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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89화 (189/227)
  • < 제 64장 - 투기장의 왕 >

    제 64장 - 투기장의 왕

    꿈을 꾸었다.

    그것은 분명 악몽이라 불러야 할 만한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구시온은 거친 숨을 토했다. 식은땀이 그의 붉은 육신을 따라 흘렀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투기장 안에서도 실감할 만치 길고 긴 시간이었다.

    구시온은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꿈속에서 본 광경들이, 옛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에 생생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악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리운 꿈이었다. 추억이라 해도 좋았다. 꿈속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처음에는 분노했다. 좌절했고, 마침내는 이 모든 것들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수긍했다.

    압도적인 시간 앞에 지쳐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구시온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마음을 편히 다스렸다. 마몬이 바란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왕의 계승자를 떠올렸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훨씬 더 나아졌다.

    구시온은 다시 눈을 떠 어둠을 보았다. 투기장 안을 맴도는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목전이었다. 조만간에 결정될 터였다.

    “나리.”

    구시온은 작게 불러 보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구시온은 추억에서 깨어났다.

    왕이 존재치 않는 현실을 마주하였다.

    &

    용호가 식탐의 왕의 영토에 대한 게릴라 공격을 시작한 지 한 달하고도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용호는 그 시간 동안 일곱 개의 던전을 공략했다. 거의 대부분이 식탐의 왕의 영토 서부에 자리한 던전들이었다.

    던전의 정수를 마음껏 포식한 루시아는 무럭무럭 자랐고, 7층을 건너뛰었음에도 불구하고 8층과 9층을 완벽하게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더불어 용호는 일곱 개의 던전에서 긁어모은 재화들로 마몬의 보물고를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물론 딱히 티가 나지는 않았다. 애당초 적색거룡 티아메트를 사기 위해 엄청난 양의 금을 뺏을 때도 별로 변한 게 없었던 보물고였으니 말이다. 실로 탐욕의 왕에게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재화였다.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는 카디스 요새를 훌륭히 성장시켰다. 과연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예산이라 할 만 했다. 돈을 문자 그대로 때려 박으니 그만큼 빠른 성과가 돌아왔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식탐의 왕의 오랜 침묵은 충분히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용호의 게릴라 공격 역시 식탐의 왕의 영토뿐만 아니라 그 밖의 영토에도 조금씩 소문이 퍼져나갔다.

    때문에 용호는 공격의 고삐를 잠시 늦추었다. 다른 왕들의 반응을 보고 움직여도 충분했다. 시간은 마몬 가의 편이었다.

    용호는 결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시간을 계속해서 마몬 가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시간을 알차고 유용하게 보내야만 했다.

    예속 사역마들과 더불어 투기장을 공략했다. 실전을 통해 새로 얻은 힘들을 체화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놓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탐욕의 미궁 10층으로 통하는 문을 개방합니다.]

    [이번에는 어떤 12 사역마가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두근두근, 콩닥콩닥.]

    루시아의 애교 섞인 보고에 용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초를 치지는 않았다.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이제 겨우 둘이 남았을 뿐이었다.

    각종 전승과 기록이 많고 많은 12 사역마인 터라 용호는 책을 몇 권 뒤지는 것만으로도 남은 두 사역마에 관한 것들을 제법 소상히 알 수 있었다.

    탐욕의 미궁 제 10층, 마몬의 대도서관을 지키는 것은 양자리의 유스티아.

    ‘길을 찾는 자’란 이명을 가진 그녀는 왕의 조언자인 동시에 예언자였다.

    [주인이여, 대도서관은 지식의 보고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유스티아의 지혜 역시 주인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언제나처럼 보편타당한 아몬의 조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서관이었다. 용호는 10층 보다는 11층에 있다는 각종 생활시설들 쪽에 보다 관심이 쏠리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욱이 11층을 지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처녀좌’였다.

    12 사역마들의 방을 비롯한 각종 개인적인 공간들이 가득한 11층. 그 11층을 지키는 것은 12 사역마의 마지막 멤버이기도 한 처녀좌, 별을 헤아리는 유노. 각종 전승에 미녀라는 이야기가 가득하니 남자로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냥 호기심일 뿐이지만.’

    새삼 스스로에게 말한 용호는 바로 곁에 자리한 카타리나를 돌아보았고, 카타리나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심층답게 10층에는 제법 강맹한 던전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어둠의 왕자라고도 불리는 나이트 셰이드뿐만 아니라 스펙터나 레이스 같은 어둠 속성의 정신체 몬스터들이 용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종 던전 몬스터들 가운데서도 어둠 속성, 특히 정신체 몬스터들은 상대하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물리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데다가 어둠 속성 특유의 기운이 산 자들에게 독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둠은 물론이고 빛 속성까지 보유한 용호였다. 예속 사역마들은 브리가다를 통해 용호로부터 빛 속성의 마력을 받았고,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파죽지세로 10층을 공략했다.

