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6장 - 왕의 시간 >
제 66장 - 왕의 시간
스카자하의 저택에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이 모였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구시온의 표정은 평온했다. 얼굴 한 가득 지친 기색이 묻어났지만 그래도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투를 벌인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하루를 푹 쉬었음에도 심력이 모두 회복되지 않았기에 용호는 구시온의 예속 사역마화를 조금 더 뒤로 미루었다. 오늘 모두가 모인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저마다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스카자하의 저택의 명물이라 할 수 있을 푸른 물이 마치 젤리처럼 덩어리진 의자가 되어 모두의 몸을 받쳐주었다.
“좋아, 나리.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 아니, 시작하겠소.”
한 팔로 스카자하의 허리를 안은 구시온이 다소 어색하게 말했다. 용호는 보다 어색한 얼굴로 답했다.
“됐어, 그냥 평소처럼 해. 나도 똑같이 대할 테니까.”
“흠흠. 내가 이래서 나리를 좋아한다니까.”
히죽 웃은 구시온은 낯선 존댓말 따위 치워버렸다. 스카자하 역시 구시온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키득거렸다.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지난 천 년 내내 상상해온 순간인데 막상 입 밖에 내려고 하니 어렵군.”
용호는 재촉하지 않았다. 허공에 홍련의 불길로 피어오른 아몬 역시 담담히 구시온의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구시온이 입을 열었다.
“먼 과거의 일이다. 천 년하고도 수백 년 전의… 마몬 나리께서 아직 건재하시던 시절의 이야기니까.”
스카자하가 구시온을 돕기 위해 손가락을 놀렸다. 푸른 물덩이 일부가 둥실 떠올라 먼 옛날의 마계 전도가 되었다. 마계의 절반가량이 하나의 이름 아래 통일되어 있었다.
“마몬 나리께서 다스리시는 땅- 탐욕의 영지 곳곳에서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던전이나 작은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사건이었다.”
‘사라졌다’는 표현에 카이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눈짓으로 물었고, 구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작은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던전 하나가 증발할 때도 있었고, 마치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도시가 파괴된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생존자 하나 남지 않은 것은 똑같았지. 생존자가 남지 않았다는 특성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알려진 것은 최초 발생으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언제 어느 곳에서 최초의 이상 현상이 발생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이상 현상이 마을이나 던전에서만 발생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몬 나리께서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서셨지만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고작해야 뒤틀림이 아닐까 의심하는 정도였지. 하지만 뒤틀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했어. 뒤틀림을 통해 나타난 존재가 주변 일대를 파괴하는 일은 있어도, 마을이나 던전이 통째로 사라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마치 그 일대가 다른 세상으로 뜯겨져 나간 것처럼 말이야.”
구시온이 마계 전도 형상을 하고 있던 물 덩이 일부를 움켜쥐었다. 비록 모형이나마 마계의 일부를 지워버렸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사태의 심각성은 커져갔다. 이상 현상의 발생 빈도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늘어났고, 그 피해 범위 역시 넓어졌다. 던전은 멀쩡한데 그 안에 있던 이들이 이렇다 할 외상 하나 없이 모조리 죽은 사건도 발생했지. 마치 혼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구시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 차례 숨을 고른 뒤에야 이야기를 재개했다.
“그러던 차에 이웃한 나태의 왕이 마몬 나리를 찾아왔다. 나태의 왕 역시 이상 현상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탐욕의 영지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는 건가요?”
오필리아가 물었다. 구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거다. 이상 현상은 마계 전역에서 발생했다. 탐욕의 영지와 나태의 영지뿐만 아니라 다른 왕들의 영토에서도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다.”
구시온이 마계 전도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전도 곳곳에 작은 구멍들이 발생했다. 조금씩 전도를 지워나갔다.
“이상 현상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지 반년. 마침내 마몬 나리께서는 이상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뒤틀림이 맞았다. 하지만 통상적인 뒤틀림과는 달랐다. 뒤틀림 너머에는 같은 마계가 아닌 이계가 있었다. 더욱이 그 이계는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계와 일시적인 연결로를 갖게 된 수많은 세상들과 달랐다. 너무나 특별한 세상이었다.”
구시온은 품에서 은화를 하나 꺼냈다. 동그랗고 납작한 그것을 마력으로 허공에 부유시켰다.
“동전의 양면에 비할 수 있을 거다. 우리 마계의 쌍둥이 세상이라 해도 좋겠지. 언제나 이어져 있는 세계. 분명 이어져 있지만 서로 만날 수 없는, 만나서는 안 되는 세계.”
