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96화 (196/227)
  • < 제 67장 #2 >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오로바스는 사마엘의 눈앞에서 주먹을 당겼다.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은 없었다. 레드 데몬 특유의 전투 감각이 가장 이득이 되는 행동을 택한 것뿐이었다. 냉철한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 해도 좋았다.

    상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하나, 사마엘이 아군이 된다. 가장 좋았다. 눈앞의 시트리가 명백한 적대의사를 내비쳤지만 사마엘이 이쪽에 합류하면 사 대 일이었다. 어떻게 봐도 이쪽이 이길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하지만 다른 하나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마엘이 만약에라도 시트리에게 가담하면 삼 대 이가 되었다. 시트리가 예상 밖의 힘을 발휘한 지금 자칫하면 이쪽이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패할 가능성이 있었다.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쪽이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오로바스는 경우의 수 자체를 없애버리기로 했다. 사마엘이 여기서 죽으면 그녀의 속내가 어찌되었든 삼 대 일이라는 상대적 우위가 변하지 않았다.

    오로바스가 주먹을 내질렀다. 이렇다 할 준비 동작도 없이 오직 빠르기에만 집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대로 적중한다면 사마엘의 가녀린 육신 따위 단번에 파괴될 것이 분명했다.

    찰나가 교차했다.

    사마엘이 발악하듯 발휘한 마왕의 권능이 오로바스의 주먹보다 아주 조금 빨랐다. 사마엘의 가슴 한 가운데를 겨냥했던 오로바스의 주먹은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 그리고 그 얕은 스침만으로도 사마엘의 어깨가 곤죽이 되었다. 마치 폭발에 휩쓸린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변했고, 충격파에 노출된 온몸에는 심한 자상이 남았다. 부서진 어깨 뒤에 자리했던 검은 날개는 문자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다섯 이사들 간에도 서로의 권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오로바스는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이유에 대해 탐구하는 대신 바로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사마엘은 재차 권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격통에 두 눈이 질끈 감겼기 때문이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브라삭스와 비프론즈가 비로소 상황을 따라잡았다. 둘은 급히 사마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중간 과정을 생략한 결과만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마엘의 죽음이 아니었다.

    오로바스가 급히 몸을 회전시켰다. 사마엘의 머리통을 박살내려던 주먹으로 등 뒤를 후려쳤다. 빗나갔다. 주먹에 이어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시트리가 품안에 파고든 이후였다.

    이번에는 시트리와 오로바스의 시선이 교차했다. 오로바스는 이를 악물었고, 그 직후 그의 붉은 거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튕겨져 나갔다.

    아브라삭스와 비프론즈는 동시에 마력을 발산했다. 아브라삭스의 마력이 사마엘을 압박했고, 비프론즈의 마력이 밀려났던 세 이사들의 마력을 재차 인도했다. 본신의 힘을 드러낸 시트리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사마엘이 부들부들 떨며 온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렸다. 하혈한 피가 새하얀 드레스를 붉게 물들였다.

    “죽어! 죽어버려!”

    아브라삭스가 악의에 차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희열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비프론즈는 달랐다. 그는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은 사마엘‘따위’에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아브라삭스!”

    일갈했다. 아브라삭스는 정신이 번쩍 든 사람마냥 시트리를 돌아보았다. 튕겨져 나갔던 오로바스 역시 급히 일어나 시트리를 보았다.

    나태의 신기가 빛나고 있었다. 적법한 왕의 손에 들어간 신기가, 자신의 죄악과 짝을 이룬 신기가 바닥을 찍었다.

    사마엘을 옥죄던 아브라삭스의 마력이 사그라들었다. 뿐만 아니라 금방이라도 시트리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세 이사들의 마력이 다시 한 번 밀려났다. 아니, 밀려난 것이 아니었다. 겨우 그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나태의 왕!”

    아브라삭스가 경악했다. 마력에 민감한 그는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했다. 그렇기에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였다.

    마력이 약해졌다. 사마엘을 옥죄던 마력은 그냥 밀려나거나 증발한 게 아니었다. 약화된 끝에 소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약화의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마치 시간의 격류에 휩쓸린 것만 같았다.

    시트리는 나태의 신기에 재차 마력을 불어넣었다. 죄악과 공명한 신기가 나태의 죄만이 간직한 고유한 힘을 발산하였다.

    ‘부식 결계.’

    마몬은 이 힘을 그렇게 불렀다. 이 힘의 경계 안에 들어선 모든 적대적인 것들은 빠른 속도로 약해져 소멸했다.

