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91화 (191/227)
  • < 제 64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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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어디에서나 공평하게 흘렀다.

    해가 지고 떠올랐을 때 언제나와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북부는 전쟁 중이었다. 오만의 군세와 질시의 군세는 매일 같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외부인들은 이 공방을 화끈한 회전을 기피하는 지루한 장기전이라 평했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직접 싸우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지루하기만 한 장기전이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죽고 다치는 이들이 생겼다. 오만의 군세가 연전연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아무런 피해 없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만의 군세 내에서도 적잖은 사역마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분명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다. 하지만 오전 중의 대치가 끝났을 때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었다. 오만의 군세는 보름 전 그러했던 것처럼 일부 병력을 진군시켰고, 질시의 군세에 속한 던전을 공격하였다.

    던전 안과 밖 양쪽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지루한 대치라 평하는 자들의 목을 모조리 치고 싶을 정도로 처절한 싸움이었다. 양측 모두 전체 전력의 오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소수 병력을 투입했을 뿐이었지만 전장에서 직접 싸우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 개개인에게는 오직 하나뿐인 목숨이었다.

    사역마 야크시니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숨을 간신히 이어나갔다. 피와 땀과 눈물이 뒤섞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고함과 비명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그녀는 팔부중의 일원인 야크샤였다. 북부에서 팔부중의 대우가 대개 그러하듯이 노예였다.

    입에서 거품이 일었다. 이제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끔찍한 격통이 왼팔 쪽에서 느껴졌고, 이내 아무런 감각도 전해지지 않았다. 뼈와 살이 짓뭉개지며 느껴진 고통만이 생생하게 남아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비참한 울부짖음과 노성 속에서 야크시니는 기묘한 침묵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 느끼는 특유의 감각일지도 몰랐다.

    다행히 주마등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북부에서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혹함의 연속이었다. 굳이 죽어가는 순간까지 과거에 고통 받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어제와 달랐다.

    야크시니는 그것을 느꼈다. 개인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떤 직감. 어쩌면 죽기 직전에 깨우친 팔부중 특유의 초능력일지 모를 그것.

    야크시니는 눈을 뜨기 위해 노력했다. 새삼 흘러내린 눈물이 눈가에 잔뜩 묻어있던 불순물들을 씻어주었다. 야크시니는 눈을 비빌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간신히 눈을 떠 하늘을 보았다.

    마치 북부의 전쟁을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들처럼 무심하기까지 한 햇살이 따갑게 쏟아졌다.

    다시 피가 튀었다. 무언가 크고 무거운 것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야크시니 주변에서 일어나던 전투가 조금씩 먼 곳으로 이동하였다. 어느 한쪽의 우세가 결정지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반복된 전투의 양상과 같았다. 하지만 야크시니는 분명한 차이점을 느꼈다. 우스운 일이었다. 한낱 노예로서 전장에 끌려다닌 끝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마당이었다. 어제와의 차이점 같은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야크시니는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마지막 힘을 쥐어짜 하늘을 보았다. 언젠가 한 번 타보았으면 했던 비공정들과 거대한 비행형 사역마들이 무척이나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야크시니의 작은 몸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야크시니는 그 어둠 속에서 깨달았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이해했다.

    오늘은 어제와 달랐다.

    내일은 더욱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격노의 왕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면을 주시하였다. 그녀는 지금 거처이자 요새인 비마나에 있지 않았다. 팔부중의 땅 중앙에 위치한 사원에 서서 다른 팔부중의 수장들을 기다렸다.

    사원은 원형이었고, 여덟 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 격노의 왕은 팔부중 전체의 수장이었지만 이 사원 안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격노의 왕이 아닌 드리타라슈트라- 팔부중의 일원인 간다르바의 수장으로만 인식되었다.

    때문에 그녀는 나머지 일곱 종족의 수장들과 동등했다. 결코 위에서 군림하지도 않았고, 아래에서 짓밟히지도 않았다.

    드리타라슈트라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저 긴장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불길한 기분이었다.

