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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76화 (176/227)
  • < 제 60장 - 동맹 >

    제 60장 - 동맹

    마왕의 죽음은 곧 던전의 영혼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던전 밖에 나간 마왕이 비명횡사라도 한다면 그 사실은 거의 실시간으로 던전 내부에 남아있던 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식탐의 왕이 죽었다.

    식탐의 왕의 집사장인 오를란도가 그 사실을 안 것은 식탐의 왕이 죽은 지 겨우 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레드 데몬과 반대로 육체 능력이 약한 대신 마법에 능한 블루 데몬들은 위기상황에서도 놀라운 침착함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오를란도는 블루 데몬다운 냉철함과 침착함으로 주인의 죽음에 대응했다.

    오를란도는 일단 던전을 봉쇄했다. 던전의 영혼이 죽으면 던전의 기능 대부분이 마비되기 마련이었다. 빠르든 늦든 던전 내의 사역마들은 이상함을 느낄 터였고, 개중에는 가주의 죽음을 의심하는 자도 있을 터였다.

    섣불리 내부의 일이 새어나가는 것보다는 밖에서 던전 봉쇄에 대한 이런저런 헛소문이 도는 편이 나았다.

    던전을 봉쇄한 오를란도는 고민했다. 식탐의 왕은 자신이 죽었을 경우에 대한 가이드 라인 같은 것은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하다못해 미리 정해진 후계자 같은 것도 없었다.

    식탐의 왕은 죽음을 대비하지 않았다. 아직 죽음 같은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젊은이여서가 아니었다. 왕의 죽음 따위는 고려할 대상이 못 되어서도 아니었다.

    식탐의 왕은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 왕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비단 가주라면 젊고 늙고를 떠나서 자신의 죽음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럼에도 식탐의 왕이 죽음 이후를 대비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 이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죽은 뒤인데 신경 써서 무얼 한단 말인가. 자신 외의 모든 것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문자 그대로 ‘먹어치우며’ 성장한 식탐의 왕에게 후사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이 중요한 자에게 죽음 이후 남겨진 자들을 위한 대비는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식탐의 왕의 입장일 뿐이었다.

    남겨진 자가 된 오를란도는 고민했다. 식탐의 왕의 왕국에 속한 자의 숫자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들의 목숨과 삶에 무게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식탐의 왕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오를란도를 고민케 한 것은 왕의 부재만이 아니었다.

    식탐의 왕의 심복인 십인중의 부재 역시 오를란도를 괴롭혔다.

    왕은 죽었고, 왕의 심복 역시 죽었으며, 2인자부터 시작해 11인자라고 해도 좋을 자까지 모조리 다 죽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십인중 대부분이 ‘예속 사역마’이기 때문에 ‘가주’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들 하나하나가 가주였다면 아무리 오를란도라 할지라도 그들 모두의 죽음을 감출 수는 없었을 터였다.

    ‘어차피 시간문제일 것 같다만.’

    식탐의 왕은 미색을 밝히는 자였던 만큼 수많은 미희들을 거느렸다. 덕분에 ‘식탐의 왕의 피를 이은 자식’ 자체는 제법 숫자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적당한 자를 하나 골라 후사로 세워야 할 터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왕이 사라진 국가를 다른 왕들이 과연 지켜만 볼까? 그것도 지금과 같은 긴장 국면에?

    오를란도는 결국 스스로 판단하기를 그만두었다. 십인중 모두가 예속 사역마였기에 발생한 뜻하지 않은 이로움에 기대기로 하였다.

    오를란도는 세 장의 편지를 썼다. 북부와 서부에서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 식탐의 왕 휘하에서 강대한 군단을 이끄는 세 가주를 수신인으로 한 편지였다.

    예속 사역마는 가주가 될 수 없기에 왕의 측근은 될지언정 중요지점의 던전을 지키는 지방의 실력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왕은 물론이고 십인중까지 몰살당한 현재였지만 다행히 식탐의 왕의 국가에는 국경을 지키는 세 명의 실력자들이 남아 있었다.

    오를란도는 그 셋에게 이 문제를 넘기기로 하였다. 서둘러 작성한 서신을 각지로 날려 보냈다.

    &

    ‘이상하네.’

    ‘최속의 날개’ 사마엘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미리 준비한 차는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약속 시간이 지난 지 이미 한 시간이 넘었건만 식탐의 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식탐의 왕은 단 한 번도 약속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치 철두철미한 자였다.

    ‘자기 쪽에서 청한 비밀 거래 장소에 나오지 않고, 이렇다 할 추가 연락도 없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지만 결과가 소박이라는 사실에 화가 나긴 했지만 사마엘은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였다. 마냥 분노하기에 앞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식탐의 왕은 결코 약속을 어길 자가 아니다. 설사 약속을 어기더라도 이런 식으로 어길 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인가.

