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78화 (178/227)
  • < 제 60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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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왜 7층은 건너뛰고 8층이지?”

    용호가 의문을 표한 것은 보물고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오갔을 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 사이에 용호는 격노의 왕에게 전할 답장을 썼을 뿐만 아니라 가르디문디를 몸소 배웅하기까지 했다.

    사실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냥 보물고가 8층에 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현재 용호가 6층까지 확보한 상태라는 것과 탐욕의 미궁의 층 구성 내용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용호가 의문을 표한 것은 아몬이 7층에 대해 조금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층까지 확보하는 와중에 늘 바로 다음 층 까지만 언급하던 아몬이지 않은가.

    아몬은 곧 알게 될 거라며 대답을 미뤘고, 과연 그 말대로였다. 예속 사역마들과 7층에 도달한 용호는 오래지 않아 아몬이 7층을 설명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가.’

    용호는 쓰게 웃으며 7층에서 8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위치한 커다란 문을 바라보았다. 웅장함 그 자체인 강철 문에는 우뚝 솟은 뿔인 인상적인 황소의 머리가 양각되어 있었고, 바로 옆 벽에는 ‘마몬의 투기장’이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뭐냐, 그 미묘하게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은.”

    “아니, 딱히 실망한 건 아니고.”

    어째 뚱한 표정을 짓는 구시온 앞에서 어깨를 으쓱인 용호는 새삼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용호는 지금 투기장 입구 부근에 서 있었다. 짐승 가면 사내의 안내를 받아 오가던 통로가 아닌 ‘진짜 입구’였다.

    문이 커다란 만큼이나 복도 내부도 컸다. 일단 천장이 높았고, 복도 좌우 폭은 근 십 미터에 달했다.

    복도 좌우에는 진짜로 착각할 만큼 정밀하게 묘사된 석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낯이 익은 것들이 꽤 되었다.

    거대한 강철소와 어쩐지 모르게 불쌍하게 생긴 켄타우로스에서 혹시나 하던 용호는 중간쯤에 자리한 표독스런 눈매의 미녀 석상을 보고 확신했다. 투기장의 플로어 마스터들을 묘사한 석상들이었다.

    용호는 구시온과 복도 끝에 자리한 구시온의 석상을 번갈아 보았다. 저도 모르게 키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문을 통해 들어온 투기장은 이런 느낌인 건가?”

    투기장의 플로어 마스터들은 인간형에 국한되지 않았다. 여러 괴수와 거인들까지 포함한 수십 개의 석상들이 죽 늘어서있는 복도는 무척이나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기가 약한 자라면 투기장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위축될 것 같았다.

    용호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석상을 살펴보던 구시온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래, 작은 나리가 이제까지 들어왔던 통로는 굳이 따지면 개구멍이지.”

    표현을 해도 하필이면 개구멍이었다. 용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구시온의 등 뒤를 보았다. 눈에 익은 투기장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도 알맹이는 똑같네.”

    “그럼 알맹이까지 다르겠냐.”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용호와 구시온은 그대로 투기장 안쪽으로 이동했다. 투기장에 방문한 무리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투기장에 도전해야 한다는 규칙은 정문을 통해 들어온 자에게도 적용되었다.

    투기장 도전이 이미 일상 가운데 하나가 된 용호는 이렇다 할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예속 사역마 일동 역시 이미 몇 차례나 투기장을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인지 다들 표정이 여유로웠다.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살라미와 부케팔로스뿐이었다.

    구시온의 특별 관람석에 자리를 잡은 용호가 물었다.

    “주변에 던전 몬스터가 거의 없던데, 혹시 7층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든가?”

    다른 층들을 꽉꽉 채우고 있던 던전 몬스터들이 7층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약간의 기대 섞인 용호의 물음에 구시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투기장의 사역마는 투기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던전 몬스터가 없는 건 아마 투기장을 구성하고 있는 강력한 시공결계 때문일 거다. 너무 큰 뒤틀림이 있어서 작은 뒤틀림들은 자연히 소멸한다고 해야 할까? 던전 몬스터들은 던전에 생겨난 뒤틀림을 통해 유입되는 것들이니 뒤틀림 자체가 생성되지 않으면 나타날 방도가 없겠지.”

    “큰 파도에 작은 파도들이 흡수된다는 건가?”

    “대충 비슷하다.”

    구시온의 답변 이후 대화가 잠시 끊겼다. 몇 초 안 되는 그 시간 동안에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뚱한 표정을 유지하던 구시온은 특별석의 손잡이를 손가락 끝으로 몇 번 두드렸다.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보다 좀 너무한 거 아냐?”

