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0장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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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순간이었다.
식탐의 갈망이 육신 밖으로 표출되려 했다. 탐욕의 연기와 달리 식탐의 경우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외부에 표출하는지 알지 못하는 용호였다. 탐욕의 연기는 기본적으로 용호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식탐은 다를 수 있었다.
아니, 가시성을 논하기 이전에 외부에 노출된 그 순간 식탐의 죄악이 격노의 왕에게 발각당할 우려가 있었다.
용호는 탐욕의 힘을 이끌어냈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라 해도 좋았고, 그만큼 속도가 빨랐다. 노도처럼 일어난 탐욕이 식탐을 집어삼켰다.
탐욕의 힘을 외부에 돌출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식탐을 억눌러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발동 자체는 본능이었지만 그 직후는 아니었다. 용호는 강한 통제력을 발해 두 죄악을 다스렸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격노의 왕에게 죄악을 보유한 사실을 들킬까봐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두 가지 죄악을 동시에 제어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겨우 수초 남짓.
극도의 집중력을 발한 끝에 탐욕이 식탐을 제압했다. 완전히 감싸 밖을 느끼지 못하게 하였고, 식탐의 죄악은 식탐의 신기를 바로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더 이상 갈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용호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토했다. 약간이지만 성취감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또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격노의 왕이 탐욕과 식탐의 죄악을 눈치 채지 못했다하여 능사가 아니었다.
용호 자신은 지금 격노의 왕의 눈앞에 서 있었다.
겨우 수초 남짓이었지만 그래도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었다. 극도의 집중력을 발하느라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기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용호는 급히 정면을 보았다. 격노의 왕이 고개를 갸웃 기울인 채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용호의 입이 열렸다. 속된 말처럼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쏟아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미인이시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마주뵌 모습이 소문 이상으로 아름다우셔서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아니, 개수작에 가까웠다. 대체 누가 이런 헛소리에 넘어간단 말인가.
‘어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격노의 왕이 시선을 내리 깔더니 몸을 아주 약간 비틀었다. 귓불은 물론이고 뺨이 붉었다. 피부가 하얗다 보니 더욱 도드라졌다.
이번에는 용호가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설마하니 통했단 말인가?
용호의 시선을 느낀 격노의 왕이 다급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과, 과찬이오. 하지만 그리 봐준다니 정말로 고맙소.”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 다시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용호는 눈을 다시 깜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멍한 눈이 되어 격노의 왕을 보았다.
이 모든 광경에 카타리나는 꼬리를 발딱 세웠고, 카이완은 도끼눈을 떴지만 주변에 있던 모두가 용호와 격노의 왕에게만 집중한 터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두 손을 모아 쥐며 감격한 얼굴이 된 키르티무카를 제외한 모두가 침묵에 빠진 몇 초가 지났다. 비로소 정신을 수습한 용호가 연습한 대로 격노의 왕을 회담 장소로 에스코트 했고, 마침내 용호와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 사이의 정상회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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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게 시작해 쭈뼛쭈뼛 이어진 정상회담은 약 한 시간여 만에 마무리가 되었다.
그래도 대화하는 사이 서로에게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서로의 입장을 자각했기 때문인지 중간부터는 용호와 격노의 왕 모두 평상시의 여유를 되찾았다. 약간이지만 가벼운 농담까지 오갈 정도였다.
이미 서신 왕래를 통해 어느 정도 기틀을 잡은 비밀 동맹이었기에 구태여 동맹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 무언가 조약을 주고받는 식의 동맹이 아닌, 말 그대로 친교 관계를 수립한 동맹이었기에 이렇다 할 세부 사항도 존재하지 않았다. -
용호의 에스코트를 따라 팔부중들에게 돌아간 격노의 왕이 먼저 돌아갔고, 잠시 대기하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용호가 연이어 적색거룡 티아메트에 오르는 것으로 회담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소형 비공정 위에 오른 격노의 왕은 선장실 의자에 편히 앉았다. 몸을 늘어트린 채 말했다.
“여간내기가 아니야. 강해.”
표정이 진지했다. 마몬 가의 가주가 어땠느냐고 질문을 한바탕 쏟아낼 예정이었던 키르티무카는 당혹으로 인해 입을 다물었고, 가르디문디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회담 내내 심장이 두근거려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격노의 왕은 전투광이라는 이명이 붙을 만큼 많은 전투에 참가한 자였다. 수많은 강자를 보았고, 수많은 싸움을 경험했다.
