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81화 (181/227)

< 제 60장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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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하세요, 이제 곧이니까.”

키르티무카의 애정 어린 다독임에 격노의 왕은 바늘에 쿡 찔린 사람처럼 움찔했다. 따지듯 빠른 말을 쏟아냈다.

“아니거든? 내가 언제 안절부절 못했다고 그래?”

말투가 제법 사나웠지만 키르티무카는 푸근하게 웃었다. 격노의 왕의 귓불이 붉었다.

“그렇게까지는 말씀 안 드렸는데요.”

일견 음흉해 보이기까지 하는 키르티무카의 능청에 격노의 왕은 괜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급히 손을 놀려 한창 만들던 옷의 마무리를 지었다.

“미친 소리 작작하고 이거나 입어봐.”

격노의 왕의 앉은 자리 부근에는 이것저것 잡다한 수제품들이 한 가득이었다. 정신이 산만하거나 초조할 때마다 무슨 일이든 일단 손을 놀리는 것이 격노의 왕의 버릇이었다.

간다르바의 수장인 격노의 왕은 그야말로 손재주의 여왕이라 할 수 있었다. 멋들어진 수까지 놓인 겉옷을 받아든 키르티무카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렸다. 어느새 다시 옷이 잘 맞을지, 어울릴지에 대해 고민하고 또 기대하는 주인에게 살짝 윙크한 뒤 옷을 입어 보았다.

“잘 맞네요. 감사합니다.”

“다행이네.”

생긋 웃은 격노의 왕은 자신을 바라보는 키르티무카의 시선이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괜한 헛기침을 터트린 뒤 손에 쥐고 있던 도구들을 내려놓았다.

“흠흠. 아무튼 옷은 이쯤하고.”

표정을 가다듬는 김에 숨까지 가다듬었다. 격노의 왕이 옷을 만들고 수를 놓은 것은 단지 마몬 가와의 동맹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심란케 하는 일은 몇 가지 더 있었다.

격노의 왕의 시선이 가르디문디에게 향했다.

“식탐의 왕 쪽은 어때? 여전히 침묵 중이야?”

국경 지대에서 식탐의 왕의 모습이 사라진 지 벌써 열흘이 넘게 지났다. 세 왕의 국경 지대에 군대가 집결해 있는 긴장상태인 만큼 식탐의 왕의 갑작스런 실종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전략적 변수가 될 수 있었다.

가루라들과 가릉빈가들이 수집해 온 정보들을 뒤적이던 가르디문디는 미간을 좁혔다. 우려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요. 직접 시찰을 도는 일이 잦았던 식탐의 왕인데 요 며칠 동안은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고요.”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모습을 감춤으로써 전략적 이점을 취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키르티무카가 덧붙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격노의 왕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그녀가 왕의 자리에 오른 지도 벌써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내내 식탐의 왕과 신경전을 벌여온 그녀였다.

오랜 적은 친구만큼이나 서로를 잘 아는 법이었다. 격노의 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식탐의 왕답지 않아. 이건 식탐의 왕의 방식이 아냐.”

그는 분명 교활한 자였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미끼가 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전략적 사고라기보다는 개인적 취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수상쩍었다.

격노의 왕은 손가락을 놀려 마력을 집중시켰다. 허공에 빛으로 된 마계 전도를 순식간에 뚝딱 그려냈다.

격노의 왕의 시선이 식탐의 왕과의 국경지대로 향했다. 식탐의 왕의 가신들 가운데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세 가주들의 움직임 역시 다소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콕 집어서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 수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만은 분명했다.

“폭력의 왕 아저씨 쪽은?”

격노의 왕이 손을 놀리자 허공에 그려진 마계 전도가 절로 움직여 서남부를 중앙에 놓았다. 폭력의 왕 이야기만 나오면 긴장하는 키르티무카와 달리 가르디문디는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여전히 침묵 중입니다. 용 군단은 여전히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요. 역시 그의 성향대로 직접 공격이라기보다는, 단지 위협하기 위한 진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답답하네.”

폭력의 왕의 행동이 답답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위협을 통해 싸움을 피하는 것이라면 격노의 왕도 좋았다. 그녀가 폭력의 왕과 마음이 통한 것 역시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은 피하는 태도’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답답한 것은 작금의 정세였다.

