸을 숨길만한 던전 밖의 은신처 위치나 그녀가 가진 권능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천천히 고문할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놈을 죽여 사마엘에게 타격도 줘야 했으니 영혼으로부터 정보를 뽑아낼 네크로멘서가 도착할 때까지만 살려둘 생각이었다.

    “이 정도로는 안 죽잖아. 안 그래?”

    오로바스가 친근하게 말했고, 카롯은 필사적으로 마법의 구성을 자아냈다. 오로바스는 카롯의 왼발을 짓뭉개는 것으로 반쯤 완성된 마법 구성을 파괴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이번에도 카롯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바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일어나는 쾌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태의 왕과 사마엘을 상대로 한 졸전의 분노가 일말이나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세 이사들이 오만의 왕 휘하에 들어간 이유는 각자 달랐다.

    아브라삭스는 오만의 왕을 두려워했다. 동시에 그는 마음껏 활개를 치고 싶어 했다. 던전 상회는 물론이고 아브라삭스 자신이 가진 힘을 세상에 과시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어린애라 해도 좋았다.

    비프론즈는 마계의 통일을 원했다. 그리고 그 통일의 과정에 자신이 속하기를 소망했다. 그가 오만의 왕의 휘하에 들어간 이유는 단순했다. 작금 시대에 통일을 이룰 가능성이 가장 높은 왕이 오만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로바스 자신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투쟁을 바랐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기는 편에 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결국엔 아브라삭스와 같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힘을, 압도적인 폭력을 마음껏 행사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원했다.

    오로바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실신해 버린 카롯 대신 굳게 닫힌 심층으로의 문을 보았다. 숨을 한 번 크게 삼킨 뒤 꽉 쥔 주먹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력에 무거운 강철 문뿐만 아니라 문이 붙어 있던 벽까지 박살이 났다. 마치 던전이 비명이라도 지르듯 던전 전체가 진감했다.

    오로바스는 다시 한 번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적이 된 사마엘을 철저하게 파괴하고자 심층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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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 상회는 지난 천 년 동안 마계의 상권을 지배해왔다. 단순히 영향력만을 논한다면 단연 마계 역사상 제일의 조직이라 할 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전 상회는 언제나 공정했다. 그들은 패악을 부리지 않았고,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며, 상식적인 가격으로 고객들을 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싼 값에 식량을 공급함으로써 마계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기까지 했다.

    자그마치 천 년이었다. 마계의 주민들은 던전 상회에 익숙해졌다. 급기야는 던전 상회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 조직인지를 망각했다. 하나의 가문을 이끄는 가주들조차도 이웃과 자신의 수하 사역마를 경계할지언정 던전 상회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던전 상회의 갑작스런 적대 행위는 내부자의 배신만큼이나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질시의 왕은 황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 천지가 오만의 왕의 군세로 가득하였다. 비밀리에 기동하고 있음에도 위치가 노출되었고, 도착하기로 한 지원군 가운데 상당수가 도착하지 못했다. 곁을 지키던 가주들 가운데 상당수가 돌연 마력의 상실을 호소했다. 개중에는 마력의 거의 절반을 잃은 자도 있었다.

    이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질시의 왕은 자신의 직할 던전들 가운데 몇이 파괴되었음을 감지했다. 심지어는 본영인 질시의 거성마저도 공격을 받았다.

    설명이 필요했다. 노여움을 참지 못한 질시의 왕은 괴성을 토하며 마력을 전개했다. 우뚝 솟은 일곱 개의 뿔을 통해 지독한 감정을 발산하였다.

    “오만의 애송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명백했다.

    질시의 왕에서부터 발산된 지독한 감정은 검은 연기가 되었다. 흡사 악귀와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그런 질시의 왕을 마주한 오만의 군세는 일시에 무릎을 꿇었다. 평원에 자리한 수만 대군이 동시에 자세를 낮춰 예를 표하니 그 광경이 실로 감탄스러웠다.

    질시의 왕은 노여움을 느꼈다. 오만의 군세가 예를 표한 대상은 지표가 아닌 하늘에 있었다.

    “레비아탄.”

    나직한 부름이었다. 그리고 그 부름은 질시의 왕을 더욱 격동시켰다. 작금 마계에 질시의 왕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천 년 전의 대업을 함께 한 색욕의 왕뿐이었다. 오직 ‘그녀’만이 질시의 왕 자신과 대등할 수 있었다.

    질시의 왕은 핏발 선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황금빛 갑주를 입고 하얀 날개를 펼친 친위대를 거느린 오만의 왕이 거만한 눈으로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네 놈!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던전 상회가 나와 함께한다.”

    오만의 왕은 직설적으로 답했고, 질시의 왕은 순간 말문이 막혀 눈을 껌벅였다. 오만의 왕은 그 바보 같은 표정 변화를 충분히 만끽했다. 하늘을 마치 계단처럼 밟아 지상으로 향했다.

    “던전 상회 배달원이 찾아오면 어떤 가주도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지. 던전 상회에서 사들인 물건에 던전은 물론이고 던전의 심장까지 파괴할 치명적인 마법 폭탄이 들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자는 없어.”

    질시의 왕은 급히 자신 주위의 가주들을 돌아보았다. 힘이 반감된 가주들이 저마다 절망에 찬 얼굴로 질시의 왕을 마주하였다. 던전의 심장의 파괴는 곧 던전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던전을 매개로 계약을 맺은 예속 사역마들의 떼죽음을 야기했다.

