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88화 (188/227)
  • < 제 63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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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은 인계로 치자면 성이나 요새와 같았다.

    마계의 주민들은 던전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꾸렸고, 자연 마을이나 도시도 던전 부근에 자리를 잡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던전의 내부 시설이나 규모를 숨기는 것은 가능해도 던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왕들은 타국의 영토 어디에 던전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았고, 약간의 오차가 있을지언정 던전의 총 숫자 역시 꿰고 있었다.

    식탐의 왕 휘하에는 모두 합쳐 쉰여섯 개의 던전과 마흔 명의 가주들이 있었다. 식탐의 왕의 모든 것을 강탈한 용호이기에 알 수 있는 정확한 정보였다.

    쉰여섯 개의 던전은 다시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눌 수 있었다. 식탐의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격노, 폭력, 오만 세 왕과 각기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세 지역으로 말이다.

    마몬의 네트워크 가운데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것들이 있었다. 개중 식탐의 왕의 영토 내에 있는 것은 모두 합쳐 다섯 개였고, 용호는 그중 폭력의 왕의 영토와 가까운 곳에 있는 공간의 문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획은 섬세하게 수립되었다. 용호는 바위산 기슭에 숨겨진 공간의 문으로부터 가까이에 있는 던전들의 리스트를 뽑은 뒤 공격 순서를 정했다.

    남부 공백지에서의 던전 전투와는 달랐다. 식탐의 왕의 영토에 자리하고 있는 던전들은 모두가 한 편이었다. 어느 던전 하나를 공략할 때 싸워야 할 대상은 그 던전의 병력만이 아니었다. 시간을 오래 끌면 다른 던전에서 지원군이 파견될 것이 분명했다.

    ‘은행 털이범이 된 기분인데?’

    타임어택이 중요했다. 용호 일행이 본격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던전을 적어도 네 개 이상 털어먹은 후여야만 했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9층에 위치한 제어실의 공간의 문을 통과한 용호는 인적 하나 없는 바위산 깊은 곳에 자리한 동굴 앞에 섰다. 자그마치 천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공간의 문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잘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살아있는 나머지 마몬의 네트워크들도 비슷하게 인적이 닿지 않는 산중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차가운 밤공기를 시원하게 삼킨 용호는 붉은 용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하필 붉은 용의 형상을 고른 것은 폭력의 왕을 연상시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겨우 이 정도 소품 하나로 모든 혐의를 폭력의 왕쪽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얕은 수였고, 용호는 딱히 폭력의 왕과 척을 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약간의 혼란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을 일으키기에는 이런 얕은 수가 제격이었다.

    용호는 연이어 공간의 문을 넘어 자리한 예속 사역마들을 돌아보았다. 이번 작전에 동행하기로 한 세 명이었다.

    “스컬스컬.”

    전신을 은빛 갑주로 뒤집어쓴 스컬이 꽤나 상기된 목소리를 토했다. 죽음의 화신이라 해도 좋을 언데드의 왕이었지만, 전신을 완벽하게 가리는 은빛 갑주를 입고 있으니 영락없는 성기사였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붉고 화려한 망토를 걸쳤을 뿐만 아니라 망치 대신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검과 방패를 들었다.

    카타리나 역시 다크 엘프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스컬과 마찬가지로 은빛 갑주를 입었다. 카타리나의 감정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꼬리는 허리에 잘 감아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멤버인 카이완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벌칙 게임 하는 기분이야.”

    “평소에도 비슷하게 입잖아.”

    5층 무기고에서 발견했던 붉은 레오타드 차림인 카이완은 용호의 정강이를 걷어찼고, 용호는 부드럽게 공격을 피했다.

    카이완은 한 차례 으르렁 거린 뒤 사복검 대신 채찍을 들었다. 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을 한 차례 쓸어 올린 뒤 검붉은 나비 모양의 가면을 썼다. 정말 카이완에게 딱 어울리는 복장과 가면이었다.

    용호는 시간을 보았다. 슬슬 움직여야 할 때였다.

    바위산으로부터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던전이 오늘의 목표였다. 날듯이 산을 내려간 용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던전 입구를 향해 달렸다. 던전 미어캣들이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가볍게 무시한 뒤 구시온에게 배운 일장으로 던전 입구를 박살냈다.

    침입자를 감지한 던전 입구의 조명이 꺼졌다.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사역마들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완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조명 기구를 던져 어둠을 몰아냈다. 동시에 용호는 의식을 집중했다. 식탐의 마력으로부터 열쇠를 찾아 공간의 문을 열었다.

    위크로스를 필두로 한 뱀파이어 로드 다섯이 용호의 곁에 도열했다. 데스나이트 열기는 스컬의 등 뒤에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섰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용호는 명령했고, 참된 교육의 결과 용호의 충신으로 거듭난 위크로스는 뱀파이어 로드들과 함께 부대 규모의 스켈레톤을 소환했다.

