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80화 (180/227)
  • < 제 60장 #5 >

    표지는 모두 검정이었다. 황금색 글자들로 이루어진 제목들은 기존의 것들과는 다소 달랐다.

    [탑승물]

    [불사자]

    [이계종]

    [요정족]

    [마족]

    검정색 카탈로그들에는 별의 숫자가 없었다. 그저 사역마들의 분류가 표기되어 있을 뿐이었다.

    시트리는 손가락을 놀려 그 중 하나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새로 떠오른 카탈로그들 가운데서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탐욕의 왕]

    제목을 향했던 용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트리에게로 돌아갔다. 시트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카탈로그를 펼쳤다. 용호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건 사랑하는 고객님 전용이랍니다. 사랑하는 고객님과의 거래 내용을 기입할 비밀 장부죠.”

    탐욕의 왕이라 이름 붙여진 카탈로그 안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용호는 반사적으로 시트리에게 물었다.

    “다른 왕들 역시 비밀 장부를 가지고 있나요?”

    “네, 그렇답니다. 역시 우리 사랑하는 고객님은 눈치가 빠르시네요.”

    왕과 이사 간의 비밀 거래.

    탐욕의 왕이라 이름 붙여진 카탈로그.

    자연스럽게 유추가 되었다. 시트리는 계속 설명했다.

    “던전 상회를 이용하시는 다른 고객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죄악과 신기를 가진 왕들은 마계의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특별하답니다. 그들이야말로 마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거물들이니까요.”

    지금도 그러했다. 식탐의 왕은 엠브리오를 지원함으로써 남부 공백지 전체를 불태웠다고 해도 좋을 큰 혼란을 일으켰고, 오만의 왕은 직접 일어남으로써 북부 전체를 뒤흔들었다. 폭력의 왕은 단지 군사를 전면 배치하는 것만으로 식탐의 왕의 영토를 혼란과 공포에 빠트렸다.

    왕들의 결정 하나하나에 수많은 이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시트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던전 상회도 기본은 상인 집단. 때문에 특별한 고객들에게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한답니다. 그게 바로 이 비밀 거래죠.”

    시트리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스치듯이 엷은 미소를 머금은 뒤 말을 이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옆집 사는 마왕이 갑자기 던전 공략용 사역마들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럼 이웃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요? 그리고 어떻게 행동 할까요?”

    “공격에 대비하거나, 다른 이웃과 연합을 결성하겠죠.”

    어떤 물건을 사는 것은 그 물건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사들인 물건을 통해 구매자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 역시 가능했다.

    용호의 대답에 시트리는 만족했다.

    “맞아요. 구매 내역 자체가 정보가 되기 때문이죠.”

    용호는 문득 어디선가 보았던 ‘펜타곤과 피자상자’ 이야기를 떠올렸다.

    펜타곤은 미국 국방부가 위치해 있는 거대한 오각형 건물이었다. 진짜인지 그저 야사인지 모르겠지만, 펜타곤과 관련된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가 있었다.

    ‘펜타곤에 피자 배달이 급증하는 날에는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반미 성향의 국가나 집단에 소속된 스파이들은 펜타곤 주변의 피자집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결정한 날, 비상근무로 인해 펜타곤의 피자 배달이 기록적으로 증가했다는 소문으로부터 파생된 이야기였다.

    시트리가 들었던 예와는 조금 엇나간 이야기였지만, 구매내역을 통해 무언가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에서는 통하는 바가 있었다.

    시트리가 다시 설명을 재개했다.

    “마계의 거의 모든 가주들이 던전 상회를 이용하고 있어요. 제 입으로 하기 좀 민망한 말이지만, 던전 상회는 어떤 의미로는 이 마계를 지배하는 조직이라고도 할 수 있죠.”

    만약 던전 상회가 식량 가격을 대폭 올려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 외 던전 운영에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판매 중단하거나 특정 대상에게만 판매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시트리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던전 상회가 마계에 가지는 영향력은 그만큼 거대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던전 상회에는 이렇다 할 라이벌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계의 가주들에게 다른 상회를 이용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중요했다.