    예속 사역마의 죽음은 특별했다. 가주들 가운데 몇은 심각한 정신적 타격에 몸부림쳤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자도 있었다.

    오만의 왕이 지표에 도달했다. 오만의 군세는 여전히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들의 왕에게 예를 표하였다.

    “사역마는 예속 사역마와 다르다. 그들은 그저 계약 관계에 묶여 있는 자들에 불과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주에게 반하는 행동 역시 할 수 있지. 네가 비밀 거래로 사들인 수많은 사역마들처럼 말이야.”

    질시의 왕은 아무런 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던전 상회가 오만의 왕과 함께 한다?

    비밀거래를 주관하는 다섯 이사들이 오만의 왕의 수하들이다?

    던전 상회에서 사들인 물품과 사역마들에게 조작이 되어 있다?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이 그 모든 것들을 증명했다.

    질시의 왕은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질시의 군세 가운데 일부가 마치 오만의 군세처럼 자세를 낮춰 예를 표하고 있었다. 주변에 자리했던 가주들 가운데 몇이 보이지 않았다.

    오만의 왕은 웃음을 참지 않았다. 마치 연극을 하듯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 혹시 네게는 없는 건가? 널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소모품들이?”

    “노옴!”

    질시의 왕이 다시 한 번 지독한 감정을 발산했다. 주변에 퍼져 있던 검은 연기가 하나로 뭉쳐 거인의 형상을 이루었고, 질시의 왕의 등 뒤에 오롯이 자리했다. 질시의 왕은 연달아 허리춤에 손을 뻗어 검의 형상을 한 ‘오만의 신기’를 뽑아들었다.

    오만의 왕은 오만의 신기를 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그리움을 엷은 미소로 달랜 뒤 단검의 형상을 한 ‘색욕의 신기’를 한 손에 거머쥐었다.

    ‘대업’을 함께한 세 가주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달리 오만, 질시, 색욕 세 왕은 자신들의 죄악과 짝을 이루는 신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 년하고도 수백 년 전인 그날, 세 왕은 서로 간의 신기를 교환했다. 자신들끼리 배신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방책 가운데 하나였다.

    “너무 길었어. 이제는 그만 돌려받아야겠다.”

    오만의 군세가 일시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오만의 왕은 그간 억눌러 감춰두었던 뿔과 마력을 개방했다.

    질시의 왕은 전율했다. 눈앞의 애송이를 찢어발기겠다는 생각은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그것은 전장 전체를 압도한다고 해도 좋을 오만의 왕의 무시무시한 마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거…짓말.”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오만의 왕은 화사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질시의 왕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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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해질녘이 다가왔다. 구시온과의 이야기를 마친 용호는 예속 사역마들을 해산시킨 뒤 홀로 마왕의 방 옥좌에 앉았다. 카타리나와 카이완도 없었기에 넓은 방 안에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용호는 품을 뒤져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황금빛 열쇠를 꺼내들었다. 투기장의 마지막 플로어 마스터인 구시온을 꺾었을 때 얻은 최후의 보상이었다.

    ‘탐욕의 미궁의 최하층인 13층에는 마몬 나리의 비밀 방이 있다. 그리고... 오직 이 열쇠만이 비밀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으로 안다. 애석하게도 내가 아는 것은 이게 다다. 비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구시온의 설명을 되새긴 용호는 열쇠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자세를 바로 했다.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하고자 눈을 감았다.

    ‘시트리.’

    나태의 왕. 천 년하고도 수백 년 전의 그날 최후의 최후까지 마몬의 곁을 지킨 단 한 사람.

    어째서 정체를 감추었냐며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마몬의 최후를 언급하며 그녀를 위로하는 것도 우스웠다.

    하지만 그래도 시트리와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되었든 대화를 하고 싶었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그녀에게서 ‘사랑하는 고객님’이라는 말을 들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상공간에 접속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감각이 등줄기를 스쳤다. 용호는 천천히 눈을 떠 정면을 보았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몇 번 경험해본 일이었기에 용호는 당황하지 않고 시선을 약간 높이 했다. 이제 곧 시트리의 부재 상황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올 터였다. 시트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릴지, 아니면 그냥 바로 돌아갈지는 목소리를 듣고 난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인식 번호 : 009]

    [그 남자의 후예.]

    [마몬 가의 현 가주 천용호]

    [인식을 완료했습니다. 환영합니다.]

    [시트리 님은 현재 던전 상회 본부에서 진행 중인 다섯 이사들의 회의에 참석해 계십니다.]

    [지금은 시트리 님과 대화하실 수 없습니다.]

    지난번처럼 기다릴 것이냐 물음조차 없는 걸 보면 잠시 기다려서 될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다소 낮고 딱딱한 여인의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활기차고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주인님.]

    [격노의 왕의 사자인 가르디문디가 찾아왔습니다. 현재 던전 입구에서 대기 중입니다.]

    루시아였다. 거듭된 성장 덕분에 영향력이 강해진 그녀는 용호가 가상공간에 접속해 있는 와중에도 짧게나마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주인님?]

    루시아의 거듭된 부름에 용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지만 온통 하얀 가상공간에 머무는 대신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용호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면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잠에 취한 시트리가 나타나 허둥지둥 인사를 걸어올 것 같았다.

    [주인님.]

    “지금 갈게.”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접속하면 될 일이었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시트리의 전용 가상공간과의 연결을 끊었다.

    제 67장 - 전격전 끝, 제 68장 - 수용으로 이어집니다.

    < 제 67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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