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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95화 (195/227)

< 제 67장 - 전격전 >

제 67장 - 전격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온통 피투성이인 엘룬을 끌어안았다. 이마에 입술을 맞출 때마다 조금씩 차가워지던 육신은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엘룬의 죽음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죽음 역시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부인하고 싶은 현실이 이어지려 했다.

온몸이 아팠다. 엘룬을 끌어안기 전부터 피투성이였던 몸이 삐걱거렸다. 마계 내에서 천계의 힘이 가장 강한 이 공간은 일곱 개의 대죄 가운데 하나인 시트리에게 조차 죽음의 땅이었다.

시트리는 울었다. 다시 한 번 엘룬을 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가지 마요.”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물기 어린 목소리는 작았다. 숨을 토해 단어 하나를 덧붙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천계의 힘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정의 영향 역시 컸다.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시트리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열었다.

“가지 마요. 제발, 제발.”

그 이상의 말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머릿속에 수십 가지 단어가 동시에 떠올랐지만 그 어느 것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쥐어짜낸 것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애원이었다.

마몬은 그런 시트리를 마주했다. 눈물로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고, 이마와 입술에 입 맞추었다.

작별의 의미였다. 스치듯 사라진 입술의 감촉이 시트리를 더욱 더 냉혹한 현실로 내몰았다. 잠시 후면 영원히 이어질 마몬 없는 세상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왜! 왜 당신이! 왜 당신만!”

발악하듯 외쳤다.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더러운 배신자들이 판치는 추잡한 세계였다. 그런데 어째서 마몬이 희생하여야 하는가. 어째서 마몬이 저 배신자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가.

못 다한 말들이 많았다. 스스로에 대한 책망 역시 깊게 베여 있었다.

마몬은 이번에도 미소 지었다.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나만이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너와 모두의 왕이니까.”

단순히 죄악과 신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왕.

이끄는 자.

모두에게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자.

“그리고 나의 것이니까. 너도, 이 세계도, 모두 다 내 것이니까. 내 것을 내가 지키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

탐욕의 왕다운 말이었다.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매듭지은 마몬은 다시 한 번 시트리에게 입 맞추었다.

시트리는 그런 마몬에게 미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눈물 밖에 토할 수 없었다. 차라리 함께 가자는 애원만이 흘러나왔다.

마몬은 그런 시트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엘룬의 손을 어루만졌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이 뒤틀렸다. 온통 붉어야 하는 하늘에 푸른빛이 뒤섞였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몬은 하늘을 우러렀다.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시트리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시트리는 함께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마몬의 바람이었기에 결국 마몬을 홀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시트리는 피투성이인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마몬의 뒷모습을 두 눈에 아로새겼다.

마몬이 홀로 나아갔다. 하늘 끝, 천계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

“시트리.”

부지불식간에 쏟아져 나온 이름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이었지만, 오필리아와 카이완은 어째서 시트리의 이름이 언급되었는지를 이해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번졌다.

“그래, 그녀가 바로 나태의 왕이다.”

구시온은 담담히 말했다. 스카자하는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카타리나는 상황을 쫓아가지 못했다.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엘리고스는 입을 뻐끔거렸다. 용호를 제외하면 당대 마몬 가에서 시트리와 가장 많은 만남을 가진 것이 엘리고스였다.

설명이 필요했다. 카이완은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끝내 목소리를 토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억눌렀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시트리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련히 떠올랐다.

“왜지?”

어째서 시트리가 나태의 왕이냐는, 그런 억지성 물음이 아니었다. 눈을 뜬 용호는 구시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트리가 나태의 왕이라면, 어째서 구시온 너는 그녀를 원망하는 거지?”

구시온이 인정했듯이 시트리는 마몬 가와 함께 싸웠다. 다른 왕들처럼 마몬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구시온은 그녀를 원망하는 것일까.

구시온은 웃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미소라 평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다소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마계를 구하기 위한 다섯 왕의 동맹… 그래, 좋은 이야기지. 듣기에는 멋진 이야기야. 하지만 나리도 알고 있잖아.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칼을 겨누었던 상대와 이상을 위해 함께 싸운다는 것은 동화책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현실이었다. 실제로 오만과 질시와 색욕 세 왕은 끝내 마몬을 배신했다.

“우리 12 사역마들은 나머지 왕들을 믿지 않았다. 그들과의 동맹을 반대했지. 하지만 나태가, 시트리 그 여자가 동맹을 주장했다. 모두 힘을 합치면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마몬 나리를 부추겼다.”

구시온도 시트리가 진심이었다는 사실은 알았다. 시트리는 진정 그렇게 될 거라 믿었었다. 세 왕의 배신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 역시 시트리였다.

스카자하가 구시온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구시온은 다시 한 번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래, 안다. 한심한 이야기지. 나는 어쩌면… 어쩌면 그저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니까. 마계를 구한 대가로 몰락하고 만 마몬 가를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으니까.

구시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스카자하는 그런 구시온의 손을 보듬으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이제는 모두 지난 과거의 이야기야. 천계의 위협은 더 이상 없어. 배신의 주체였던 오만의 왕은 세월의 흐름 앞에 사라지고 말았지. 질시와 색욕이 아직 남아 있지만, 글쎄…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가 떠올랐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천 년의 시간이 차분함을 부여했다.

“마몬 주인님은 마지막까지 걱정이 많으셨어. 우리들을 급히 되돌려 보내는 와중에도 또 다른 걱정을 하셨지. 우리들 12 사역마가 복수를 부르짖을 것은 너무나 분명했으니까.”