    식탐의 왕에게 약속 장소에 나오지 못할 어떤 사정이라도 생긴 것일까?

    사마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망상으로 치부하는 대신 행동했다. 인큐버스들을 불러들였다.

    &

    “짜잔, 내가 돌아왔다.”

    공간의 문을 통과한 용호가 양손을 벌리며 말했고, 카타리나는 부끄러운 듯 꼬리를 움츠렸지만 용호와 비슷한 포즈를 취했다. 카이완은 한 발짝 물러선 곳에서 쯧쯧 혀를 찼다.

    사역마들의 반응도 천차만별이었다. 부케팔로스와 한 구석에 자리한 살라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가로저었고, 부케팔로스는 자신의 라이벌을 위로하듯 말발굽으로 살라미의 등을 두드렸다. - 그리고 살라미는 어디다 발을 올리냐는 듯 부케팔로스에게 으르렁거렸다. -

    오필리아는 어째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이냐는 듯 어색하게 웃었고, 티그리우스는 점잖게 외면했다.

    하지만 애당초 용호가 노렸던 대상인 유리아는 소위 말하는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리고 그건 유리아의 머리 위에 있는 새끼 던전 미어 캣과 등 뒤에 자리한 바둑이도 마찬가지였다.

    “다녀오셨습니까.”

    엘리고스가 집사장답게 사역마 일동을 대표해서 예를 표했다. 공간의 방에는 예속 사역마들과 마몬 가의 주요 사역마들이 용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응, 잘 다녀왔어. 선물도 잔뜩 사왔고.”

    [제 선물도 사오셨죠?]

    [올 때 메로나?]

    [두근두근 콩닥콩닥.]

    중간에 이상한 게 끼어 있는 것 같았지만 용호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지난 번처럼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짐 꾸러미와는 별도로 작은 주머니 하나를 들어올렸다. 투기장에서 보상으로 얻은 마법 주머니였다. 생긴 것만 보면 주먹 하나 겨우 들어갈 작은 주머니였지만 마법으로 내부를 넓혀놓은 주머니인 터라 거의 자동차 한 대 분의 물건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냥 보이는 짐만 해도 이미 산더미였는데 용호가 마법 주머니까지 들어 올리자 오필리아가 약간은 걱정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눈치 빠른 카이완이 그런 오필리아에게 작게 속삭였다.

    “예산은 걱정 마. 인계에서는 보석의 가치가 마계 이상이던걸? 가져갔던 보석들 가운데 하나로 다 처리했어.”

    안심이 되는 말이었지만 어째 민망했기에 오필리아는 다소곳이 고개만 끄덕였다.

    용호가 마법 주머니에서 첫 번째 물건을 꺼냈다.

    “자, 일단 트리엔트부터.”

    덩치 때문에 공간의 문이 위치한 방 입구 쪽에 서 있던 트리엔트가 깜짝 놀라 가지를 흔들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호명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였다. 용호는 그런 트리엔트에게 다시 한 번 손짓했고, 트리엔트는 뿌리로 뒤뚱뒤뚱 걸어 용호에게 다가섰다.

    “식물 영양제야.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몸에는 좋은 게 분명하니까.”

    노란 액체가 담긴 플라스틱 용기 수십 개를 들어 올린 용호가 개중 하나를 분리해 트리엔트의 몸체에 박아 넣었다. 순간 몸을 움찔한 트리엔트였지만 이내 노곤노곤한 표정이 되어 기분 좋게 가지를 늘어트렸다.

    용호의 말마따나 이렇다 할 맛은 느끼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영양제 하나에 바로 원기가 회복되었을 리도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엔트의 표정은 만족 그 자체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용호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나름 던전의 창단 멤버라고도 할 수 있을 트리엔트였는데 어째 그간 제대로 못 챙겨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용호였다. 아마 이번에도 카이완이 따라오지 않았다면 이렇다 할 물건을 챙겨주지 못했을 터였다.

    용호가 카이완에게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자 카이완은 얼른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용호는 바로 두 번째 선물을 꺼냈다. 금속 광택제였다.

    “스컬에게는 이거. 무기나 갑옷 손질할 때 써도 좋을 것 같고…….”

    용호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다 웃었다. 스컬이 금속 광택제를 받자마자 자신의 몸에 발랐기 때문이다. 기분 탓인지 진짜 제품 효과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컬의 몸에서 반짝반짝 윤이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되겠네.”

    “스컬스컬.”

    용호는 마저 선물을 돌렸다. 모두 카이완이 맞춤형으로 고른 것들이었다.