그렇게 익힌 감이 말해주었다. 마몬 가의 가주는 사선을 넘어본 자였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수많은 사투를 경험한 자가 분명했다.
회담 도중에 몇 번인가 시험을 해보았다. 아주 작지만 치명적인 한 수로 이어질 수 있는 몸짓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몬 가의 가주는 반응했다.
생각하고 한 반응이 아니었다. 거의 반사적이라 해도 좋을 움직임이었다.
마계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역시 마력이었다. 하지만 마력이 강하다하여 반드시 강자인 것은 아니었다. 싸움에는 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
격노의 왕의 감각과 경험이 알려주었다. 마몬 가의 가주는 강했다. 그는 격노의 왕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존재였다.
“가르디문디, 마몬 가의 가주… 천용호… 천용호 님의 권능은 정말로 불꽃인 거야?”
격노의 왕의 물음에, 정확히는 용호에 대한 호칭에 키르티무카가 눈을 번쩍였다. 가르디문디는 그런 키르티무카와 달리 격노의 왕이 질문을 꺼낸 이유 자체에 집중했다. 평소의 발랄함과는 대비되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확실하지 않아요. 그가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꽃의 마왕이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굳이 권능을 사용하지 않아도 불꽃을 다룰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마몬 가의 가주가 본 드래곤을 쓰러트렸다- 가르디문디는 헛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지?”
“네, 전하.”
빠르게 이야기가 오갔다. 격노의 왕은 입술을 오므린 채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했다. 가만히 격노의 왕을 살피던 가르디문디가 다시 말을 보탰다.
“최근에 접한 소문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가르디문디는 타고난 정찰병이었다. 자유도시 선술집에 머물렀을 때 그녀는 도박으로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들. 거기에 더해진 마몬 가 집사보의 종족에 대한 의문.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물건을 사들이는 와중에 자연스런 몇 마디를 섞어 넣음으로써 그녀는 새로운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불명확한 터라 보고 드리지는 않았지만, 마몬 가의 가주에게는 사역마들의 능력을 성장시키는 아티팩트가 있다는 것 같아요.”
“사역마의 능력을 성장시키는?”
“예, 겉모습이 변할 정도로 현격한 능력의 성장을 유도하는 아티펙트라는 소문이에요.”
실제로 마몬 가의 사역마들 가운데 몇이나 아티펙트의 덕을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가르디문디는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했다. 정말로 아티펙트의 효능인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마몬 가 가주의 권능인 것은 아닐까?
가르디문디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격노의 왕은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번 동맹… 생각 이상의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서글픈 사실이었지만 최고의 전쟁 억지 수단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막강한 힘이었다.
마몬 가가 정말로 예상했던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 동맹으로 양가 사이에 진실 된 우호관계가 형성된다면, 그리고 여기에 폭력의 왕이 힘을 보태준다면.
실로 막강한 전쟁 억지력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비록 냉전일지언정 향후 수십 년간 평화가 이어질 터였다.
격노의 왕과 가르디문디가 진지한 가운데 키르티무카 역시 진지했다. 그녀는 격노의 왕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마몬 가의 가주는 어떠셨습니까?”
야크샤인 키르티무카는 감정이나 속마음을 감추는데 서툴렀다. 의도가 빤한 질문에 격노의 왕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절로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번에도 귓불을 감추지는 못했다.
“지쳤어.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할게.”
격노의 왕이 말했고, 키르티무카는 만족했다. 음흉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흘리며 예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키르티무카와 가르디문디가 선장실을 나가자 격노의 왕은 간이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정말로 잘 생각이었던 터라 조명까지 꺼버렸다.
마몬 가의 가주를 맞이했을 때 위화감을 느꼈다.
경매장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다소 다른 두근거림을 경험했다.
더 강렬한 느낌. 무언가 더 강한 충동.
이게 정말 키르티무카의 말처럼 사랑인 걸까? 아니면 격노의 왕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격노의 왕은 누운 채로 도리질을 했다. 어차피 마몬 가의 가주와는 한동안 계속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다. 그 와중에 점검해보면 될 문제였다.
‘자자.’
마음을 다잡은 격노의 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떴다. 두 손을 들어 양 뺨 위에 올렸다. 뜨거웠다.
‘어떡해, 못 자겠어.’
눈을 감았더니 마몬 가 가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시작된 두근거림 속에 격노의 왕은 몸을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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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다.]