용호는 아스클레피오스를 떠올렸다. 천 년의 세월동안 자책감에 시달린 그는 광인이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미치기 직전까지 복수를 생각했으리라.

스카자하는 눈을 감았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분은 언제고 나타날 그분의 계승자가 우리의 복수에 수동적으로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 그래서 계승자가 우리들 12 사역마를 제어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진실을 깨닫길 바라셨지.”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스카자하는 다시 눈을 떴고, 복수에 불타는 눈이 아닌, 언제나처럼 평온하고 다정한 눈으로 용호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이제 우리의 주인님이야. 우리는 도련님의, 주인님의 뜻을 따르겠어.”

용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카타리나는 불안한 얼굴로 귀를 늘어트렸고, 카이완은 마른 침을 삼켰다. 스카자하가 다시 말했다.

“부담 주려는 거 아냐. 당장 복수에 나서자는 것도 아니고.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이제는 나도… 그분의 마음을 이해해. 그분께서는 우리가 맹목적인 복수에 빠져드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어.”

마신왕의 심장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 마몬의 기억은 말했었다. 너의 길을 걸어가라고, 네 선택에 따라 살아가라고.

그것이 마몬이었다. 스카자하의 말마따나 그는 자신의 계승자와 12 사역마들이 복수에만 매달리기를 바라지 않았을 터였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자하는 다시 한 번 용호를 배려했다. 저도 모르게 조바심을 내비치려는 구시온을 제어하듯 그의 팔을 가만히 잡아당기며 다시 말했다.

“다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너무 갑작스런 이야기였을 테니까. 시트리나 그 날의 사건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대답해 줄게. 비단 주인님이 아니라도 좋아. 자유롭게 이야기해 줘.”

스카자하는 말을 마치며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이완이 제일 먼저 입술을 열었다.

“저기.”

운을 뗐지만 막상 말을 잇기는 힘든지 카이완은 입술을 달싹 거렸다. 스카자하는 다정한 얼굴로 그런 카이완을 기다려주었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카이완은 조급함을 섞어 물었다.

“시트리가 정말 나태의 왕이라면… 그녀는 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숨겼던 거지? 어째서 왕으로 군림하는 대신 그저 숨어만 있었던 거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죄악과 신기를 모두 가진 왕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왕이 아닌 던전 상회의 이사 시트리로 살았던 것일까.

다른 세 왕들이 두려워서? 나태의 왕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그들에게 말살 당할까봐?

정황상 세 왕은 시트리가 나태의 왕이라는 사실을 모를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시트리가 다섯 이사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말이다.

마몬 가의 기록에조차 시트리가 나태의 왕이라는 사실은 나와 있지 않았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여러 기록 속에서 나태의 왕은 언제나 검은 베일과 로브로 얼굴을 비롯한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때문에 오만과 질시, 색욕의 왕이 나태의 왕과 마몬의 연인인 붉은 머리칼의 마녀 시트리를 별개의 인물로 생각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아마 그러했을 터였다. 탐욕의 왕과 나태의 왕이 연인이란 사실은 다른 왕들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이야기였으니까. 동맹에 방해가 되면 되었지 결코 도움이 되지는 않을 사실이었다.

카이완의 물음에 스카자하는 눈썹을 팔八자로 모았다. 대답하기 곤란해서가 아니었다. 스카자하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카자하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고 있는 홍련의 불길로 향했다. 지난 천 년 내내 탐욕의 미궁에만 갇혀있던 스카자하 자신이나 구시온과는 달리 아몬은 최근의 일이라고는 하나 탐욕의 미궁 밖을 오갔다. 더욱이 용호와 더불어 늘 시트리를 만난 그였다. 어쩌면 무언가 단서를 얻었을지도 몰랐다.

용호와 카이완 역시 아몬을 돌아보았다. 아몬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의중을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마주한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아마도 천계의 문을 닫던 그날 무척이나 큰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부상?”

[그래, 그만큼 치열한 싸움이었으니까.]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치유치 못할 어떤 상처를 입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더욱이 시트리는 마지막까지 마몬과 함께 했던 인물이었다. 마몬이 천계의 문을 닫기 직전 혹은 직후에 12 사역마가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도 몰랐다.

[내가 느낀 그대로를 말하자면…….]

[지금의 시트리는 불완전하다. 그녀는 나태의 왕으로서의 힘을 제대로 발할 수 없을 거다.]

&

강철과도 같이 굳게 이어져 있던 세 이사들 간의 연계에 금이 갔다. 셋이되 하나와 같았던 마력의 흐름 사이로 이질적인 힘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흡사 폭발과 같았다. 순간이지만 세 이사들의 마력을 완전히 밀어낼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던전 상회 ‘최강의 마력’을 자부하는 아브라삭스는 다섯 이사 중 그 누구보다도 마력에 민감했다. 시트리의, 나태의 왕의 마력을 마주한 순간 그는 절감했다.

저것은 왕의 힘이었다.

죄악과 신기를 모두 갖춘 진정한 왕의 힘 말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오만의 왕에게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시트리가 마몬의 연인이었다는, 그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온 대마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고작이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눈앞의 왕을 어찌 상대해야 할 것인가.

찰나가 영원 같았다. 아브라삭스는 경악 속에 시트리를 보았고, 비프론즈는 숨겨두었던 비장의 카드들을 발동시키려 했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최강의 괴력’ 오로바스는 레드 데몬의 전투 본능에 몸을 맡겼다.

모두가 시트리에게 주목한 그때.

오로바스는 지면을 박찼다. 아직 아브라삭스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마엘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제 67장 - 전격전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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