    “오필리아는 여기 화장품. 엘리고스에게는 냄비 세트. 티그리우스에게는 이거. 마음에 들려나 모르겠네?”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라이터를 받은 티그리우스는 불을 몇 번 피워보더니 무척 만족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담배를 필 때마다 마법의 불꽃을 피우던 그에게 라이터는 퍽 재미있는 장난감이자 수집품이었다.

    “자, 너희는 개껌이다.”

    “왈왈!”

    “낑낑!”

    역시 개에게는 개껌이었다. 강아지용 간식도 몇 봉지 넘겨준 용호는 다시 주머니를 뒤져 유리아에게 줄 선물을 꺼냈다. 이번에도 카이완이 고른 선물이긴 했지만, 약간은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유리아는 이거.”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선물을 건네자 그렇잖아도 커다란 유리아의 눈이 두 배는 더 크게 변했다. 진심으로 감탄을 토했다.

    “우와아아아아.”

    용호가 유리아에게 내민 것은 다름아닌 축구공이었다. 본래 인형 같은 것을 사다주려고 했던 용호는 축구공을 받고 좋아하는 유리아의 모습에 당황했다. 카이완이 인형 보다는 축구공을 더 좋아할 거라고 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진짜로 이렇게 좋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유리아가 연신 배꼽인사를 하자 바둑이와 새끼 던전 미어 캣도 따라서 인사를 했다.

    ‘진짜 공을 좋아하네?’

    용호가 눈을 껌벅이자 카이완은 거보라는 듯 용호의 팔을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유리아에게 좋은 선물은 곧 바둑이와 함께 놀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인형보다는 축구공이 정답이었다.

    [제꺼는요?!]

    [전 없어요?]

    유리아까지 선물을 받고나자 루시아가 조바심이 난다는 듯 용호를 보챘다. 용호는 작은 속삭임으로 루시아를 달랬다.

    ‘루시아는 이따가 따로.’

    [따로?]

    ‘따로.’

    리쿰에게도 멋들어진 라이터를 선물한 용호는 방에 남아있던 사역마들 가운데 마지막 둘을 바라보았다. 콧김을 뿜으며 기대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부케팔로스와 안 그런 척하면서 내심 기대하고 있는 살라미였다.

    부케팔로스에게 갈기 손질용 빗을 - 결국 스컬이 해줘야 하겠지만 - 건넨 용호는 마지막으로 살라미 앞에 섰다. 카이완과 카타리나를 한 번 돌아본 뒤 약간의 망설임 끝에 선물을 꺼냈다.

    “자, 살라미. 네 선물이야. 짜니까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용호는 살라미에게 이탈리아 소시지 살라미를 내밀었고, 카타리나와 카이완은 호기심과 즐거움과 조마조마함이 뒤섞인 눈으로 살라미의 반응을 기다렸다.

    살라미는 눈을 깜박이다가 살라미 한 점을 먹고 꼬리를 파닥거렸고, 용호는 어쩐지 모를 죄책감 속에 살라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사역마들의 복지를 신경 쓰는 마왕답게 용호는 마몬 가의 사역마들 모두에게 돌아가고도 남을 만큼의 먹거리를 챙겨 왔다. 이번에 챙겨온 먹거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치킨이 아닌 아이스크림이었다.

    용호와 기억을 일부 공유하는 루시아가 뭣 모르고 말했던 메론 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용호가 물었다.

    “격노의 왕 측에서는 아직 답장이 안 왔고?”

    던전의 심장 방 안에는 카이완과 카타리나, 오필리아와 엘리고스 이렇게 네 사람뿐이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아이스크림의 오묘한 맛에 감탄하던 오필리아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 어, 예. 죄송합니다. 흠흠. 아직 격노의 왕 측에서의 답장은 없었습니다. 사실 지난 번 답장이 너무 빠른 것이었고요. 아무래도 답장이 너무 빠르면 자신들 쪽이 ‘급하다’ 혹은 ‘ 몸이 달아있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아무리 단번에 오갈 수단이 있어도 이런 식의 교류는 며칠씩 시간을 끄는 것이 보통입니다.”

    ‘문자 읽고서 바로 답장 안하는 거랑 같은 건가.’

    미천하다 못해 사실상 없다고 해도 좋을 소개팅 경험을 떠올린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식의 교류에서는 밀고 당기기가 중요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용호가 사다 준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고 한창 빙글빙글 돌며 좋아하던 루시아가 돌연 몸을 바로 세웠다. 약간은 먼 허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씩하고 웃었다.

    [저쪽도 양반은 못 되는 것 같네요.]

    [밀당은 이쪽이 이긴 것도 같고요.]

    [던전 미어 캣들의 보고입니다.]

    어떤 보고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필리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격노의 왕 쪽이 더 급한 모양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역마들과 시선을 한 차례 교환한 용호는 던전의 심장 방을 나섰다.

    < 제 60장 - 동맹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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