은화가 빙그르 회전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은화의 뒷면으로 향했다.
“그 세상에서부터 발생한 뒤틀림이 마계에 영향을 주었다. 때로는 일정 지역을 통째로 증발시켰고, 때로는 뒤틀림 주변의 모든 영혼들을 빨아들였다. 뒤틀림에서 넘어온 존재가 파괴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
앞의 두 가지 경우가 특히 문제였다. 이상 현상이 계속된다면 급기야는 마계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다.
“마계와 한 쌍을 이루는 세계. 하지만 마계의 파멸을 야기하는 세계.”
구시온은 은화를 움켜쥐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몬 나리께서는 그 세계를 ‘천계’라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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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상회 다섯 이사들의 회의는 일방적인 보고들로만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가상공간이 아닌 실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히 회의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섯 이사들의 회의는 길어도 두 시간을 넘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번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몇 시간 수준이 아니었다. 최강의 마력 아브라삭스는 둘째 날 회의를 요구했고, 최고의 지력 비프론즈가 동의함에 따라 정말로 두 번째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미 필요한 이야기들은 어제 모두 나눈 후였다. 최강의 괴력 오로바스는 대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아브라삭스를 보았고, 사마엘 역시 얼굴 한 가득 호기심을 내비쳤다.
이렇다 할 이야기 없이 시간을 끌던 아브라삭스는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려놓았다. 마치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오만의 왕이 질시의 왕을 공격할 거야.”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이 전쟁 상태에 들어간 지 벌써 몇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시트리는 위화감 속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브라삭스가 고개를 높이 들어 그런 시트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겠지.”
시트리가 미간을 좁혔다. 다섯 이사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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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현상의 중심에는 천계와 마계 사이에 열린 거대한 뒤틀림이 있었다. 다른 뒤틀림들과 달리 그 뒤틀림은 일시적이지 않았다. 항시 열려 있는 그 뒤틀림으로부터 다른 뒤틀림들이 발생했다.”
스카자하의 물덩이들이 뭉쳐 다시 커다란 마계 전도를 만들어냈다. 그중 일부가 분리되어 하늘 높은 곳에 자리했다.
“천계로 통하는 문. 그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상 현상으로부터 마계를 지킬 수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이 빨랐다. 연신 마른 침을 삼키던 오필리아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잠깐만요. 어째서 그렇게 일방적인 거죠? 정말로 마계와 쌍둥이 세상이라면 대등한 것 아닌가요?”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천계의 힘이 우리 마계의 존재들에게 맹독과 같다는 사실이다. 마력이 약한 자들은 단지 천계의 힘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적어도 뿔이 세 개 이상은 되는 자들만이 천계의 힘에 노출된 상황에서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구시온의 대답에 오필리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적어도 뿔 세 개라 말했다. 드넓은 마계에서 겨우 한줌에 속하는 이들만이 천계에 맞설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문의 위치는 오래지 않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을 닫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문의 존재를 너무 늦게 알아차린 탓이었다. 문 주위에는 이미 천계의 힘이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천계에서 넘어온 존재들이 너무나 많았다.”
구시온은 이야기를 잠시 멈추었다. 감정을 억누르듯 이를 몇 번이나 악문 뒤에야 겨우 다시 말문을 이었다.
“당대 마계를 지배하던 다섯 왕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어느 왕 하나의 힘과 군세만으로는 천계로의 문을 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탐욕, 오만, 질시, 색욕, 나태.
구시온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비밀리에 극적인 동맹이 결성되었다. 천계의 힘에 직접 노출되는 상황이었기에 다섯 왕들은 최정예 병력을 가려 뽑았다. 모두의 힘을 일시에 집중시켜 천계의 문을 닫는다는, 그런 무척이나 단순한 해결책을 실행하기 위함이었지.”
스카자하는 침묵했다. 아몬 또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직 구시온만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마침내 천계로의 문을 목전에 두었을 때. 가장 격렬한 저항과 맞부딪혔을 때.”
용호는 눈을 감았다. 카이완 역시 이를 악물었다. 카타리나는 제발 아니길 바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만과 질시, 색욕이 마몬 나리를 배신했다. 나태는 배신하지 않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순 없었다.”
구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가장 먼저 엘룬이 죽었다. 격전 끝에 바루나와 유호유안이 죽었고, 우리 12 사역마 모두 극심한 부상을 입었다.”