    언제나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듬어주던 키르티무카와 가르디문디는 이 자리에 없었다. 팔부중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각 종족의 수장들뿐이었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키르티무카가 알려준 방법대로 마몬 가의 가주 얼굴을 떠올리니 약간이나마 마음이 푸근해졌다. 부작용으로 얼굴이 다소 달아올랐지만 말이다.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가루라 일족의 수장이자 가르디문디의 아버지인 비류박차가 하늘에서 내려오며 일으킨 바람이었다.

    키가 크고 붉은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비류박차는 드리타라슈트라에게 목례했고, 드리타라슈트라 역시 목례로 응답했다. 비류박차가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것 마냥 팔부중의 다른 수장들이 연달아 사원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데바, 용, 야크샤, 간다르바, 아수라, 가루라, 가릉빈가, 마호라가.

    팔부중의 여덟 수장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더욱이 이번 모임은 격노의 왕과 그 휘하 팔부중의 수장들이 모인 경우가 아니었다.

    드리타라슈트라는 간다르바의 수장으로서 이 자리에 선 것이지 격노의 왕으로서 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간다르바의 수장 드리타라슈트라가 팔부중의 수장들에게 제안하는 바이오.”

    드리타라슈트라는 차분히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토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평소 그녀의 다정다감한 목소리와도, 전장에서 울려퍼지던 노성과도 달랐다.

    팔부중의 수장들은 이미 드리타라슈트라가 사원에서의 대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정해진 의식에 따라 드리타라슈트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의의 진행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드리타라슈트라는 이야기를 잇던 도중 돌연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가 달랐다. 콕 집어 무엇이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애써 불안함을 억눌렀다. 팔부중의 수장들 앞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식탐의 왕의 영토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시트리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늘을 달리는 고양이 마차는 어느새 지상에 안착해 있었다. 마계의 중심에 위치한 던전 상회 본점 옥상에는 다른 다섯 이사들의 마차들 역시 자리했다.

    추억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트리는 반쯤 감긴 눈으로 다른 마차들을 보았다. 모두 넷이었다. 아무래도 시트리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미 도착한 모양이었다.

    딱히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은 아니었다. 회의, 그것도 가상공간에서의 회의가 아닌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상태로 진행하는 회의가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었다.

    다섯 이사들이 실제로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벌써 세 번째였다. 그만큼 마계가 시끄럽다는 뜻이었다.

    시트리는 다시 한 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마침내 추억에서 깨어나 현재를 보았다. 하늘과 가깝지만 낮이고 밤이고 어둠에 휩싸여 있는 던전 상회 본점에서 새삼 차가운 공기를 삼켜보았다.

    가슴이 아릿했다. 시트리는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마차에서 일어섰다.

    오늘 회의가 소집된 이유는 식탐의 왕 때문이었다. 다른 어떤 왕보다 비밀 거래에 열심이었던 그가 비밀 거래를 일방적으로 파했을 뿐만 아니라 벌써 두 달이 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단순 은둔이라면 이미 나태의 왕이나 색욕의 왕의 경우가 있었지만 그 둘은 은둔에 들어간 지 이미 오래된 자들이었다. 더욱이 나태의 왕은 색욕의 왕과 달리 세력조차 꾸리지 않았기에 마계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식탐의 왕은 왕성하게 활동하던 자였다. 그의 실종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마계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물론 시트리는 식탐의 왕이 돌연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언급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자리를 지키다 물러날 생각이었다. 던전 상회의 창립자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오랜 세월 이사로 역임해온 그녀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건물 깊은 곳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시트리는 용호를 떠올려 보았다. 절로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아이는 그 사람과 닮으면서도 달랐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약간의 다름이야말로 용호가 마몬의 아이라는 사실을, 그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사실을 증명했으니 말이다.

    시트리 자신을 제하고는 아무도 몰랐지만 던전 상회의 초안을 만든 것은 마몬이었다. 진정한 왕이었던 그는 마계 전체의 부흥을 위해 던전 상회를 구상했다. 던전 상회가 큰 이윤을 포기하면서까지 싼 값에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그것이 마몬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마몬은 더 많은 것들을 구상했었다. 지금의 던전 상회는 마몬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트리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최고참이라 하나 그녀는 다섯 이사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다. 던전 상회의 식량 공급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지금의 시트리에게는 최선이었다.

