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75화 (175/227)
  • < 제 59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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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아버지, 웬일로 집에?”

    용호가 눈을 껌벅이며 묻자 천기자가 인상을 썼다. 탁 소리가 나게 식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침이잖냐. 치킨집이 무슨 24시간 편의점이냐? 아침에는 문 닫아야지.”

    “어? 시차?”

    출발할 때 마계는 분명 오후였었다. 지난 번 방문했을 때에는 마계나 인계나 시간의 차이가 거의 없었는데, 설마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일까?

    천기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치 빠른 그답게 바로 말했다.

    “참고삼아 말하지만 지금은 3월이다.”

    용호는 미간을 좁혔다. 지난 번 방문 이후 마계에서 보낸 시간은 두 달이 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인계에서는 석 달이 넘게 흘러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그리고 지난번보다 크게 변했다.

    서로 다른 세상간의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차이나는 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만약 이 차이가 좀 더 커진다면 문제가 되었다.

    ‘좀 더 빨리 모셔가야 하나?’

    마계에서 1년을 보내고 왔더니 인계의 천기자가 10년 이상 나이를 먹는 상황이 발생하면 곤란했다.

    용호가 고민하는 가운데 천기자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일단 마저 먹고 이야기하자. 넌 밥 다 먹었냐?”

    “네, 먹고 왔어요.”

    아들놈이 갑자기 새 며느리를 데리고 왔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천기자였다. 꿔다 논 보릿자루마냥 뻘쭘하게 서 있는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슥 돌아본 뒤 다시 용호에게 말했다.

    “부인들… 표현이 이상하군. 아무튼 데리고 방에 들어가서 앨범이라도 보고 있어라. 금방 먹고 들어가마.”

    “어, 예.”

    “이따 보자, 새아가.”

    천기자가 카이완을 돌아보았고, 카이완은 얼른 웃는 얼굴로 예를 표했다.

    “네, 아버님.”

    천기자는 한 번 히죽 웃은 뒤 정말로 다시 밥 먹는 일에만 집중했다. 용호는 카이완과 카타리나를 얼른 자기 방으로 인도했다.

    가구를 꽤 치운 터라 다소 휑한 용호의 방이었다. 방바닥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은 카이완은 신기하단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되게 작다. 여긴 무슨 창고나 별관이야?”

    용호는 마몬 가의 첫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망해가는 집안이었지만 집 하나는 컸었다. 제법 작은 편에 속하는 카이완의 집무실조차도 거실보다 더 컸으니 말이다.

    카타리나가 얼른 카이완에게 속삭였다.

    “인계는 다들 집이 작아요.”

    “진짜?”

    “네.”

    카이완이 다시 용호의 방을 둘러보았다. 눈빛을 보니 예전에 추진했던 천씨 가문 사람 데려오기를 생각하는 듯 했다.

    먼 친척의 도움 좀 받아보자고 추진했던 계획이었는데, 집 상태를 보니 오히려 도움을 줘야 할 것만 같았다.

    “앨범 보자.”

    용호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천기자가 골라놓은 앨범을 펼쳤고, 이내 후회했다. 반면 카타리나와 카이완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첫 장에는 아기 시절의 용호가 발가벗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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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기자가 방에 들어올 때까지 용호의 수난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굴욕 사진으로만 꽉꽉 들이 찬 앨범이었다.

    천기자는 경우를 아는 사람답게 카타리나와 카이완, 용호에게 녹차를 한 잔씩 내밀었다. 용호는 자신 몫의 녹차를 후후 불어 마시며 물었다.

    “별 일은 없으셨고요?”

    “큰일이야 있겠냐. 네 녀석이 문제지.”

    “저도 괜찮아요. 평온한 걸요.”

    용호는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감췄지만 이미 들켰다는 사실을 알았다. 역시 천기자- 아버지를 속이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천기자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녹차를 내려놓은 뒤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전에 잠깐 왔을 때 혹시 봤냐? 온라인 게임 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

    “어, 네. 기억나요.”

    분명 치킨 배달하다가 전광판 뉴스로 본 기억이 났다. 다소 뜬금 없는 이야기였기에 용호는 눈빛으로 이야기를 재촉했고, 천기자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게 좀 심각하게 번졌다. 전 세계적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수십만 명이 넘는다고 하더구나.”

    수십만이란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은 당황했고, 용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특정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요?”

    “아니, 불규칙하게. 심지어는 슈퍼마리오 멀티 플레이 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도 있다는구나. 사용하던 기기도 다들 다르고.”