    처음 침입할 때는 고작 네 명이었지만 이제는 그 숫자가 일백을 우습게 넘겼다.

    용호는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몬 대신 무기고에서 고른 검을 움켜쥔 뒤 나직이 말했다.

    “최단 거리로 주파한다.”

    선언인 동시에 명령이었다.

    용호의 전신으로부터 탐욕의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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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켈레톤들과 좀비들이 아낌없이 몸을 던져 함정들을 해체했다. 집결지에서 수백 마리에 달하는 던전 사역마들이 오와 열을 이루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소용없었다. 스컬을 필두로 한 데스나이트 열기의 공격은 수비자들에게 있어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데스나이트들은 모두 스컬 부대에 들어갔다. 덕분에 스컬과 동기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동기화는 용호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데스나이트들은 서로의 전투경험을 공유함으로써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더욱이 이번에는 스컬도 득을 보았다. 데스나이트들의 전투경험은 스컬을 더 강하게 했고, 나아가 스컬 부대 전체의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동기화하여 일사분란하게 검을 휘두르는 데스나이트들 앞에서 던전 사역마들은 짚단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탐욕의 연기는 이번에도 정확한 길을 제시했다. 리빙 아머나 골렘과 같은 무생물 사역마들을 중심으로 한 방위 병력을 단숨에 돌파한 용호 일행은 순식간에 던전의 심장 방에까지 도달했다.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상투적인 대사를 내뱉는 던전 가주를 향해 카이완이 돌진했다. 평소처럼 사복검을 들지 않은 그녀였지만 대신 그녀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었다. 새카만 가죽 채찍은 사복검보다 더 빠르고 날카롭게 공간을 가로질러 가주의 몸을 옭아맸다. 카이완은 언제나처럼 채찍 끝에 걸린 가주를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벌 받을 시간-”

    말하다말고 카이완은 눈동자를 굴렸다. 역시나 예상대로 용호와 카타리나가 싸우다말고 카이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야…….”

    말꼬리를 흐린 카이완은 던전 가주를 바닥에 거칠게 매다 꽂은 뒤 가면 속에서 얼굴을 붉혔다. 몇 번인가 더 가주를 바닥에 후려친 뒤에야 변명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역할에 몰입한 거거든?”

    용호는 네 역할이 뭐냐고 묻는 대신 그저 웃고 말았다. 카이완을 더 괴롭히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그보다는 던전 공략이 우선이었다.

    카타리나는 의식을 잃고 널브러진 던전 가주로부터 정수를 회수했다. 용호 역시 던전의 심장 방으로 들어가 던전의 정수를 축출했다. 던전의 영혼이 이미 죽은 상태였기에 던전 방어막 외에는 이렇다 할 방해도 없었다.

    영롱한 빛을 내는 던전의 정수를 갈무리한 용호는 바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 목표로 한 것은 던전의 정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탐욕의 연기가 용호의 바람에 따라 새로운 길을 안내하였다.

    던전의 심장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던전 보물고에 도달하자마자 뱀파이어 로드들은 새로운 스켈레톤들을 소환했다. 미리 준비한 가죽 포대들 안에 보물고의 재화들을 담기 위함이었다.

    준비한 가죽 포대가 꽉 차자 용호는 뱀파이어 로드들과 데스나이트들을 식탐의 왕이 만든 ‘소환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저마다 가죽 포대를 하나씩 든 스켈레톤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뱀파이어 로드들을 따랐기에 역소환을 끝냈을 때 용호의 곁에 남은 것은 스컬과 카타리나, 카이완 이렇게 셋뿐이었다.

    다른 던전에서의 지원군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용호는 눈짓으로 명령한 뒤 몸소 앞장서서 던전을 빠져나갔다.

    밤은 아직 길었다. 갈 길 역시 멀었다.

    식탐의 왕의 휘하 던전은 아직 쉰다섯 개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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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가 식탐의 왕의 영토를 사정없이 들쑤시고 있을 때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는 카디스 요새를 강화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용호의 게릴라 공격은 식탐의 왕의 세력이 붕괴하는 데 일조할 것이 분명했다. 용호의 행동으로 인해 세력의 붕괴가 적어도 한 달 이상 앞당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렇기에 대비를 서둘러야 했다. 엠브리오가 워낙에 초토화를 해놓은 덕에 서쪽에는 신경 쓸 것이 별로 없었다. 동부는 이제 안정되었고, 남부는 오래 전부터 용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카디스 요새를 중심으로 하여 북부를 정비하는 한편 식탐의 왕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한 병력을 준비해야 했다. 작금의 카디스 요새는 방어의 축이라기보다는 공격을 위한 교두보에 가까웠다.