    [대도서관의 입구다.]

    [오랜만에 보는군.]

    양의 머리가 양각된 강철 문 앞에 서자 아몬이 속삭였다. 목소리에 진한 그리움이 어려 있었다.

    용호의 시선을 받은 스컬과 엘리고스가 강철 문을 열었다. 문 안쪽에서부터 종이 특유의 냄새가 밀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용호는 반사적인 감탄을 토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도서관이었다. 단순히 규모만 따진다면 보물고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섯 층이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천장이 높았고, 옆으로도 무척이나 컸다. 깊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기둥이 몇 개 있을 뿐 따로 벽이 존재하지 않으니 도서관의 광대함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방 천지가 온통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분위기에 혹해 책을 읽을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아몬이 세상 모든 지식을 담고 있다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케이언이 좋아했을 텐데.’

    카이완은 저도 모르게 동생을 떠올렸다. 그랬기에 얼른 이를 악문 뒤 표정을 고쳤다. 다행히 모두가 도서관에 정신이 팔린 터라 카이완의 표정 변화를 알아본 이는 없었다. 딱 한 명을 제하고는 말이다.

    “도서관 처음들 보나? 나는 안 보이고?”

    카랑카랑한 노파의 목소리였다. 대도서관의 광대함에 시선을 빼앗겼던 모두는 그제야 자신들의 정면에 시선을 둘 수 있었다. 바로 코앞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십여 미터 앞에 떡 하니 마련된, 누가 봐도 사서의 자리로 보이는 곳에 마르고 키가 큰 노파가 앉아 있었다.

    [유스티아.]

    아몬이 제일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허공에 홍련의 불길이 피어오르자 마른 고목나무 같던 유스티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아몬. 여전하구만.”

    유스티아는 목까지 모두 가리는 검정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깔끔히 틀어 올린 회색 머리칼 위로는 양의 뿔 한 쌍이 자리했고, 그 아래에는 연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있었다.

    왕의 조언자이며 또한 예언자인 노파 유스티아.

    꼿꼿한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특유의 성향인지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대도서관의 사서를 맡고 있는 유스티아다. 보다시피 외로운 노파지. 말이 짧아도 이해해라. 이래봬도 12 사역마들 중에서 최고령자이니. 아몬보다도 오래 살았으니 말 다했지.”

    어째 TV에서 몇 번인가 본 욕쟁이 할머니가 떠오른 용호였다. 물론 유스티아는 욕을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지만 말이다.

    용호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마몬 가의 현 가주인 천용호다.”

    “대단하군. 그냥 계승자 정도가 아닌데 이건. 일단 만나서 반갑구려. 제대로 된 계승자니 말을 아예 짧게 하기도 어렵구먼. 조금 말투가 뒤죽박죽이더라도 양해해 주구려.”

    호탕하게 웃은 유스티아는 용호에게 더 말을 잇는 대신 홍련의 불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툭 던지듯이 물었다.

    “아몬,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문이 닫혀 있는 동안은 내내 잠들어 있어서 알 수가 없군.”

    [천 년하고도 다시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몬의 대답에 유스티아는 눈을 감았다. 천 년은 터무니 없이 오랜 시간을 살아온 그녀에게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어. 하지만 나쁜 일만은 아니겠지. 시간의 흐름이 배신자들을 먹어치웠을 터이니 말이야. 구시온 같은 녀석들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르지.”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흘러나온 말이었다.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은 자연 유스티아의 마지막 말들에 집중하였다.

    시간의 흐름에 잡아먹혔을 배신자들.

    구시온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

    마몬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임에 분명했다. 용호는 입술을 벌렸고, 유스티아는 눈을 떴다. 용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니다. 구시온에게 들어라. 마몬 전하의 이야기는 구시온이 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거다.”

    엄격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할머니가 손자에게 전하는 다정한 조언에 가까웠다.

    유스티아는 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순서가 엉망이군. 10층까지 왔는데 7층은 아직인 건가?”

    [유스티아, 너도 투기장에 대해 알지 않는가.]

    아몬이 에둘러 답하자 유스티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와 달리 꽤나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토했다.

    “설마하니 지난 천 년 동안 마몬 가의 가주들이 투기장에 차곡차곡 쌓였다든지?”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아몬은 그저 홍련의 불길을 은은히 일으켰고, 용호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유스티아가 한숨을 토했다.

