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87화 (187/227)
  • < 제 63장 - 기습 >

    제 63장 - 기습

    던전의 영혼과 던전의 주인인 가주는 일심동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주의 성장은 곧 던전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그 역 또한 성립하였다.

    식탐의 왕과의 전투를 전후로 하여 용호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당연히 루시아 또한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던전에 대한 장악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했다. 탐욕의 미궁은, 저 위대한 탐욕의 왕 마몬의 거처는 그 이상의 힘을 요구했다.

    중간에 7층과 8층을 사실상 건너뛰어야 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두 개 층을 가로질러 원격으로 9층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그야말로 간신히 9층의 장악에 성공했다. 하지만 불완전한 장악이었다. 완벽하게 9층을 제어하고, 나아가 7층과 8층을 비롯한 탐욕의 미궁의 남은 층 모두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루시아가 조금 더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던전의 영혼을 성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던전의 심장에 다른 던전의 심장으로부터 채취한 던전의 정수를 먹이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남부 공백지는 동서남북 사방위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던전의 숫자가 기존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남부 공백지라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해야하는 용호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던전이 줄어드는 사태만은 피해야 했다.

    때문에 공백지 내의 던전으로부터 던전의 정수를 구한다는 발상은 기각이었다. 용호가 노려야 하는 것은 공백지 밖의 던전들이었다.

    먹이라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먹음직스럽고, 비교적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먹이가 말이다.

    식탐의 왕의 영토에 자리한 수많은 던전들.

    각 던전의 가주들이 멀쩡히 살아있었지만 그들 모두를 총괄하는, 다른 영토의 침공을 저지하는 가장 큰 억지력인 식탐의 왕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은 현재 마몬 가뿐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던전 공략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정석이 존재했다.

    하나는 대규모 병력을 이용한 정공법.

    마계에서 일어나는 던전 전투의 팔 할 이상이 이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다수의 사역마들을 이용해 던전의 방어 병력과 함정들을 해체하며 전진하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일반 사역마들의 피해가 컸지만 대신 예속 사역마를 비롯한 최정예 병력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더욱이 던전을 점령하고 지배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쪽에서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엠브리오의 수하였던 비자로가 택했던 무식할 정도의 인해전술이 이에 속했다.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포라스가 용호를 공격했을 때 취한 방법도 큰 맥락에서 보면 대동소이했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 방식과는 반대로 최정예 소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투입하는 최정예 병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쪽의 피해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던전 공략에 필요한 시간까지 줄어들었다. 병력 규모 자체가 소수였기 때문에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한 기습을 하기에도 좋았고 말이다.

    하지만 던전을 지배하기에는 좋지 못한 방식이었다. 더욱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던전에 최정예 병력을 투입하는 일이었기에 위험도 자체가 높았다. 자칫하면 공격자측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용호는 공격자와 수비자의 입장으로 두 번째 방법의 장단점을 모두 경험했다.

    동부 공략에 용호는 그리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스트라바디의 던전을 공략한 것은 용호와 예속 사역마 육인이었다.

    때문에 용호는 스트라바디의 던전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단 한 마리의 사역마도 잃지 않았다. 몸소 움직인 대신 이쪽의 쓸데없는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었다.

    식탐의 왕이 마몬 가를 공략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도 같았다. 하지만 식탐의 왕은 용호와는 반대로 크나큰 손실을 보았다. 일차적으로 투입한 십인중은 전멸하였고, 이차적으로 본인 스스로가 나섰다가 아예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식탐의 왕이 스스로 움직인 것은 십인중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식탐의 왕까지 목숨을 잃은 결과 식탐의 왕의 영토는 빈껍데기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단 두 번의 던전 전투로 인해 일국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고 만 셈이었다.

    식탐의 왕의 영토를 표시한 마계 지도를 보며 용호는 생각했다.

    첫 번째 방법인 정공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마몬 가의 정예병인 스컬 부대와 블랙 오크 전대는 강력했지만 그 수가 너무 적었다. 공백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다시 병력을 규합하긴 했지만 용호가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이 천이 채 되지 못했다.

    이 정도 숫자로 북부를 치는 것은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이런 방식으로 공격할 경우 식탐의 왕의 부재가 지나치게 빨리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늘 그랬지만 용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식탐의 왕의 죽음이 알려지는 것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았고, 우방인 격노의 왕을 비롯한 다른 왕들이 용호를 견제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았다.

    때문에 용호가 택해야 할 방법은 당연히 두 번째 방법이었다.

    최정예 소수 병력을 이용한 던전 공략.