용호는 그때를 기억할 수 있었다. 시트리와 마몬의 기억을 엿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던 구시온.
시트리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한 엘룬.
“마몬 나리는 다행히 건재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이탈을 택하지 않으셨다.”
구시온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격앙되었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천계의 문이 너무 크게 열려 있었다. 물러서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랬기에 마몬 나리께서는, 나의 왕께서는…….”
홍련의 불길이 타올랐다. 스카자하는 구시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구시온은 울면서 웃었다. 지난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던, 잊지 못했던 왕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홀로 천계로의 계단을 오르셨다. 스스로를 희생해 마계를 구하는 길을 선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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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삭스가 일곱 개의 뿔을 곧이 세웠다. 던전 상회 최강의 마력이란 이명이 허명이 아니라는 듯 막대한 마력으로 주변 일대를 장악했다.
거의 동시에 비프론즈와 오로바스 역시 각자의 뿔을 개방하였다. 여섯 개의 뿔에서부터 일어난 마력이 아브라삭스의 것과 하나 되어 마력의 밀도를 높였다.
그야말로 숨이 막히는 압박감이었다. 최속의 날개 사마엘은 급히 뿔을 개방해 마력에 맞서고자 했지만 무리였다. 아브라삭스의 마력이 마치 뱀처럼 달려들어 사마엘을 옭아맸다. 병의 마개를 막듯이 사마엘의 마력을 더 큰 마력으로 짓눌렀다.
시트리 또한 똑같은 일을 당하였다. 세 이사의 마력이 시트리의 전신을 압박했다.
아브라삭스가 말했다.
“본래는 조금 더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었어. 오로바스와 비프론즈에게 했던 것처럼 시간을 들여서 사마엘이랑 시트리도 회유하려 했지.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니 별 수 없더라고.”
아브라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부리를 비틀어 익살스런 미소를 지었다.
“식탐의 왕은 죽었다. 대체 누가 죽인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죽었어. 자랑하던 십인중까지 싸그리 다 죽었지. 그러니 이제 어쩌겠어. 주인을 잃은 개는 새 주인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식탐의 왕이 죽었다는 말에 사마엘이 눈을 크게 떴다. 아브라삭스는 기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식탐의 왕의 영토는 이제 없어. 주인을 바꾼 개들이 새로운 깃발을 들었으니까. 아마 지금쯤 난리도 아닐 거야. 배신자니 뭐니 하면서 한창 서로 죽이고 있겠지.”
식탐의 왕 휘하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거느린 세 가주는 자신들의 새 주인으로 오만의 왕을 택했다. 그에게 식탐의 왕과 십인중의 죽음을 고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세력을 통째로 바칠 것을 맹세했다.
바야흐로 약속의 시간이었다. 붉은 하늘 아래에서 깃발을 바꿔든 세 가주들이 피의 향연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허수아비 왕과 소수의 충성파를 말살하는 것이 그들의 첫 임무였다. 식탐의 왕의 영토를 오롯이 오만의 왕에게 바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오만의 왕께서 질시의 왕을 취하실 거다. 색욕의 왕은 더 이상 그분께 저항하지 못 해. 바로 오늘, 북부는 오만의 왕가 아래 하나가 될 것이다.”
오로바스가 나직이 말했다. 아브라삭스가 더욱 크게 웃었다.
“던전 상회는 그분을 따를 거다. 웃기지도 않는 자선단체 노릇은 이제 끝이란 소리야. 그분과 함께 북부를 넘어 마계 전역을 통일하는 거지.”
던전 상회에는 마계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을 고작해야 장사에나 써먹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된 장사가 아니었다. 마치 세계를 보살피는 시스템처럼 딱딱 정도에 따라 정해진 일을 처리할 뿐이었다.
아브라삭스는 그것이 싫었다. 그는 던전 상회의 힘을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쓰고 싶었다.
“마계를 재편할 거다. 이계에서 넘어온 잡종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도 좋겠지. 마계가 훨씬 더 아름답고 깔끔해 질 것 같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사마엘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소위 말하는 순혈주의자들에 의해 잡종이라 불리는 마계 주민의 숫자는 수백만을 족히 헤아렸다. 지금 그들을 모조리 죽이겠다 말한 건가? 그것도 저리 가벼운 어조로?
미쳤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생리적인 혐오감이 치솟을 지경이었다.
최고의 지력 비프론즈는 여덟 개의 눈을 모두 떴다. 시트리와 사마엘을 주시하며 말했다.