    “뭐가?”

    용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 구시온을 돌아보았고, 용호 곁에 앉아있던 카타리나 역시 귀를 쫑긋하며 눈을 껌벅였다. 반면 카이완은 뭔가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구시온이 말했다.

    “아니, 내가 39층에 있다는 걸 알려줬으면 도전 의식을 가지고 팍팍 치고 올라와야지. 지난번에 왔을 때는 바로 돌아가지를 않나. 시간의 흐름이 미묘한 이곳이지만 작은 나리가 서두르지 않고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다고.”

    “혹시 그래서 서운하다든가?”

    용호가 장난스럽게 묻자 구시온은 괜히 딴청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본래 붉은 피부인 터라 티가 잘 나지 않았지만 엘리고스와 오필리아 덕분에 레드 데몬에 대해 잘 아는 용호였다. 구시온이 민망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사실 용호도 투기장을 손에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투기장에만 매진하지 않는 것에도 나름 타당한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 투기장은 여전히 용호에게 유용했다.

    투기장의 각 층을 돌파할 때마다 얻게 되는 마몬의 마력이나 클리어 보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투기장은 용호에게 ‘사투’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진화 숙련치를 쌓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투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용호가 빠르게 진화의 권능을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투기장 덕분이었다.

    더욱이 투기장은 용호에게 다양한 전투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괴수, 거인, 인간형의 강자 등등이 뒤섞인 투기장은 그야말로 경험의 보고였다. 용호는 그들과 싸우며 다양한 전투 패턴을 익힐 수 있었고, 역으로 여러 가지 전법이나 기술들 역시 시험해볼 수 있었다.

    무식하게 마력만으로 플로어 마스터들을 찍어 눌러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25층에서 유크라시온을 마력으로 압살한 것은 새로 얻은 마력의 최대치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예속 사역마들의 성장이었다.

    투기장이 경험의 보고인 것은 예속 사역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호가 큰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속 사역마들의 투기장 도전을 허락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수 흡수의 효율이 그리 좋지 못한 예속 사역마들에게 있어 진화의 권능의 가치는 용호 이상이었다. 투기장을 손에 넣는 것도 중요했지만, 예속 사역마들의 성장은 그 이상으로 중요했다. 예속 사역마들을 위해서라도 작금의 투기장을 좀 더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투기장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접수할 수 있을만큼 호락호락하지도 않지만.’

    25층의 플로어 마스터인 유크라시온을 일격에 격파해놓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용호는 진심이었다.

    층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투기장의 보정이 강해졌다. 단순히 플로어 마스터들을 강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역으로 용호의 힘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10층 단위로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투기장의 특성상 30층 이후부터는 마력만으로 압살할 수 있는 경우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전투란 것은 마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용호의 행보가 이를 증명했다. 포라스부터 시작해 식탐의 왕에 이르기까지 용호가 상대해온 적들은 늘 용호보다 마력이 더 강했다. 하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용호였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시간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밖과 다른 투기장 안에서는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빠르게 흐를 때도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 정세에 촉각을 곤두 세워야 하는 용호 입장에서는 시간을 알 수 없는 투기장에서 머무는 것 자체가 상당한 리스크로 작용했다.

    당장에 지금도 격노의 왕과의 정상회담이라는 시간제한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투기장에서만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용호가 나름의 이유를 간추려 말해주자 구시온은 더더욱 민망해했고, 카이완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까지 깨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지.’

    투기장의 전력은 강대했다. 식탐의 왕이라는 목전의 위협이 사라졌지만 아직 북부에 오만과 질시, 색욕의 왕이 남아 있었다. 폭력의 왕은 그 속을 알 수 없었고, 격노의 왕도 완전한 우군인 것은 아니었다.

    격노의 왕과 무사히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그때부터 한동안은 투기장에 좀 더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8층에 위치한 보물고를 손에 넣겠다고?”

    민망함을 감추듯 몇 번이고 헛기침을 터트린 구시온이 화제를 전환했다. 용호는 순순히 받아주었다.

    “일단은 그럴 생각이야. 자금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테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소유욕의 화신이라 할 수 있을 ‘탐욕의 왕’의 보물고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재보가 산처럼 쌓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구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의 작은 나리라면 문을 열수도 있겠군.”

    “문을 열다니?”