    아무리 식탐의 왕이 없다고는 하지만 식탐의 왕의 던전들은 남부 공백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용호가 구상하고 있는 큰 그림을 위해서는 예속 사역마 전원을 동원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식탐의 왕의 휘하 던전을 공략한 공격자는 마몬 가가 아니어야만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 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세력인 편이 더 좋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식탐의 왕의 휘하 던전들을 공략하기 위해 예속 사역마 이외에 어떤 병력들을 사용할 것인가. 과연 마몬 가에 그런 병력들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있었다. 분명히 존재했다.

    용호는 자신에게 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나 다름없어진 식탐의 왕에게 작은 감사를 표했다.

    &

    “다 좋은데 왜 하필 여기냐.”

    투기장의 주인인 구시온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용호는 경기장 위에서 가볍게 몸을 풀며 답했다.

    “여긴 튼튼하잖아. 싸우기도 좋고. 생명의 정원에선 농사가 한창이라고.”

    애당초 생명의 정원은 관상을 위한 정원이지 싸움터도, 농사를 위한 농지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진 구시온이었지만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새삼 비료 냄새가 끔찍하다고 하소연하던 스카자하의 편지가 떠올랐다.

    “스카자하가 보고 싶군.”

    “곧 보게 될 거야.”

    시원하게 답한 용호는 어깨를 마저 풀었다. 심호흡까지 한 번 한 뒤에야 자세를 바로한 뒤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기장 위에 선 예속 사역마들을 돌아보았다. 가운데를 비운 채 크게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다들 준비해. 바로 시작할 테니까.”

    용호의 말에 예속 사역마들은 저마다 자세를 잡았다. 카이완은 키득 웃으며 사복검을 채찍처럼 늘어트렸고, 카타리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했는지 꼬리를 빳빳이 세웠다. 오필리아와 엘리고스는 각각 발목과 손목을 풀었고, 티그리우스는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리고 한 명. 이번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스컬은 껄껄껄 웃는 것으로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예속 사역마들의 상태를 확인한 용호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저만치 특별 관람석에 앉은 구시온에게 말했다.

    “여차하면 도와줄 거지?”

    “도와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만.”

    기분 좋은 빈정거림이었다. 도와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장한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이 무척이나 기꺼웠기 때문이다.

    용호는 다시 숨을 골랐다.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어 핥은 뒤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시켰다.

    일깨우는 것은 식탐.

    탐욕의 힘으로 집어삼킨 식탐의 왕의 마력.

    탐욕은 식탐의 왕의 것을 작은 것 하나 남기지 않고 소유했다. 실로 탐욕스러운 강탈이었다.

    용호는 그 가운데서 하나를 찾아냈다. 식탐의 죄악과 식탐의 왕의 마력으로 찾아낸 하나를 속였다. 용호 자신을 식탐의 왕으로 착각하게 한 뒤 문을 열 것을 명령했다.

    마법으로 형성된 계약은 용호의 명에 순응했다. 계약을 오롯이 실행해 감춰져 있던 공간의 문을 열었다.

    용호의 정면.

    공간이 열리며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뱀파이어 로드, 데스나이트, 엘더 리치, 본 드래곤.

    하나하나가 그 이름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할 수 있는 최상위 언데드들이었다. 식탐의 왕이 다른 왕들과의 결전을 위해 비밀 거래로 구매한 이들은 그 숫자가 수십이 채 되지 못했지만, 하나하나가 이미 군단이라 해도 좋을 괴물들이었다.

    용호는 공간 너머에 자리한 언데드들을 전부 불러내지 않았다. 식탐의 왕이 마몬 가를 공격하기 위해 소환했던 것들만을 고스란히 불러내었다. 의도한 바도 있었지만, 가장 최근의 소환 기록을 그대로 사용했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였다.

    뱀파이어 로드 다섯과 데스나이트 열하나.

    갑자기 소환된 그들은 작은 혼란에 빠졌다. 분명 자신들의 주인인 식탐의 왕의 부름을 받고 나타났는데 식탐의 왕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용호를 보았다. 그나마 식탐의 왕의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 용호였기 때문이다.

    데스나이트 정도 되면 자아와 제법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피의 군주인 뱀파이어 로드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용호를 보며 생각했다. 눈앞의 존재는 일전 식탐의 왕이 공격하라 명했던 마몬 가의 가주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공격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만 할까.

    하지만 헛된 고민이었다. 용호는 애당초 그들에게 선택의 시간조차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예속 사역마들이 마력을 개방했다. 마치 경매장에 참석한 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사정없이 칼날과도 같은 마력을 주변에 방출했다.