[마력이 문제가 아니다. 순수한 강함의 문제이다.]
[격노의 왕은 식탐의 왕 이상의 강자이다.]
허공에 피어오른 홍련의 불길로부터 아몬의 속삭임이 전해졌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담이 진행되는 내내 절감한 바였다. 어째서 청초하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전투광이라는 이명이 붙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격노의 왕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식탐의 신기가 분명해. 어떻게 보면 얄궂은 일이네.”
용호 자신은 격노의 신기를 가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동맹도 맺은 김에 사이좋게 물물 교환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용호는 잠시 격노의 왕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식탐의 신기를 떠올렸고, 새삼 왜 자신의 특성에 엉큼함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이해했다. 입술을 살짝 깨물어 얼른 머릿속을 비워버렸다.
티그리우스가 말했다.
“격노의 왕은 예상 이상으로 마몬 가와 가주님에게 호감을 품은 것 같습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동맹 관계를 잘 이용한다면 식탐의 왕의 땅을 노려볼 여지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도 아시겠지만 땅을 직접 점령하지 않더라도 취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던전의 심장과 가주의 정수만이 아니었다. 수하로 삼을 여지가 있는 수많은 사역마들과 식탐의 왕이 그간 축적해온 재화와 보물들 역시 상정 범위 안에 있었다.
식탐의 왕과 심복인 십인중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리고 식탐의 왕의 적들 가운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마몬 가뿐이었다.
오필리아 역시 말을 보탰다.
“카디스 요새를 보다 보강한 뒤 전력을 집중 배치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서부는 초토화되었고, 동부의 가주들은 모두 가주님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폭력의 왕과 격노의 왕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전력을 식탐의 왕에게 쏟아 부을 수 있을 겁니다.”
주인 없는 보물이었다. 다른 이들이 갑자기 사라진 식탐의 왕의 기습이 두려워 움직이지 못할 때 용호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진군할 수 있었다.
한창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자 귀를 축 늘어트린 카타리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카이완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냐는 눈빛을 보내자 카이완은 이따 밤에 해결보자는 눈빛으로 응답했다.
카타리나와 카이완 사이에 오가는 시선을 까맣게 모르는 용호는 오필리아의 말에만 집중했다. 선실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남부 공백지 전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 한숨을 토했다.
“문제는 나인가. 티아메트와 살라미가 있긴 하지만 탐욕의 미궁과 카디스 요새 사이를 오가는 데 소모되는 시간이 너무 많아.”
식탐의 왕의 땅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용호가 카디스 요새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용호는 탐욕의 미궁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투기장도 정복해야 했고, 8층의 수문장인 리처드의 인정도 받아야 했다. 잠시 미뤄둔 스컬의 합체진화를 비롯한 예속 사역마들의 강화 역시도 빼놓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가운데 홍련의 불길이 새삼 불길을 일으켰다. 아몬이 나직이 말했다.
[나의 주인이여, 그것이라면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탐욕의 미궁 9층에 딱 좋은 해결책이 있다든가?”
용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고, 예속 사역마 일동 역시 눈을 빛냈다.
홍련의 불길이 아주 약간이지만 수그러들었다. 마치 당혹감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으음… 맞다.]
아몬이 사람이라면 헛기침이라도 터트렸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8층의 경험 때문인지 한껏 몸이 달아오른 오필리아가 홍련의 불길에 다가서며 물었다.
“어떤 해결책이죠?”
몸이 달아오른 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다시 한 번 초롱초롱한 시선들을 보냈다. 심지어는 티그리우스까지도 그러했다.
아몬은 결국 푸근하게 웃었다. 용호뿐만 아니라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 모두에게 속삭여주었다.
[공간의 문 통합 관제소.]
[휘하 던전으로의 공간도약을 관리하는 장소다. 더불어-]
아몬이 말끝을 흐렸다. 마치 모두의 애를 태우듯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9층을 지키는 것은 전갈좌, 대지를 질타하는 대마법사 마그나돈.]
오필리아의 표정이 변했다. 티그리우스가 숨을 삼켰고, 카이완과 카타리나가 동시에 경탄을 토했다.
대마법사 마그나돈.
또 다른 이명은 대지 파괴자. 지도를 바꾸는 자.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가장 괴팍하며, 또한 가장 위대한 마법 능력자.
홍련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리움과 유쾌함을 동시에 발산했다.
제 60장 - 동맹 끝, 제 61장 - 합체강화로 이어집니다.
< 제 60장 #7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