    이쯤 되면 확실히 기현상이었다. 더욱이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혼수상태에 빠진 이후란다. 회복기가 모두 달라.”

    “회복기? 깨어난 사람들이 있나요?”

    “많지. 거의 대부분이 깨어났단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회복기가 모두 다르단다. 어떤 사람은 혼수상태에 빠지자 마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금방 깨어난 사람도 있고, 며칠 혹은 한 달에서 두 달 후에 깨어난 사람도 있다.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갈수록 이상한 이야기였다. 천기자는 마지막 이야기를 덧 붙였다.

    “최근에 깨어난 사람들 가운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단다.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그 무슨 영화에나 나올 법한 판타지 세상을 체험하다 왔다나? 기존에 깨어난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는데, 최근- 그러니까 3월 이후에 깨어난 사람들 가운데 간혹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구나.”

    용호는 천기자가 어째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천기자가 용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뭔가 아는 것 없냐?”

    이계로의 소환.

    어찌보면 용호가 겪은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금시…초문이에요. 카이완은?”

    “혼수상태라는 건 결국 육신은 이곳에 남았다는 거지? 영혼만 데려가는 이계 소환 마법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어.”

    카이완이 제법 진지하게 답했다. 용호 역시 마계에 인계 사람들이 대거 출몰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용호와 카이완의 반응을 본 천기자는 한숨을 토했다. 다소 기가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용제 기억하냐? 네 사촌 천룡제. 그 영국에 이민 간.”

    “당연히 기억하죠. 마계에 가기 전에 같이 게임도 했는… 설마?”

    “그래, 녀석은 혼수상태에 그치지 않고 아예 뇌사했다는구나.”

    “용제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은 벌써 몇 년 전이었다. 하지만 온라인으로나마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사촌 동생이었다.

    천기자가 용호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쳤다.

    “혹시나 해서 물었던 거다.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용제 일도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이고. 이미 장례까지 다 끝났단다.”

    용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죽은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동안 왕래가 없었기 때문인지 슬픔 보다는 당혹스러움과 어쩐지 모를 허무함이 더 컸다.

    “아무튼 무슨 일이냐? 간만에 얼굴 봐서 좋긴 하다만 뜬금없구나.”

    천기자가 일부러 웃으며 물었다. 용호 역시 억지로나마 웃으며 답했다.

    “제가 인계 출신이잖아요? 가끔은 인계 공기를 쐬어주면 좋다고 해서요. 카이완도 소개시켜드리고 싶었고요.”

    천기자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콜라 떨어졌냐?”

    “그것도 있고요.”

    천기자와 용호가 함께 웃었다.

    “새삼스럽지만 반갑구나. 물론 우리 며느리들도 반갑고.”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약속한 것처럼 수줍게 웃었다. 천기자가 다시 껄껄 웃으며 물었다.

    “용호 놈이 속은 안 썩이고?”

    카타리나와 카이완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동시에 움직였다. 용호는 얼른 이 순간이 끝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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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나.”

    카이완은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경이를 마주한 사람처럼 쉬이 자신을 추스르지 못했다.

    카이완은 지금 대형 마트 앞에 서 있었다.

    “인…계는 정말 풍족하구나. 사람도 많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물건 또 물건이었다. 식재료뿐만 아니라 별의 별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경이였다. 탐욕의 미궁에 있는 마몬의 무기고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사람은 또 어찌나 많았던가. 길거리에 널리고 널린 게 사람이었다. 마계와는 인구밀도 자체가 달랐다.

    어쩐지 모르게 우쭐해진 용호는 카이완이 눌러 쓴 야구 모자를 다시 한 번 꾹 눌렀다. 후드를 뒤집어 쓴 카타리나와 더불어 카트를 밀었다.

    “용호야, 용호야. 이건 뭐라고 읽는 거야?”

    통역 마법석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육성을 통한 언어뿐이었다. 카이완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민 물건을 본 용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응? 살라미.”

    “살라미?”

    “살라미.”

    카이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카타리나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껌벅였다.

    카이완이 추궁하듯 물었다.

    “저기, 이거 먹는 거 아냐?”

    “맞…는데?”

    살라미. 이탈리아 소시지의 일종.

    물건을 내려놓은 카이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너무하다. 이름 너무 막 짓는 거 아냐? 살라미가 알면 얼마나 실망하겠어.”

    “유리아는 먹는 거 이름 아니죠? 루시아라든가, 바둑이라든가.”

    카타리나가 얼른 끼어들었다. 용호는 급히 답했다.