    그 대가로 일선에서 물러섰다. 지친 것도 이유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권력과 영향력을 내려놓는 대신 식량공급 정책을 지킨 셈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 회의실에 도달했다. 가상공간과 똑같은 원형의 테이블에는 이미 다른 이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최강의 괴력 오로바스.

    최고의 지력 비프론즈.

    최강의 마력 아브라삭스.

    최속의 날개 사마엘.

    오로바스가 시트리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일견 추파로도 보일 수 있었지만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님을 시트리는 잘 알았다. 그는 시트리 다음으로 오래 된 이사였다.

    비프론즈는 여덟 개의 눈을 모두 감고있었다. 시트리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감지한 것 같지만 딱히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브라삭스는 언제나처럼 제멋대로 앉아 기묘한 형태의 장난감을 만지작거렸다. 시트리에게 음흉한 미소로 인사한 뒤에는 다시 장난감에만 집중하였다.

    “오셨습니까.”

    사마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지난번 특별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은 마음속에 묻어둔 얼굴이었다. 때문에 시트리 역시 화사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유일한 빈자리에 앉아 다른 이사들을 마주하였다.

    비프론즈가 눈을 떴다. 아브라삭스는 장난감을 집어넣고 킬킬 웃었고, 오로바스는 재차 시트리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사마엘은 온화한 미소를 전면에 내세워 속마음을 감췄다.

    시트리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언제나와 같은 회의였다. 하지만 어쩐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비프론즈가 입을 열었다. 회의의 시작을 선포했다.

    투기장 안은 고요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한 것만 같았다.

    카타리나는 기다란 귀를 움찔거리다 관중석을 보았다. 마몬 가의 전대 가주들 외에도 다른 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투기장에 예속된 사역마 전원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카이완은 쓰게 웃었다. 오필리아는 가볍게 전율했고, 엘리고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티그리우스는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스컬은 멈추어 섰다. 무어라 목소리를 내는 대신 멈추지 않고 홀로 나아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용호는 관중석을 가로질러 경기장에 섰다. 맞은편에 자리한 자를 바라보았다.

    “오늘이란 걸 알고 있었어?”

    “나도 오래 살았으니까. 예감이란 것이 들더군.”

    구시온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는 평소의 검은 정장 대신 가죽으로 만들어진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양 주먹에 찬 새카만 건틀릿으로부터 붉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네가 처음이다. 최상층에 올라 나에게 도전하는 것은.”

    참으로 길었다. 헤아리자면 천 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돌아온 탐욕의 왕. 그토록 그리워했던 왕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계승자.

    구시온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었다. 아이처럼 키득 웃으며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절대 봐주지 않을 거다. 설사 네가 패해 투기장의 사역마가 된다 할지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도발 섞인 선언에 용호 역시 미소지었다. 사납게 웃으며 실버 드래곤 아머를 장착했다. 허공을 움켜쥐어 홍련의 불길을 손에 넣었다. 탐욕과 식탐의 죄를 개방하였다.

    우뚝 솟은 여섯 개의 뿔.

    그것은 분명 왕의 힘이었다.

    마계를 좌지우지하는 여섯 왕과 나란히 서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구시온은 담담히 인정했다. 전성기에 미치지 못할 지언정 현재 가지고 있는 힘을 모두 끌어내었다. 구시온의 머리 위로 여섯 개의 뿔이 솟구쳐올랐다.

    괴력의 구시온.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서 최강의 근접 전투력을 보유한 자. 사실상 마몬과 하나라 할 수 있을 아몬을 제한다면 12 사역마 가운데서도 최강인 존재.

    그는 전설이었다. 살아있는 신화였다.

    “오라, 왕에 도전하는 자여.”

    구시온이 말했다. 용호는 그를 보았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성난 탐욕의 불길을 일으키며 돌진했다.

    투기장의 왕. 그것은 오직 하나뿐인 정점.

    용호와 구시온이 격돌했다. 원초의 싸움을 시작했다.

    제 64장 - 투기장의 왕 끝, 제 65장 - 구시온으로 이어집니다.

    < 제 64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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