    “맙소사. 구시온 이놈 보게나. 내가 그놈의 투기장이 마몬 가를 잡아먹을 줄 알았지. 가주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와중에도 용케 천 년 넘게 대가 이어졌구만. 하지만 이 또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 그만큼 투기장에 축적된 힘이 어마어마할 터이니.”

    처음의 까칠한 인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용호는 유스티아로부터 유쾌함을 느꼈다.

    “잡담이 너무 길어졌군. 다 늙은 노파가 왕자의 시간을 더 뺏을 수는 없는 법이지. 이리 오시게나. 이 노파의 힘을 넘겨줄 터이니.”

    유스티아가 대뜸 용호에게 손짓을 해왔다. 왕자라는 호칭보다는 유스티아의 말에 놀란 용호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시험은 없습니까?”

    아무래도 외양이 외양이다보니 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몇 번 뵙지 못한 할머니 생각이 나서이기도 했다.

    유스티아는 끌끌끌 혀를 차더니 이번에도 툭 던지듯 말했다.

    “됐수다. 왕자는 탐욕은 물론이고 식탐까지 가진데다가 12 사역마 중에 반 이상의 힘을 허락받은 자잖소. 거기다 마그나돈 그 까칠한 영감탱이의 인정까지 받았지. 그런데 여기서 내가 무얼 더 시험하겠소. 시험이랍시고 해봐야 거추장스러울 뿐이지. 빨리 이 앞으로 와 보시오. 후딱 넘겨줄 터이니.”

    시원시원한 이야기였다. 카이완을 비롯한 예속 사역마들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번졌다.

    용호가 책상 바로 앞에 자리하자 유스티아는 눈짓으로 용호에게 손을 내밀 것을 청했다. 용호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스티아의 마르고 주름진 손이 용호의 오른손 위에 겹쳐졌다. 유스티아가 느긋하게 말했다.

    “나의 힘은 ‘인내’. 노파에게 썩 어울리는 힘 같지 않소?”

    용호는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유스티아는 용호를 더 곤란케 하는 대신 자신의 힘을 용호에게 주입하였다. 용호의 왼팔에 장착된 마장에 은은한 회색빛이 더해졌다.

    “예속 사역마로 삼는 것도 구시온이 먼저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구려. 구시온 다음에는 스카자하 고 계집애도 손에 넣으셔야 할 거고, 리처드 그 답답한 놈도 거두셔야 겠지. 이 늙은이의 순서는 제일 마지막이 좋을 것 같구려.”

    허허 웃은 유스티아는 용호의 손을 놓아주었다. 연이어 책상 서랍을 열더니 두툼한 카드 뭉치 하나를 꺼냈다.

    “힘만 넘겨주고 떠나보내기에는 좀 너무 섭섭하지. 정도 없고 말이야.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이 노인네의 이명은 길을 찾는 자라오. 왕의 예언자이기도 하고 말이야. 물론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진 이 세상에서 예언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행위에 불과하다오. 큰 흐름을 집어내는 것은 차라리 정보를 기반으로 한 통찰이겠지.”

    유스티아의 손 안에서 카드들이 바삐 오갔다. 뒤섞이는 와중에 잠깐잠깐 보이는 모습들이 타로 카드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런 카드를 이용한 점들이 미래를 대비하는 데 지침이 되기도 한다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보다는 작은 별빛에라도 의지해 길을 찾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수.”

    푸근하게 웃은 유스티아는 잘 섞인 카드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대로 용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우선은… 젊은이들의 영원한 관심사인 연애 점부터 봐보는 것이 어떻소?”

    “어, 연애 점은…….”

    카타리나의 귀와 꼬리가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린 터라 용호는 다른 점을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용호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카이완이 끼어들었다.

    “잘 부탁드려요.”

    용호가 카이완을 보았고, 카이완은 용호 대신 유스티아만 보았다. 유스티아가 유쾌하게 웃었다.

    “좋아, 그럼 우리 왕자님 연애 점을 한 번 봐 봅시다.”

    연극풍으로 말한 유스티아가 카드 더미에서 카드를 뽑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카타리나와 오필리아 뿐만 아니라 예속 사역마들 모두가 어느새 책상 주위에 몰려들어 유스티아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카이완이 제법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카드가 왜 세 장이에요?”

    유스티아는 음흉하게 웃었고, 카이완과 카타리나는 동시에 용호를 돌아보았다. 용호는 손바닥이 보이게 두 손을 들며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했다.

    “자, 그럼 뒤집어 보겠소.”

    날카로운 시선들이 오가는 사이에 유스티아가 카드 한 장을 뒤집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카드로 향했다.

    &

    “먼저 편지라도 한 장 써보심은 어떠십니까?”

    < 제 64장 - 투기장의 왕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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