    시트리는 적대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 자체가 약해졌다. 시트리가 따로 손을 쓸 것도 없이 바닥과 벽이 붕괴했다.

    “놓치지 마라!”

    비프론즈가 소리쳤다. 아브라삭스는 던전 상회 최강을 자부하는 마력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흡사 왕관처럼 자리하던 머리 위의 일곱 뿔들 모두가 맹렬한 진동과 함께 거의 두 배 가까이 거대해졌다. 아브라삭스로부터 방출된 마력이 거대한 뱀의 형상이 되어 추락을 개시한 시트리를 집어삼켰다.

    “크아아아아아아!”

    아브라삭스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토하며 마력 발산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부식 결계의 경계에 닿은 아브라삭스의 마력들이 빠른 속도로 흩어져 사라졌지만 이내 새로 쏟아진 마력들이 빈 공간을 메웠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하여도 물의 양이 어마어마하면 잠시나마 물이 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었다.

    사마엘을 한 팔에 안은 시트리가 그런 아브라삭스를 노려보았다. 마력의 홍수 속에 오롯이 선 그녀는 황금빛 여인상이 조각된 나태의 신기를 거칠게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부식 결계의 힘을 강화했다.

    물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채워지는 속도를 능가했다. 단숨에 너무 많은 마력을 방출한 아브라삭스는 더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통에 찬 신음을 토했다.

    시트리가 바닥에 착지했다. 이제 세 이사들과 시트리 사이에는 십여 미터에 달하는 높이 차이가 존재했다. 아브라삭스는 꺽꺽 거리며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일곱 개의 뿔을 통해 다량의 마력이 차올랐지만 워낙에 소진한 마력이 많았던 터라 쉬이 회복할 수 없었다.

    시트리도 아브라삭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비프론즈가 옷 속에 감춰두었던 여덟 개의 팔을 동시에 움직였다. 마침내 주문구성을 마친 그가 만약을 대비해 설치해두었던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최고의 지력 비프론즈는 시트리를 결코 우습게보지 않았다. 그녀가 나태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도 최악의 최악을 고려해 작전을 준비하였다.

    던전 상회 본부에 축적되어 있던 거대한 마력이 비프론즈의 의지를 따랐다. 마치 용이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그것이 시트리에 의해 파괴된 천장 너머에서 하나가 되었다. 붉은 하늘 아래 응집된 거력이 시트리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세 이사들의 마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거대한 힘이었다.

    시트리는 그것을 보았다. 다시 한 번 그녀 안의 나태가 울부짖었다.

    마력이 부서지고 흩어졌다.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는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져 본래 의도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칼처럼 곧이 선 나태의 힘과 맞부딪힌 결과였다.

    비프론즈는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어찌하여 마계에 신기를 가진 왕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기를 가진 왕뿐이란 말이 존재하는지를 절감했다.

    아브라삭스도 몸을 떨었다. 그는 오만의 왕 앞에 섰을 때를 떠올렸다. 똑같았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이쪽이 더 전율적이었다. 시트리의 마력은 아브라삭스 자신과 호각이거나 오히려 더 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의 힘만으로 자신의 몇 배나 되는 마력을 막아냈다. 모든 것을 약화시키고 도태시키는 부식 결계의 힘은 두렵기 짝이 없었다.

    오로바스는 감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최초의 조우 때 시트리가 자신을 튕겨낸 것은 사마엘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만약 그녀가 부식 결계를 사용했다면, 나태의 힘이 자신의 몸을 엄습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했다.

    하지만 오로바스는 앞의 두 사람처럼 마냥 공포에만 떨지 않았다. 그의 전투 감각이 새로운 것을 포착했다. 나태의 신기를 움켜 쥔 시트리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몰아쳐라!”

    오로바스는 허공을 격타해 서툴게나마 마력을 발산했다. 시트리는 즉각 나태의 신기를 움직여 오로바스의 마력을 소멸시켰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왈칵 피를 토했다.

    시트리의 가슴과 옷자락이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가슴골을 따라 흐르는 선혈이 아브라삭스와 비프론즈를 움직였다.

    “죽어!”

    아브라삭스가 다시 한 번 마력을 쏟아 부었다. 마력 그 자체를 약화시키는 부식 결계에 마법을 때려 박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차라리 순수한 마력으로 몰아치는 쪽이 효율적이었다.

