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93화 (193/227)

< 제 65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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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싸움이었다.

아슬아슬한 회피와 연이어지는 역습 같은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원시, 원초의 싸움이었다.

용호와 구시온은 공격을 주고받았다. 오직 더 강한 공격으로 상대를 거꾸러트리는 것만을 생각했다.

난타였다. 구시온의 주먹이 시간과 공간을 비틀었다. 수백 수천에 달할 주먹들이 눈사태처럼 용호의 전신을 뒤덮었다.

용호는 일섬으로 눈사태를 꿰뚫었다. 격노의 신기는 공간을 도약하는 대신 아몬 주위의 공간을 붙잡았다. 일섬과 눈사태가 공멸했다.

경기장은 더 이상 두 마인의 싸움을 견디지 못했다. 관중석을 보호하는 마몬의 결계는 파괴된 지 오래였다. 용호의 예속 사역마들은 물론이고 투기장의 사역마들 모두가 눈앞의 싸움에 전율했다.

다시 한 번 피가 허공을 뒤덮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육신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직감했다.

구시온의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끝없이 솟구쳐 오르던 용호의 마력이 천천히 와해되고 있었다. 육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용호와 구시온은 공격을 멈추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둘 모두 몸 상태가 말도 아니었기에 엉망진창인 웃음이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피까지 토했다.

“작은 나리. 진짜 독종이야.”

“너무 길었어. 이제 그만 스카자하 만나러 가자.”

다 죽어가는 서로의 목소리에 다시 웃었다. 피차가 다음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구시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용호가 육마의 힘을 아몬에 집중시켰다.

일권과 일섬.

붉은 용기와 탐욕의 녹염.

다시 한 번 격돌했다.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켰다. 녹염과 붉은 마력이 거대한 충격뿐만 아니라 막대한 빛과 열을 발생시켰다. 충격파가 용호와 구시온을 동시에 덮쳤다.

구시온은 바닥에 쓰러지며 생각했다. 오른팔이 통째로 증발했음에도 고통보다는 다른 것을 느꼈다.

‘나리.’

머리가 어지러웠다. 싸움의 열기로 억눌러온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금방이라도 의식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구시온은 눈을 감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의식을 유지하고자 이를 악물었다. 코 안에 가득한 비릿한 혈향이 새삼 생생하게 다가왔다.

구시온은 과거를 기억했다. 지금과 닮았지만 다른 그 날을 떠올렸다.

천 년도 더 지난 머나먼 과거의 일.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늘은 그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날과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구시온 자신과 달리 용호는 서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뜯겨져 나간 왼팔이 보기 흉했고, 제대로 서지도 못해 아몬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나마 구시온 자신에게 다가섰다.

이것으로 결정되었다. 구시온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구시온의 두 눈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의 왕이여.”

나직한 목소리는 곧 마법이 되었다. 오랜 세월 구시온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었다.

마몬의 결계가 해제되었다. 순백의 빛이 투기장 전체를 뒤덮었다.

“가주님!”

빛 속에서 카타리나가 참고 또 참았던 외침을 토했다. 울며 용호에게 달려가려 했다. 카이완이 그런 카타리나를 붙잡았다. 한 때 투기장의 사역마였던 그녀는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용호를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은 카타리나와 마찬가지였지만 스스로를 억눌렀다. 마침내 돌아온 왕과 그 가신들의 재회를 지켜봐야만 했다.

엘리고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오필리아를 부축했다. 티그리우스는 감탄 섞인 탄식을 토했다. 천 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던 결계가 해체되는 광경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스컬은 언제나처럼 껄껄 웃는 대신 안도의 숨을 토했다. 보랏빛 안광으로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투기장의 결계가 해체되었기에 용호와 구시온 역시 본래의 육신을 되찾았다. 엉망진창이 된 갑주들과 한계까지 소진한 마력들까지 원상복귀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를 마주한 채 예를 갖출 수는 있었다.

구시온의 등 뒤로 투기장의 사역마들이 자리했다. 모두가 새로운 왕 앞에, 자신들의 주인 앞에 저마다의 무기를 들어 예를 표했다.

“나의 왕이시여, 마침내 돌아오신 위대한 탐욕의 왕이시여.”

구시온은 굳이 눈물을 가리지 않았다. 움켜쥔 오른 주먹을 가슴 위에 올렸다. 투기장의 사역마들을 대표해 선창했다.

“구시온 이하 112명. 탐욕의 미궁의 주인께 충성을 맹세하나이다.”

담백했지만 강렬했다. 구시온의 선창을 따라 투기장의 사역마들이 일시에 목소리를 높이니 그 위용이 실로 굉장했다.

아몬은 굳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구시온과 똑같은 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용호는 아찔함을 느꼈다. 투기장의 사역마들이 내뿜는 어마어마한 기세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호는 왕이었다. 구시온이 선언한 것처럼 탐욕의 미궁의 주인이었다.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투기장의 사역마들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딱 필요한 말을 하였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투기장의 사역마들 사이에도 웃음이 번졌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거의 날듯이 달려 용호를 끌어안았고, 두 사람의 육탄 공세를 버티지 못한 용호가 바닥에 나자빠졌다. 구시온은 희미하게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카이완과 카타리나를 한 손에 하나씩 가볍게 안아들 수 있는 용호였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때문에 굳이 일어서는 대신 그대로 누워서 구시온을 올려다보았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바로 회복하러 가자.”

구시온이 눈을 껌벅였다. 한 번 웃을 때마다 뱃속이 요동치는 것 같았지만 용호는 다시 한 번 미소를 보였다.

“둘 다 엉망진창이잖아? 그럼 응당 병원에 가야지. 1층까지 어떻게 올라갈 지가 좀 걱정되긴 하다만.”

