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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92화 (192/227)
  • < 제 65장 - 구시온 >

    제 65장 - 구시온

    세월의 무게는 무거웠다. 천 년 이상을 살아가는 강대한 존재들에게도 먼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헤아리는 것조차 버거운 과거의 일이었다. 수천, 수만을 넘는 수많은 나날들이 지금과 과거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했다.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다. 천 년도 더 지난 과거를, 왕이 이 세상을 떠났던 그 날보다도 더 오랜 과거를 마치 어제의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왕의 뒷모습.

    그 등을 따르고자 마음먹었던 순간. 철없던 시절의 자신.

    “나리.”

    나의 주군.

    나의 왕이여.

    구시온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보았다. 순간을 쪼개고 쪼개 만들어진 영원같은 찰나 속에서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자를 보았다.

    왕의 계승자.

    왕과 닮았지만 다른 자.

    구시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 진각을 밟았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과 함께 현재에 집중하였다.

    격돌했다. 굉음이 일었다.

    &

    30층에 올랐을 때부터 용호는 예속 사역마들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마몬의 신기로부터 12 사역마들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은 가능했지만, 투기장의 법칙은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30층 위에서 벌어진 싸움들은 식탐의 왕과의 결전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39층, 투기장의 최상층에서 벌어지는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면을 박찬 그 순간 용호는 마신왕의 심장을 발동시켰다. 하나하나 단계를 밟을 것도 없이 일곱 중 다섯의 발톱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릿했다. 동시에 용솟음치는 힘이 느껴졌다.

    생각이라면 간밤에 이미 많이 하였다. 구시온과의 싸움은 결코 장기전이 될 수 없었다. 지난 반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용호는 구시온과 함께했다. 시간의 흐름이 애매모호한 투기장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그 이상의 시간을 함께한 것 일수도 있었다.

    구시온은 자신의 밑천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가르침을 청한 날 이후 그는 스스로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용호 자신에게 전수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거리를 유지한다는지, 마력의 우세를 이용해 장기전을 펼친다든지 하는 방식은 모두 불가능했다. 구시온이란 이름의 마수를 제압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힘과 힘의 격돌인 원초의 싸움뿐이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구시온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 싸움은 화려한 불꽃과도 같으리라.

    집중했다. 구시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다리에 힘을 주었고, 지면을 박찼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속도를 낳아 공간을 가로질렀다. 주먹이 눈앞에 쇄도했다.

    굉음이 터졌다. 타격음이 아니었다. 주먹과 격돌한 허공이 폭발하며 일어난 소리였다. 대기가 울부짖었고, 거대한 파장이 주변 일대로 퍼져나갔다. 소리가 폭발하는 그때 용호는 주먹 아래를 지났다. 찢어져 날카롭게 변한 바람이 용호의 뺨을 스쳤다.

    첫 일격을 피했다. 두 말할 것 없이 기적이었다. 레드 데몬의 정점에 섰다해도 과언이 아닐 구시온의 동작에는 그 어떤 징조도 없었다. 뜻한 순간 육신과 마력이 함께 움직이니 마력을 직접 볼 수 있는 눈도 소용없었다. 그렇기에 기적이었다. 어찌 피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감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용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더 없이 거대해 보이는 구시온의 왼팔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구시온이 웃고 있었다.

    쾅!

    두 번째 굉음이 터졌다.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구시온이 몸을 회전시키며 내리꽂은 오른 주먹이 지면을 강타했고, 지면이 박살나기 직전에 용호가 두 번째 진각을 밟았다. 구시온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해 등 뒤를 점했다.

    대기를 뒤흔들었던 파장이 이번에는 지면을 뒤흔들었다. 힘을 견디지 못한 지면이 주먹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찢겨져 나갔다.

    오른손이 움직였다. 용호는 자신이 오른손을 내지른 순간을 포착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그 순간 초고온의 녹염을 머금은 아몬은 한 줄기 섬광이 될 수 있었다.

    주먹이 턱을 강타했다.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아몬의 창끝이 허공을 꿰뚫었다. 용호의 품 안에 파고든 구시온이 두 번째 주먹을 작렬시켰다.

    주먹이 튕겨 나갔다. 용호의 왼손에서부터 일어난 왜곡의 방패가 구시온의 주먹이 그린 궤적을 비틀었다. 일격을 막아낸 대가로 부서져 비산하는 실버 드래곤 아머의 투구 조각 너머로 용호와 구시온의 시선이 교차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다음 공격을 개시했다.

    폭음이 연이어져 하나의 소리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 벌어진 박투가 상상도 못한 결과를 야기했다.

    마력과 마력이 충돌했다. 대기가 비명을 지르는데 그치지 않았다. 국소 범위라 하나 세상의 시스템 그 자체가 요동쳤다.

    때리고 피했다. 단순하나 그만큼 치열했다. 마력 폭발로 인해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는 공간 속에서 오직 공격만이 반복되었다.

    구시온의 철갑이 피로 물들었다. 붉은 상체를 감쌌던 가죽 옷은 이미 녹염에 불타 사라졌다.

    용호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실버 드래곤 아머는 이미 넝마나 다름없었다. 공격이 오갈 때마다 그 파편이 허공에 흩어졌다.

    공격은 점점 더 빨라졌다. 숨 막히는 박투가 용호의 의식을 금방이라도 날려버릴 것 같았다.

    구시온은 격한 즐거움을 느꼈다. 용호가 생각 이상으로 잘 싸우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순수한 투쟁의 즐거움이었다.

    투기장 밖에서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를 동안 구시온은 스스로를 연마했다. 주인인 마몬의 죽음이 야기한 마력의 손실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레드 데몬이었다. 육체로 싸우는 자였다. 비록 마력이 약해졌을지언정, 구시온 그 자체는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상 최강의 레드 데몬이었다.