    비프론즈는 여덟 개의 손을 동시에 놀렸다. 마법진들을 재차 발동시켰고, 그리하여 만들어낸 마력의 흐름을 시트리에게 쏟아 붓는 대신 아브라삭스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번에 끝을 내야 한다.’

    여기서 나태의 왕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러기에는 그녀가 가진 힘이 너무나 강대하였다.

    자신의 신기를 가진 왕의 힘은 예상 범위를 넘어섰다.

    부식 결계와 세 이사들의 마력이 다시 한 번 충돌했다. 이번에도 마력들은 약화되어 흩어졌지만 지금까지와 아주 같지는 않았다.

    부식 결계의 경계가 점점 더 뒤로 밀려났다. 떨리는 손으로 신기를 움켜쥐고 있던 시트리는 급기야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조금만 더!”

    아브라삭스의 두 눈과 코에서도 피가 흘렀다. 이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력을 다뤄보는 것은 날 때부터 다섯 개의 뿔을 가진 그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트리가 비틀거렸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재차 피가 쏟아져 나왔다. 부식 결계의 경계는 어느새 처음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까지 줄어들었다.

    그리고 사마엘이 고개를 들었다. 최속의 날개인 그녀는 하나 남은 날개를 펼쳤다. 떨리는 손으로 시트리를 끌어안았다.

    “안 돼. 안 돼!”

    오로바스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시트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한 줄기 틈을 만들어냈다. 사마엘이 권능을 발했다.

    쾅!

    방대한 마력이 지면을 강타했다. 던전 상회 본부 건물을 관통하는데 그치지 않고 땅속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변 일대가 진감했다.

    아브라삭스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직접 마력을 조작한 그는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시트리와 사마엘이 사라졌다. 구체적인 능력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마엘의 권능이 분명했다.

    오로바스는 급히 감각을 확대해 주변을 감지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감지 범위는 자그마치 반경 오백여 미터에 달했지만 시트리와 사마엘은 그 범위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비프론즈는 숨을 헐떡였다. 항상 반상 너머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오랜 친구 덕에 그는 빠른 속도로 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나태의 왕을 놓쳤다. 사마엘은 이제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걱정하고 두려워 할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다음 일을 진행시켜야 했다.

    “사마엘은 이제 적이다. 오로바스,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라. 사마엘의 던전을 파괴해야 한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던전을 가진 마왕이었다. 가주인 사마엘에게는 몇이나 되는 예속 사역마들이 있었다.

    던전의 심장을 파괴해 예속 사역마들을 몰살시키면 사마엘이 어디에 있든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던전 상회 본부 직원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오늘 던전 상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랐다. 갑자기 일어난 참극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비프론즈는 다시 숨을 골랐다. 오랜 친구가 평했던 것처럼 비프론즈의 ‘지력’은 분석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는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언급했다.

    “둘 모두 부상이 심하다. 그러니 시간이 있다. 시트리까지는 무리더라도 사마엘의 모든 것을 빼앗아야 한다.”

    시트리는 다섯 이사들 가운데서 가장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나태의 왕이라는 사실은 둘째 치고, 그녀의 던전 위치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반면 사마엘의 던전 위치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던전 상회 특별 경매장이 바로 그녀의 던전이었으니 말이다.

    던전 상회는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마수였다. 사마엘 개인을 적으로 돌리는 것으로 끝내야 했다. 사마엘의 세력까지 적대 세력에게 넘어가는 일은 막아야 했다.

    “왕께서 질책하실 거야.”

    아브라삭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결과만을 본다면 임무에 실패한 셈이었다. 세 이사는 애당초 오만의 왕 휘하에 들어가기로 한 자들이었으니, 시트리와 사마엘을 회유하지도, 제거하지도 못한 현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사마엘의 힘을 거두어야 한다. 던전 상회의 힘을 온전히는 무리더라도 거의 대부분을 오만의 왕께 바쳐야만 한다.”

    아브라삭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오로바스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시트리가 서 있던 자리를 보았다.

    “나태의 왕…….”

    다시 한 번 마주해야 할 적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지금과 다른 방법으로 싸워야만 했다.

    세 이사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오로바스는 사마엘의 던전 공략에 가세하기 위해 몸을 날렸고, 아브라삭스는 지금쯤 식탐의 왕의 영지에서 오만의 왕의 영지로 탈바꿈했을 동부로 이어지는 공간의 문을 열었다. 깃발을 바꿔든 가주들의 두 번째 임무는 격노의 왕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었다.

    홀로 남은 비프론즈는 북부를 향해 돌아섰다. 마계 역사의 분수령이 될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제 67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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