    “8층- 정확히 말해 나리의 보물고를 지키고 있는 것은 리처드 녀석이다. 아몬에게 그 녀석에 대해 들었나?”

    [아직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구시온 네가 대신해주었으면 좋겠군.]

    어느새 피어오른 홍련의 불길로부터 아몬의 대답이 돌아왔다. 구시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용호에게 말했다.

    “사자좌, 침묵의 전사 리처드.”

    12 사역마들은 마계의 전설이었다. 카타리나와 카이완뿐만 아니라 티그리우스까지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시온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놈은 강하다. 우리 12 사역마 가운데서도 상위권에 속할 거다. 단순히 육체적인 강함만을 논한다면 나와 호각이다.”

    자화자찬 같은 것이 아니었다. 구시온의 이명이 '괴력'인 것은 그가 12 사역마 가운데서 가장 강한 육체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사역마 가운데서 최강을 논할 때 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바로 구시온이었다.

    “녀석은 이명 그대로 과묵하다. 말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닌데, 함께 온갖 고난을 돌파한 나도 목소리를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 아무튼 과묵하고 무뚝뚝한 녀석이지. 그리고 이런 녀석들이 거의 그러하듯이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 처절할 정도로 성실하다.”

    마지막에 가서는 작은 미소를 보였다. 리처드와 관련된 여러 추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구시온은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아련히 떠오른 추억들을 밀어내고 현재를 보았다.

    “리처드는 보물고의 수문장이다. 때문에 녀석은 자격이 있는 자가 보물고를 오가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아. 녀석이 무기를 드는 것은 오직 부당한 침입자를 마주했을 때뿐이다.”

    짧은 말이었지만 용호는 리처드가 어떤 자인지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구시온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녀석인 만큼 따로 시련이나 시험 같은 것을 준비했을 가능성은 낮다. 나리가 살아계실 때도 딱히 그런 것을 만들지는 않았고. 그러니 지금도 보물고의 문을 열수 있느냐 여부가 자격의 유무를 판가름 할 거다.”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시험이란 건가?”

    “그런 셈이지. 지금의 작은 나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 거다. 단순히 마력만 강하다고 열 수 있는 문이 아니니까.”

    거기서 일단 말을 끊은 구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용호를 재촉했다.

    “나머지는 내려가면서 아몬 녀석에게 듣든가 하고, 투기장의 규칙은 잘 알고 있겠지? 일행 중 적어도 한 명은 투기장에 도전해야 한다. 갈 길이 바쁘다면 서두르라고.”

    구시온의 채근에 용호는 예속 사역마들을 이끌고 계단 아래에 위치한 투기장으로 향했다. 구시온의 말마따나 허비할 시간이 없는 만큼 아직 저층에 머물고 있는 예속 사역마 가운데 하나가 플로어 마스터에게 도전할 요량이었다.

    그렇게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이 멀어지고 나자 특별 관람석에는 구시온과 아몬의 의식만이 남았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아몬이었다.

    [의외로 재촉하지 않는군.]

    용호는 식탐의 왕을 쓰러트렸다. 지난 천년 이래 마몬 가의 그 누구보다도 탐욕의 왕에 가까이 다가선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시온은 용호를 재촉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투기장을 정복하라며 투정 섞인 채근을 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마몬이 걱정했던 것. 그가 자신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는 전하지 못하게 한 이유.

    구시온은 씁쓸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시간의 흐름이 미묘한 투기장 안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긴 세월이 흘렀으니까. 그 날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복수심에 젖어 있을 수도 없겠지.”

    아몬은 조용히 불길을 일으켰다. 나직이 속삭였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시간이...]

    “그래, 아마 마몬 나리도 새로운 탐욕의 왕이 나타나는 데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을 거다.”

    자그마치 천 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아몬의 말처럼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스클레피오스 녀석은 미쳐 버렸다고 했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몬이 질문으로 대답했다.

    [리처드가 걱정되나?]

    구시온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와 아몬 모두에게 말했다.

    “녀석이라면 괜찮을 거다. 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을 돌 같은 녀석이니까. 너나 스카자하처럼 잠들지 않았더라도… 설사 그 시간 내내 깨어있었더라도 녀석이라면 괜찮을 거다.”

    미쳐버린 것은 아스클레피오스로 충분했다. 더 이상의 비극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시작하는군. 이번에는 카이완인가?”

    구시온이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몬은 친우의 뜻을 존중했다. 마몬의 12 사역마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대신 카이완의 경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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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의 미궁 8층의 문을 개방합니다.]

    < 제 60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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