    “오직 하나뿐인 상회. 모두가 이용하는 상회. 그렇기에 작정하고 달려들면 구매 내역을 알아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답니다. 특히 던전 상회에서도 쉬이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상품이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그래서 비밀 거래를?”

    스위스의 비밀 계좌가 번뜩 떠올랐다. 은행에서 이자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계좌 이용료를 지불해야만 하는 특이한 계좌. 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값비싼 이용료를 지불해가면서까지 스위스 비밀 계좌를 이용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스위스 은행이 비밀 계좌의 계좌주를 결코 밝히지 않으니까. 철저하게 보호해주니까.

    비슷한 개념이었다.

    어떤 사역마가 누구에게 팔렸는지 비밀에 붙인다. 아니, 아예 그 판매된 사역마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혹적인 목소리를 이었다.

    “왕과 이사 간의 비밀 거래는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친답니다. 결코 다른 고객들에게 구매 내역이 공개되지 않아요. 더욱이 평범한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는 것들도 구매할 수 있죠. 왕들에게는 그럴만한 재력이 뒷받침 되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어째서 지금까지는 용호에게 비밀 거래를 제의하지 않았는지를 에둘러 설명하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용호는 이제 자격을 얻었다. 죄악은 물론이고 신기와 재력까지 갖추었다.

    시트리는 용호에게 상체를 숙였다.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약간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특별 경매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고 알려진 상품들이라거나, 아예 일반적인 카탈로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상품들이 비밀 거래의 주거래 대상이랍니다.”

    “식탐의 왕의 언데드 정예 병력.”

    불현듯 떠올라 입 밖에 내었다. 엠브리오가 동원했던 본 드래곤을 놓고 오필리아와 나누었던 대화들 역시 떠올랐다.

    시트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용호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리며 다른 말을 했다.

    “최강의 괴력 오로바스. 북부를 담당하는 이사인 그는 오만의 왕을 상대합니다. 최고의 지력 비프론즈. 그는 질시의 왕과 색욕의 왕을 담당하죠.”

    각각의 왕들에게는 저마다 그를 전담하는 이사들이 있었다.

    “최속의 날개 사마엘은 식탐의 왕을, 최강의 마력 아브라삭스는 격노의 왕과 폭력의 왕을. 그리고 제 담당은 은둔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나태의 왕과 ‘존재하지 않는 탐욕의 왕’이죠.”

    마지막에 가서는 살짝 윙크했다.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것 같은 몸짓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시트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말을 꺼냈다.

    “시트리는 뭐죠?”

    “네?”

    “아, 이명이요. 다른 다섯 이사들은 다들 이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최속의 날개라든가, 최강의 마력이라든가.”

    저도 모르게 내뱉었던 물음이었던 터라 용호는 다소 당황한 상태로 말을 정돈했다. 시트리는 눈을 한 번 동그랗게 뜨더니 푸근하게 웃었다.

    “글쎄요, 최고의 미모?”

    용호는 눈을 깜박였다. 순간 장난치나 싶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시트리라면 저런 이명을 사용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트리가 당황했다.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래도 믿어주시니 기분은 좋네요. 사랑하는 고객님께 죄송하지만 제 이명은 비밀이랍니다.”

    시트리는 그대로 용호의 손을 잡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용호를 잡아당겼다.

    “일어나 보세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비밀 거래를 시작할 테니까.”

    용호가 얼결에 따라 일어서자마자 두 사람의 등 뒤에 놓여 있던 의자들이 사라졌다. 여전히 주변 모두가 새카만 가운데 시트리가 부드럽게 발을 놀려 용호의 등 뒤에 자리했다. 그대로 용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잠시만 눈을 감아 보세요.”

    용호는 묘한 기대감 속에 시트리의 말을 따랐다. 눈을 감으니 시트리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향기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좋아요, 이제 눈을 다시 떠보시겠어요?”

    시트리가 포옹을 풀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용호는 묘한 아쉬움 속에 눈을 떴고,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마몬의 보물고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어둠 대신 다시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거대한 것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비공정과 대형 비행형 사역마들.