    콰앙!

    눈부시게 빠른 공격이 만들어낸 익숙함에 변화가 생겼다. 구시온은 용호를 공격하는 대신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단숨에 십여 미터 이상을 뛰어올라 몸을 회전시켰다. 급히 고개를 쳐들어 자신을 노려보는 용호에게 일각을 내뻗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공격은 흡사 대기를 불태우는 유성과 같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일격이었다. 벼락조차 능가할 것만 같은 일각이 지상을 강타한 순간 모든 것이 폭발했다.

    공격은 빗나갔다. 하지만 구시온은 개의치 않았다. 애당초 그가 원한 것은 이 일격으로 용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력에 대기가 요동쳤다. 순간을 쪼개고 또 쪼개도 그 차이를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은, 하나의 순간에 경기장의 바닥이 붕괴했다. 압도적인 힘에 중력을 잊은 수십, 수백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구시온은 보았다. 공격의 주체였기에 주변에 휘둘리지 않았다. 지독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찰나를 놓친 용호를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다.

    주먹이 아니었다. 구시온의 오른손이 용호의 왼손을 붙잡았다. 서로의 시선을 교차할 새도 없이 구시온은 괴력을 발했다. 있는 힘껏 오른손을 휘둘렀다.

    비명이 터졌다. 용호의 왼팔이 뜯겨져 나갔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졌다. 산채로 왼팔이 뜯겨져 나가는 충격이 용호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구시온이 용호의 왼팔을 버렸다. 용호의 왼쪽 어깨에서 솟구친 피가 용호와 구시온을 뒤덮었다. 용호의 왼팔을 뜯어냈던 구시온의 오른손은 이번에도 주먹을 쥐지 않았다. 추락을 개시한 지면의 파편 속에서 구시온의 일장이 작렬했다.

    피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그 어느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싸움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완벽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왼쪽 가슴과 허리 사이를 강타당한 용호가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날아 경기장 벽에 처박혔다. 벽과 충돌하며 일어난 충격만으로도 온 몸이 박살날 것 같았다.

    느낌이 왔다. 오른손 끝에 지금도 뼈와 살을 짓뭉개는, 산 자를 파괴하는 감각이 생생했다.

    구시온은 용호를 보았다. 무너져 내린 경기장 벽에 파묻힌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아쉬움 따위 버리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처음 약속했던 것처럼 끝을 내야 할 때였다. 단 한 번의 유효타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냈다. 만약 그 유효타가 용호에게서부터 발생했다면 구시온 자신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터였다. 찰나를 다투는 싸움이란 본래가 이런 법이었다.

    구시온은 고개를 들어 경기장 밖을 보았다. 카이완과 카타리나가 울부짖고 있었다. 오필리아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떨었고, 엘리고스가 현실을 부정했다. 티그리우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를 악물었다. 오직 스컬만이 굳건히 서서 구시온을 마주하였다.

    구시온은 시선을 돌렸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용호의 피로 물든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런 구시온의 앞을 홍련의 불길이 가로막았다.

    불의 폭포였다. 홍련에서 시작한 그것은 곧 녹염이 되었다.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가 구시온을 덮쳤다.

    구시온은 불길로부터 아몬을 느꼈다. 용호와 하나 된 그는 다른 예속 사역마들과 달랐다. 경기장 안에서도 여전히 의지를 발할 수 있었다.

    허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구시온은 마력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불의 장막을 움켜쥐었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아몬을 밀어냈다.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지금의 용호는 구시온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피해가 너무 커서 일어서는 것조차 무리였다.

    그러니 이제 끝을 내야 했다.

    불의 장막이 서서히 갈라졌다. 구시온은 그 틈바구니 사이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정면을 보았다.

    무너진 벽의 파편 사이에 용호가 앉아 있었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그가 하나 남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구시온은 용호의 눈을 보았다. 거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꼈다. 용호의 두 눈에는 여전히 투지가 불타올랐다.

    용호가 입술을 벌렸다. 수십 미터라는 거리가 있었지만 구시온은 용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서둘렀다. 다급히 힘을 발해 불길의 장막을 짓찢었다. 용호를 향해 진각을 밟았다.

    용호는 그런 구시온을 보았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눈을 감는 대신 오히려 부릅떴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입에 담았던 말을 완성시켰다.

    합체 강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 미뤄서는 안 되는 것.

    용호의 두 눈에서부터 녹색 안광이 불타올랐다. 다급히 질주하는 구시온의 정면을 다시 한 번 아몬이 가로막았다. 녹염의 파도가 시간을 만들었다.

    합체 강화의 대상이 된 마신왕의 심장으로부터 마력이 소용돌이 쳤다. 탐욕과 식탐이 일시에 포효했다.

    구시온이 마침내 녹염의 파도를 모두 가로지른 그때.

    거센 빛이 일었다.

    진정한 의미로 용호와 하나 된 마신왕의 심장으로부터 여섯 번째 발톱이 발동하였다.

    제 육마.

    그로인해 강림하는 자.

    경기장을 넘어 투기장 전체가 진감했다. 용호의 전신으로부터 녹염과 함께 무시무시한 마력이 내뿜어졌다. 여섯 개의 뿔 사이로 일시적인, 빛으로 된 일곱 번째 뿔이 흐릿하게 돋아났다.

    지쳤다. 부서졌다. 폭발시킨 마력을 감당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지금의 상태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 싸울 수 있었다.

    구시온이 웃었다. 부지불식간에 터진 웃음이었다. 기꺼움을 가득 담아 주먹을 움켜쥐었다.

    용호 역시 웃었다. 하나 남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홍련의 마창 아몬을 길게 늘어트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다시 한 번 격돌했다.

    &

    < 제 65장 - 구시온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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