“아브라삭스의 말처럼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네. 다소 강압적인 상황이지만 이제 그만 결정을 해주었으면 하네.”
던전 상회는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마수와 같았다. 다섯 머리 중에 나머지 머리와 뜻을 달리하는 머리가 있다면 베어내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던전 상회라는 마수가 하나 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오로바스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당대 최강의 레드 데몬을 자부하는 그는 살의를 감추지 않았다.
“선택해라. 우리와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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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몬은 홀로 계단을 올랐다. 죽는 것은 자신 혼자로 충분했기에 12 사역마들을 강제로 귀환시켰다.
시간이 불충분했다. 천계의 영향력 때문에 평범한 귀환 마법으로는 안 되었다. 구시온을 비롯한 12 사역마들의 남고자 하는 의지 역시 꺾어야 했다. 때문에 강제 귀환은 사실상 봉인이나 다름없는 형태가 되었다. 아몬마저 돌려보낸 마몬은 마그나돈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아몬과 스카자하는 그 이후를 보지 못했다. 오랜 세월을 잠들었다.
하지만 구시온은 조금 달랐다. 보지 못한 것 까지는 같았지만, 그는 투기장을 찾은 초창기의 가주들에게서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배신자 놈들은 전력을 다해 마몬 가를 파괴했다. 자신들의 추악한 배신 역시 어둠 속에 묻고자 천계의 문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했다. 마몬 나리의 숭고한 희생은 숨겨졌고, 마몬 가는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천 년이 흘렀다. 배신을 주동했던 오만의 왕은 죽었고, 색욕의 왕은 사실상 은둔을 택했다. 언제나 휘둘리기만 하던 질시의 왕은 새로운 오만의 왕에게 나라를 잃기 직전이었다.
구시온의 이야기는 끝났다. 용호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마몬은 어째서 이 모든 진실을 12 사역마가 감추게 한 것일까? 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만이 진실을 알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일까?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몬과 12 사역마와 연관된 다른 의문들이 연이어졌다. 하지만 막상 용호의 입 밖에 나온 것은 전혀 다른 의문이었다.
“나태의 왕은 무얼 하고 있었지?
다섯 왕 중 셋이 배신했다. 나태의 왕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된 것일까. 마몬 가가 몰락하는 그때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태의 왕 역시 배신자들에게 공격당해 몰락한 것일까? 그래서 은둔해 버린 것일까?
구시온은 쓰게 웃었다. 애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태의 왕은 마몬 나리께서 계단을 오르시기 직전까지 마몬 나리와 함께했다. 우리들 12 사역마와 함께 싸웠지. 마몬 가가 몰락하는 와중에는… 글쎄, 나도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마몬 나리의 유지 가운데 하나를 잇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용호는 숨을 멈추었다.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섞여 있던 퍼즐들이 하나가 되었다.
근거가 아직 부족했다. 하지만 확신했다.
그녀.
그 사람.
“시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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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몬.’
시트리는 웃었다. 어깨를 떨며 구슬픔을 토했다.
“마몬.”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로바스의 협박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던전 상회가 망가졌다. 마몬의 유지 가운데 하나가 다시 한 번 오만의 왕가에 의해 더럽혀지고 말았다.
“지금 뭐라 했지? 마몬?”
오로바스가 되물었다. 시트리는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눈을 감았고, 그녀가 가진 힘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은신’을 거두었다.
세 이사는 동시에 느꼈다. 무언가가 달라졌다. 회의실 안을 장악하고 있는 세 사람의 마력 사이로 이질적인 힘이 일어섰다.
사마엘은 자신을 에워싼 아브라삭스의 마력이 일그러짐을 느꼈다. 아브라삭스는 경악을 토했고, 비프론즈와 오로바스는 급히 마력을 집중해 시트리를 억누르고자 했다.
허나 불가능했다. 시트리의 머리 위로 빛으로 된 일곱 개의 뿔이 마치 왕관처럼 솟아올랐다. 일시에 방출된 마력이 세 사람의 마력을 일순간이나마 밀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만으로 족했다. 시트리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반지를 통해 브리가다 덩어리를 허공에 불러내었고, 지팡이 형태를 한 그것을, 마신왕의 육의 파편인 나태의 신기를 움켜쥐었다.
시트리.
그녀는 던전 상회 ‘최강의 무력’.
탐욕의 왕 마몬의 유지를 이어 던전 상회를 창립한 자.
나태의 왕이 힘을 발했다.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나태의 죄가 포효했다.
< 제 66장 - 왕의 시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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