    한 둘이 아니었다. 모두 합치면 수십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사랑하는 고객님게는 이미 살라미라는 귀여운 자가용이 있으시죠. 그런데도 따로 비공정을 구하시는 건 역시 병력을 운송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해서겠죠?”

    구매내역은 구매자의 의도를 드러냈다.

    상대가 시트리였기에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트리는 용호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았다. 그대로 힘을 주어 용호와 함께 나아갔다.

    선체 길이만 100미터에 육박할 것 같은 거대한 범선 모양의 비공정.

    등 위에는 물론이고 속에도 수납공간이 존재하는 하늘 고래.

    특별한 개조를 통해 수납공간을 부착시킨 용과 닮은 거대한 사역마.

    영화에서나 볼법한 미래적인 디자인을 갖춘 비공정.

    각종 무기들이 부착된 전함.

    어느 것 하나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없었다. 용호는 각각의 비공정 내부도 살펴보고 싶어 몸이 달았지만 시트리는 여전히 용호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앞으로만 나아갈 것을 종용했다.

    “아무리 남부 공백지를 일통하셨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너무 어마어마한 비공정을 구매하시면 주변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거예요. 필요 없는 이목을 끌 수도 있죠.”

    아무리 비밀거래로 구매한다 해도 그 물품을 공개하는 순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때문에 보물고의 재력을 어느 정도 감추고자 한다면 딱 적절한 물건을 구매해야만 했다.

    “스컬 부대를 태워야 하니 적어도 200명 정도는 탑승이 가능한 물건이어야 하겠죠. 다행히 스컬 부대는 언데드이니… 그리 큰 공간을 차지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조금 더 작은 물건을 구매하셔도 괜찮겠죠.”

    공백지의 재력으로도 구매할 수 있고, 덩치도 그리 크지 않은 비공정.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옆에 늘어서 있는 비공정들이 작고 초라해져 갔다. 자연스럽게 일어난 탐욕이 가까이 있는 것들보다는 먼 곳에 있는 것들을 원했지만 용호는 어쩔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시트리가 용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탐욕의 왕이시니까요. 그 이름에 어울리는 물건을 타고 다니셔야겠죠. 더욱이 공백지를 일통하셨으니까요. 어느 정도는 힘을 과시하실 필요도 있고요.”

    마침내 시트리의 발걸음이 멎었다. 이제 좌우에는 어떤 사역마나 비공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용호는 시트리를 돌아보았고, 시트리는 아련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추억을 더듬듯 용호 대신 허공을 바라보았고, 이내 용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가볍게 손가락을 놀려 새하얀 공간 사이에 감춰진 물건을 공개했다.

    그것은 붉고 거대했다.

    유선형으로 길었고, 선두에는 붉은 용의 머리가 붙어 있었다. 동체의 양 옆으로는 거대한 추진체가 붙어 있었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우주전함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하염없이 뒤쪽만을 돌아보던 탐욕이 일제히 정면으로 쏟아져 나가 붉은 비공정을 휘감았다.

    가느다란 탐욕의 연기에 휩싸인 시트리가 용호를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대로 홀로 나아가 붉은 비공정 앞에 섰다.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여덟 손의 바루나의 유작. 그가 설계만을 남긴, 끝내 완성하지 못한 탐욕의 왕의 전용기.”

    마몬이 그의 시대에 직접 타고 다니던 물건은 안 되었다.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이 마몬을 기억했다. 그의 유산을 용호가 꺼낸 순간 마몬 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공정은 괜찮았다. 마몬의 것이나 마몬이 타지 않은 것. 탈 수 없었던 것.

    시트리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용호에게 등만을 보인 채 표정을 가다듬었고, 마침내 돌아서서 미소 지었다.

    “왕의 배, 적색거룡 티아메트.”

    용호가 마른 침을 삼켰다. 시트리는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오직 고객님만을 위한 상품이니까요. 싸게 해드릴게요.”

    용호는 호쾌하게 웃었다. 시트리의 안내에 따라 적색거룡을 향해 다가섰다.

    &

    “진정하세요. 이제 곧이니까.”

    < 제 60장 #5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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