    뱀파이어 로드들과 데스나이트들은 졸지에 마력의 폭풍우 속에 갇힌 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력의 폭풍우 말고도 그들을 위협하는 것이, 두렵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데스나이트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뱀파이어 로드들은 얼굴 한 가득 경악의 빛을 띄운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죽음이 서 있었다.

    노 라이프 킹.

    죽음의 화신이었던 바포메트의 힘을 계승한 스컬.

    죽음에 속한 언데드들이 눈앞의 죽음에 공포를 느꼈다. 보랏빛 죽음의 기운이 그들을 휘감았다.

    그리고 마지막 충격이 언데드들을 강타했다.

    우뚝 솟은 여섯 개의 뿔.

    탐욕과 식탐이 동시에 힘을 발했다. 마몬의 신기와 격노의 신기가 동시에 빛을 발했다.

    언데드들은 숨 쉬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사방에서 자신들을 조여오는 강대한 마력에 압도되었다.

    식탐의 왕이 준비한 언데드 군단.

    이들은 식탐의 왕과 계약한 사역마들이었다. 아무리 용호가 식탐의 죄악과 식탐의 왕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이들을 완벽히 부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재계약이 필요했다. 과거 살라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조금은 과격하면서도 강제적인 재계약이 말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용호는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예속 사역마들 역시 저마다의 브리가다를 통해 탐욕과 식탐의 힘이 어린 마력을 방출하였다.

    뱀파이어 로드들의 대표 격인 붉은 달의 기사 위크로스는 뱀파이어 로드가 된 이래 처음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용호가 그에게 다가섰다. 허공으로부터 홍련의 불길을 움켜쥐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재교육의 시간이다.”

    잠시 후, 위크로스는 뱀파이어 로드가 된 이래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

    《말씀하신 가면입니다.》

    《주문하신 것처럼 용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 보았습니다.》

    버그림의 작은 칠판을 본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런 얼굴로 버그림을 치하한 뒤 그가 가져온 물건을 카타리나와 카이완 쪽으로 가져갔다.

    언데드 군단의 참되고 바른 재교육을 끝낸 용호는 예속 사역마들에게 쉴 것을 명한 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기다릴 것도 없이 버그림을 맞이했다. 언제나 열심히 일하는 버그림답게 짧은 시간 만에 용호가 부탁한 물건을 멋들어지게 완성해 주었다.

    버그림이 가져온 것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가면이었다. 머리 전체에 뒤집어쓰는 것이었기에 사실 가면이라기보다는 투구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색이 달라서 그렇지 기본적인 형태 자체는 실버 드래곤 아머의 투구와 비슷했다.

    금속광택이 나는 가면을 슥슥 만지던 용호는 이내 머리에 뒤집어 써보았다. 버그림이 특별히 신경을 쓴 물건답게 답답한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때?”

    “멋있습니다. 멋져요.”

    카타리나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짝짝 박수를 쳤다. 언제나처럼 귀가 파닥거리는 것을 보니 진심에서 우러난 감탄 같았다.

    “그치?”

    용호도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기분 좋게 웃으며 카이완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카이완은 카타리나와 달리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유치하지 않아? 색깔도 너무 빨간 것 같고. 뭣보다 가면 쓰고 좋아하는 게 완전 애 같아, 애.”

    카이완의 지적에 용호는 흥하고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

    “싸울 때마다 칼채찍 휘두르면서 벌 받을 시간이라 소리치는 여자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치명적이라 해도 좋을 공격에 카이완이 움찔했다.

    “아, 안 그랬거든?”

    용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볼 것도 없었다. 카타리나가 파닥이고 살랑이던 귀와 꼬리를 딱 멈춰 세운 뒤 엄격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했어요.”

    “했지.”

    용호까지 짧게 동의하자 카이완은 더 버티지 못했다. 얼굴은 물론 목까지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용호는 그런 카이완을 배려해 추가타를 가하는 잔혹함을 보이지는 않았다. 가면을 벗어 다시 한 번 슥 만져본 뒤 미소 지었다.

    식탐의 왕의 영토를 공격하는 것은 마몬 가가 아니어야 했다.

    의문의 세력.

    붉은 용의 가면을 쓰고 최상위 언데드들로 이루어진 정예부대를 부리는 존재.

    “자, 그럼 한 탕 제대로 해보실까.”

    [주인님, 지금 엄청 악당 같은 거 아세요?]

    [악당이라 더 좋지만요.]

    [예속 사역마 카이완이 쓸 가면과 의상도 무척이나 기대되는 걸요?]

    루시아가 모두에게 들리게 말했고, 발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익기 시작하던 카이완이 움찔했다.

    카타리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용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 제 63장 - 기습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