    마계는 약육강식의 사회.

    격노의 왕은 우방일 뿐이었다. 마몬 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속을 알 수 없는 폭력의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과 그 검이라 할 수 있을 예속 사역마들의 강함은 충분히 다른 왕들에 맞설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세력은 그렇지 못했다. 식탐의 왕의 세력이 붕괴하는 혼란기야말로 마몬 가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할 절호의 기회였다.

    다른 왕들이 보았을 때 기습이라 느낄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을 보여야만 했다. 용호가 하필이면 마몬 가와 가까운 던전들 대신 폭력의 왕이나 격노의 왕과 가까운 던전들을 먼저 공략하기로 한 이유는 단순했다. 두 왕이 나중에 정복할 수 있는 던전의 숫자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용호의 게릴라 공격은 식탐의 왕의 세력에게만 기습이 아니었다. 넓게 보면 격노의 왕과 폭력의 왕을 비롯한 왕들에 대한 기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영화를 잃고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마몬 가.

    수면 아래에서부터의 역습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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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으로 보면 작금의 마계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북부에서 오만의 군세와 질시의 군세가 연일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그 외 다른 지역에서는 비록 긴장 속에 평화일 지언정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수면 위의 모습일 뿐이었다.

    수면 아래에서 역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마몬 가 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저마다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식탐의 왕의 세력 내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세 가주는 뜻을 하나로 모아 한 장의 서신을 작성하였다. 그들이 나라를 바칠 대상으로 정한 왕에게 사신을 급파하였다.

    던전 상회 다섯 이사 가운데서 최강의 마력을 자랑하는 아브라삭스는 다시 한 번 오만의 왕과 만남을 가졌다. 본래 북부 지역에 자리한 왕과의 비밀 거래는 최강의 괴력인 오로바스가 수행해야 할 일이었지만 만남을 가지는 두 사람 모두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최고의 지력 비프론즈는 색욕의 왕과의 만남을 가졌다. 비밀 거래는 본래 왕이 다섯 이사에게 요청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비프론즈가 먼저 색욕의 왕에게 비밀 거래를 요청하였다.

    색욕의 왕은 요청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비프론즈가 그 혹은 그녀인 색욕의 왕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최속의 날개 사마엘은 던전 상회의 결함품들을 쌓아놓은 창고에서 리치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그녀는 어렵지 않게 리치를 가져간 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시트리. 다섯 이사 가운데서 최고참이자 오랜 세월 그저 존재하기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자.

    그녀가 근래 들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중심에는 마몬 가의 새로운 가주가 자리했다.

    사마엘은 특별 경매장에서 시트리가 자신에게 했던 경고를 기억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마몬 가의 가주 천용호.

    그에게 무언가가 있었다. 작금 마계에 알려지지 않은 다른 무언가가.

    사마엘은 집무실 책상 서랍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성사되지 못한, 식탐의 왕이 마지막으로 요청했던 비밀 거래와 관련된 서신이었다.

    수면 아래에서,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저마다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몇 가지 움직임은 서로 유기적인 연관 관계를 가졌다.

    겉으로는 평화로웠다. 마치 지금의 상태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달랐다.

    수면 아래에서의 움직임은 곧 커다란 물살이 되어 수면 밖으로까지 영향을 미칠 터였다.

    자신의 레어에 돌아온 폭력의 왕은 격노의 왕이 보낸 서신을 뒤늦게 읽었다. 마몬 가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폭력의 왕의 앞으로의 행보를 묻는 이야기 등이 실려 있었다.

    ‘아저씨는 마몬 가의 가주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괜찮은 사람 같나요? 저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탐욕의 왕.

    폭력의 왕은 서신을 내려놓았다. 답장을 쓰는 대신 가장 위대한 종족 드래곤의 왕으로서 세상을 굽어보았다.

    수면 위로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이제 곧 수면 아래의 물살이 마계 전체를 뒤흔들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아무리 그대라 하여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군.’

    폭력의 왕은 나태의 왕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은둔하여 세상으로부터 잊힌 왕이었지만, 그 역시 이미 개입되고 말았다. 폭력의 왕 자신과의 계약이 이를 증명했다.

    수십 년 만의 외유를 마친 거체가 본래 있어야 할 곳에 자리를 잡았다. 폭력의 왕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의구심을 자극하던 과거의 일들은 거진 정리가 되었다. 이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미래에 펼쳐질 일들이었다.

    폭력의 왕은 짧은 잠을 청했다.

    세계의 관찰자로서 그리 멀지 않은 격변의 시대를 기다렸다.

    제 63장 - 기습 끝, 제 64장 - 투기장의 왕으로 이어집니다.

    < 제 63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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