폭력의 왕이 용 군단을 움직여 준 덕분에 식탐의 왕은 침묵하고 있었다. 오만과 질시는 서로 싸우느라 남쪽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덕분에 격노의 왕의 백성인 팔부중은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지만 진짜 피를 흘리는 싸움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쟁이 없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지금의 위태로운 평화가 더 큰 전쟁을 부르기 위한 징조라면 결코 좋지 않았다. 때로는 더 큰 화를 막기 위해 손을 써야만 할 때도 있었다.

마몬 가와의 동맹은 전략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졌다. 과연 마몬 가에 그만한 힘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함께 연계해 식탐의 왕을 압박할 수 있다면 꽤나 모양 좋은 그림이 나올 터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전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 어린 대화가 아니었다. 대화를 거부하는 자들조차도 막아서는 것은 강력한 힘이었다.

‘네가 나를 친다면 너도 결코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직설적이고 조악했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남부 동맹이 굳건해진다면 설사 오만의 왕이 질시의 왕을 거꾸러트린다 해도 쉽사리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터였다.

‘단지 가슴의 두근거림 때문만이 아니야.’

마몬 가는 생각지 못했던 변수였고, 충분히 의미 있는 변수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와의- 아니, 마몬 가와의 동맹은 충분한 전략적 가치를 가졌다.

격노의 왕은 스스로의 가슴을 가볍게 짓눌렀다. 살며시 눈을 감고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진정하세요, 이제 곧이니까.”

“아니거든? 내가 언제 안절부절 못했다고 그래?”

열흘 전과 똑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가르디문디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턱까지 괴고 두 사람이 하는 모양새를 구경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지난 이십 일 사이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식탐의 왕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북부에서 펼쳐지고 있는 오만과 질시의 전쟁은 여전히 천천히 진행되었다.

격노의 왕의 던전이자, ‘이동 요새’라 불리는 던전 비마나는 온갖 별종들이 판치는 마계 내에서도 독보적으로 특별한- 아니, 특이한 던전이었다.

비마나는 살아있는 거대하고 거대한 거북 사역마의 등 위에 건축되어 있었다. 아니, 애당초 비마나는 거북의 이름이었다.

초대형 사역마의 등 위에 자연히 만들어진 던전.

격노의 왕은 그 던전을 다소 손본 뒤 자신의 왕궁으로 삼았다.

비마나만큼이나 특이한 던전은 북부의 이름 모를 가주의 던전이라 여겨지는 ‘하늘요새’ 정도밖에 없었다. 그쪽은 거대하고 거대한 하늘 고래 위에 자연히 형성된 던전이었다.

어찌되었든 격노의 왕의 던전은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격노의 왕은 비마나 자체를 움직이는 대신 수하들을 이끌고 북부 공백지에 섰다. 비마나를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 눈에 띄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몬 가의 가주와 약속한 동맹의 날이 도래했다.

일단은 비밀 동맹이었기 때문에 격노의 왕은 딱 적절한 숫자의 수하들만을 대동했다.

팔부중 각각에서 다섯 명씩. 거기에 측근인 키르티무카와 가르디문디.

아무리 비밀 동맹이라 하나 동맹은 성스러운 의식이었기에 최소한의 격식을 갖추어야만 했다. 팔부중에서 각각 다섯 명씩 도합 마흔 명에 달하는 인원을 데려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호위의 의미도 있지만.’

가르디문디는 인적 없는 황무지를 새삼 둘러보았다. 주변이 탁 트여 있음에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한들 소문조차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그녀가 본 마몬 가는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마흔 명의 팔부중들은 제각각 진을 짠 뒤 깃발을 세웠다. 신비한 여덟 깃발의 힘이 하나로 모이자 주변 일대를 뒤덮는 차단 결계가 펼쳐졌다. 이제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결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을 터였다.

“아무튼 진정하세요. 심호흡 하시고요.”

“그런 적 없다니까 그러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격노의 왕은 순순히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몇 번인가 크게 오르락내리락 했고, 격노의 왕은 마음이 제법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마몬 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약속 시간이 멀지 않았는데 말이야. 슬슬 보여야 하지 않나?”