구시온은 고개를 들어 투기장의 입구를 보았다.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본 끝에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나리.”

짤막한 부름이었다. 작은이란 수식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구시온의 큼직한 손이 용호는 물론이고 용호에게 매달려 있는 카이완과 카타리나까지 단번에 들어올렸다. 스켈레톤 일꾼 시절부터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혔던 스컬이 쑥 손을 뻗어 용호에게서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떼어냈다.

구시온이 턱짓했다. 천장 위를 가리켰다.

“갑시다.”

구시온다웠다. 용호는 구시온이 자신을 등에 업는 것을 허락했다. 운동장처럼 넓은 구시온의 등에 축 늘어진 채 루시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맙소사!]

[지금 투기장에 계신 것 맞죠? 그런데도 저랑 연결되신 것도 맞고요?!]

용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구시온과 함께 투기장을 나섰다. 스카자하가 기다리고 있는 생명의 정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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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자하는 이미 울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유리아를 꽉 끌어안은 채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눈물은 물론이고 콧물까지 흘렸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쓸 수 없었다.

호수 한 가운데 위치한 저택만이 스카자하에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저택 밖으로는 단 한 걸음도 나설 수 없었기에 스카자하는 저택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이라도 입구와 가까운 곳에서 용호와 구시온을 기다렸다.

눈치 빠른 루시아가 스컬 부대를 시켜 미리 문을 열게 하였다. 때문에 구시온은 복도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멀리서나마 스카자하를 볼 수 있었다.

구시온이 달렸다. 스카자하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이지 않는 벽에 몸을 기댔다. 구시온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가 0이 되었다. 구시온이 그 커다란 두 손으로 스카자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스카자하의 품에 안겨 있던 유리아는 겨우 풀려나 어질어질 비틀거렸고, 용호는 구시온의 등에서 튕겨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조금도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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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온이랑 스카자하는?”

뒤늦게 올라온 카이완이 호숫가에 널브러져 있는 용호를 보며 물었다. 왜인지 유리아의 두 귀를 손으로 막고 있던 용호는 쓰게 웃으며 눈짓으로 스카자하의 저택을 가리켰다. 마몬 가 내에서도 가장 귀가 밝은 카타리나가 귀를 몇 번 쫑긋하더니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느새 귀와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천 년 만이니까요.”

오필리아가 말했고, 엘리고스와 티그리우스가 동시에 점잖은 헛기침을 토했다. 용호는 새삼 허공을 향해 속삭였다.

‘루시아, 훔쳐보지 말고 이쪽에 집중해. 일단 7층을 장악… 루시아?’

[……….]

[헉!]

[7, 7층 장악을 시작하겠습니다.]

[두근두근 콩닥콩… 이게 아니라.]

[아무튼 시작할게요!]

다행히 용호에게만 들린 목소리였다. 용호는 한숨을 한 번 토한 뒤 기분 좋은 얼굴로 스카자하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투기장을 정복함으로써 구시온을 비롯한 투기장의 사역마들을 손에 넣은 것도 좋았지만, 지금 당장은 구시온과 스카자하가 재회했다는 사실 하나가 더 크게 다가왔다.

‘뒷일은 내일로 미루고 슬슬 졸도해 버릴까.’

육신은 멀쩡했지만 심력을 너무 소모했다. 엉망으로 바닥을 나뒹구는 것 역시 일어설 기력이 없어서였다.

더욱이 육마의 부작용이 생각보다 컸다. 투기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육마를 사용했다면 그 후폭풍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용호의 머리맡에서 홍련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언제나와 같이 아몬이었다.

[나의 주인이여.]

아몬의 속삭임은 용호뿐만 아니라 예속 사역마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들 모두는 홍련의 불길로부터 따스함을 느꼈다.

[그대는 투기장을 정복했다. 그리고 이제 구시온을 예속 사역마로 삼을 것이다.]

구시온은 도미노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스카자하가 완전히 합류할 터였고, 두 사람의 합류는 리처드의 합류 역시 유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카이완이 말했던 신 12 사역마가 현실로 다가온 셈이었다.

[구시온의 힘은 ‘용기’.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이끄는 그것.]

[왕의 선봉장인 그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힘은 없을 것이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구시온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카이완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린 아몬은 더욱 큰 불길을 일으켰다. 용호를 직시하며 말했다.

[이제 주인은 모든 자격을 갖추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했다. 용호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마몬.”

탐욕의 왕. 마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그는 어느 날 돌연 사라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역사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금제에 묶여 진실을 토로하지 못했다.

이제 그 모든 금제가 풀렸다. 용호는 마침내 진실을 들을 자격을 손에 넣었다.

[나 역시 유스티아와 같다. 구시온을 통해 전해 듣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홍련의 불길이 다시 약해졌다. 아몬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워졌다.

[급할 것은 없겠지.]

[그것은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목소리가 흩어졌다. 홍련의 불길 역시 사그라들어 사라졌다.

용호는 새삼 왼팔에 장착한 마몬의 신기를 보았다. 이제는 하나 된 마신왕의 심장으로부터 작은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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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공평하게 흘렀다.

마몬 가 밖, 북부와 서부, 마계의 중심에서도 사건은 진행되었다.

하루가 흘렀다.

북부의 싸움이 지속되었다. 격노의 왕과 팔부중 수장들의 회의는 그 사안의 중대함을 증명하듯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았다. 던전 상회 다섯 이사들의 회의는 평소와는 다소 다른 흐름을 보였다.

스카자하의 저택에서 용호와 구시온이 서로를 마주하였다.

구시온은 언제나처럼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않았다. 스카자하를 한 팔에 안은 채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 년도 넘게 지난,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제 65장 - 구시온 끝, 제 66장 - 왕의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 제 65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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