키르티무카가 가르디문디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사방이 탁 트인 황무지인 만큼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든지 슬슬 보여야 했건만 마몬 가의 병력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마몬 가의 가주를 격노의 왕의 반려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키르티무카였지만 그가 약속 시간조차 지키지 못하는 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냥 약속도 아니고 격노의 왕과의 동맹을 위한 정상회담이 아니던가.

‘설마 늦는건가?’

키르티무카의 말을 받아치는 대신 미간을 찌푸린 가르디문디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속 시간을 지키려면 이제 슬슬 어느 방향에서건 모습이 보여야만 했다.

키르티무카는 더욱 인상을 썼고, 격노의 왕의 얼굴에도 약간이지만 시름이 어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르디문디가 멍한 목소리를 토했다.

“설마?”

가르디문디는 바로 고개를 쳐들었고, 가르디문디를 쳐다보고 있던 격노의 왕과 키르티무카 역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가르디문디가 세 사람의 심정을 대표하듯 당혹 섞인 목소리를 토했다.

“마몬…가?”

구름이 부서졌다. 먼 하늘로부터 붉은 용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비공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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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거룡 티아메트.

마몬 가의 가주 전용 비공정은 그 압도적인 기세로 격노의 왕과 수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용호가 준비한 퍼포먼스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격노의 왕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착지한 적색거룡 티아메트의 해치가 열렸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컬과 스컬 부대에서도 가려 뽑은 일백의 정병들이었다.

스컬을 필두로 전진한 스컬 부대는 동기화의 성능을 자랑하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멋들어진 행군 뒤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가운데 길을 열었다.

언데드 군단인만큼 일단 정지한 뒤에는 미동도 없었다. 똑같이 통일한 검은 갑주가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그렇게 열린 길 사이를 용호가 걸었다. 등 뒤에는 각기 한껏 멋을 부린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뒤따랐다.

오필리아와 엘리고스, 티그리우스는 티아메트 내부에 남았다. 그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조커였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보무도 당당히 등장한 용호의 모습에 키르티무카는 제법 만족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디문디는 적색거룡 티아메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비공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격노의 왕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의 가슴을 짓눌렀다.

‘지, 진짜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도 세차게,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용호가 격노의 왕에게 다가섰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슴의 두근거림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격노의 왕을 뵙습니다. 마몬 가의 가주인 천용호입니다.”

용호가 격노의 왕에게 먼저 예를 표했다. 카이완과 오필리아의 감독 하에 밤새도록 연습한 보람이 있는지 제법을 넘어 누가 봐도 그럴싸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격노의 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용호를 바라만 보았다.

그렇기를 1초, 2초, 그리도 3초를 넘어 5초.

정지한 것 같은 시간에 용호를 비롯한 모두가 의문을 가지려 할 때였다. 키르티무카가 급히 정신감응으로 격노의 왕에게 소리쳤다.

‘전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격노의 왕은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 물론 실제로는 몇 걸음 이상 거리가 있었다. - 다가온 용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숨을 멈췄고, 여전히 멈출 줄 모르고 요동치는 심장에 당황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헛기침을 터트린 뒤 겨우 입술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소. 팔부중의 수장인 드리타라슈트라요.”

망했다. 얼굴이며 목소리고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키르티무카가 낭패감을 느끼는 그때 카타리나는 눈동자를 굴려 카이완을 보았고, 카이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정작 용호는 격노의 왕의 대답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순히 공명 때문만이 아니었다. 경매장에서 마주했을 때 이상으로 강한 충동을 느꼈다.

어째서인가. 무엇 때문인가.

절로 일어나 격노의 왕을 비롯한 주변을 휘감으려는 탐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기이할 정도의 두근거림 속에서 용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경매장에서의 격노의 왕과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 사이의 차이점. 달라진 것.

용호의 시선이 격노의 왕의 하반신을 향했다. 격노의 왕의 가늘고 맵시 있는 허리를 감싸고 있는 금속 허리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용호는 가까스로 스스로를 억눌렀다. 입 밖으로 외치는 대신 소리 없는 탄성을 토했다.

‘식탐의 신기!’

용호 안에서 식탐이 울부짖었다. 자신의 반쪽을 향해 지독한 갈망을 드러냈다.

&

< 제 60장 #6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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