    “아니야, 살라미만 그래. 살라미만. 살라미만 먹는 거 이름이야.”

    변명한다고 꺼낸 말에 카타리나와 카이완은 더욱 싸늘한 눈빛이 되었고, 용호는 얼른 카트를 밀었다. 등 뒤가 따가웠지만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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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다.

    인계 방문의 주된 목적이었던 육신과 마신왕의 심장의 회복은 순조로웠다. 스카자하의 말처럼 인계 공기를 쐰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데리고 쇼핑에 이어 놀이공원 방문까지 마친 용호는 사역마들에게 나눠 줄 각종 물품들을 산처럼 쌓은 뒤에 공간의 문을 열었다.

    “조만간에 모시러 올게요.”

    용호가 천기자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진화 숙련치가 모두 차 있었던 터라 한 번 더 진화의 권능을 경험한 천기자는 장년기의 남성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건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은 용호였다.

    천기자는 그런 용호의 손등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천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용호에게 속 시원하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마계가 결코 안녕과 평온이 가득한 땅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쉬이 간파할 수 있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용호에 이어 카타리나와 카이완도 천기자에게 각기 인사를 했다. 카이완은 아예 천기자를 한 번 와락 끌어안았고, 그냥 악수만 나눈 카타리나는 아뿔싸 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이미 지나간 열차였다.

    천기자는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었고, 용호는 마지막으로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공간의 문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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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의 왕의 의식은 육신에서 분리되어 허공을 맴돌았다.

    폭력의 왕은 나태의 왕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나태의 왕이 폭력의 왕 자신에게 요구했던 일들과 나태의 왕에게 확인 받은 일들을 연결 지어 보았다.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이었다. 너무나 오랜 과거의 역사를 더듬는 것에 불과했다. 그때의 사람들 가운데 살아있는 이는 이제 거의 없었다.

    폭력의 왕은 과거에서 현재로 시선을 돌렸다. 혼란기를 눈앞에 둔 마계를 보았다.

    앞으로 펼쳐질 역사의 주역이 될 자는 누구일 것인가.

    식탐의 왕은 아니었다. 격노의 왕 또한 아니었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북부에서 군림하는 오만의 왕.

    하지만 그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하나가 아직 세상에 묻혀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탐욕의 왕.”

    탐욕의 신기가 알려주었다. 탐욕의 왕이 돌아왔음을.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마침내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 강림하였음을.

    폭력의 왕의 의식은 눈을 감았다. 허공을 맴돌기를 그만두고 본체와 합일 하였다.

    “탐욕의 왕.”

    에이션트 레드 드래곤. 당대의 드래곤 로드. 마계 최강의 드래곤. 죄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왕의 자리에 오른 자.

    폭력의 왕이 눈을 떴다. 산과 같은 거체가 움직임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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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노의 왕은 들뜬 얼굴로 서신을 펼쳤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떠올렸던 얼굴이 허공에 펼쳐졌다.

    키르티무카가 격노의 왕의 등 뒤에서 으흐흐 은근하면서도 위험해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가르디문디는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용호의 영상을 쳐다보았다.

    용호의 영상이 전한 말은 의례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동맹과 정상회담 모두 좋게 생각한다. 이런 제의를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시일을 정하는 것은 그쪽에게 맡기겠다. 다만 장소는 공백지 북부가 좋을 것 같다. 서로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하겠다.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격노의 왕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격노의 왕은 가볍게 스스로의 가슴을 짓눌렀다. 경매장에서와는 다소 다른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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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욕의 왕은 옥좌 위에 몸을 늘어트렸다. 천 년 동안 그를 괴롭혀온 깊은 후회가 다시 한 번 엄습해 옴을 느꼈다.

    도리가 없었다. 그날의 배신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색욕의 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깊은 후회 속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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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만의 왕은 손을 뻗었다. 체스판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는 기물들을 거머쥐었다.

    그의 시선은 전쟁이 한창인 북부에 닿아있지 않았다.

    남부.

    저 저주받을 탐욕의 왕 마몬의 시작이 된 땅.

    오만의 왕은 미소 지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상을 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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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개의 죄악.

    일곱 개의 신기.

    탐욕의 왕 마몬 이후 천 하고도 수백 년의 시간.

    죄악과 죄악이 다시금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신기가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마침내 모두 돌아온 일곱 개의 죄악. 일곱 명의 왕.

    죄악과 신기의 공명은 새로운 마신왕의 도래를 바라기 때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제 59장 - 금의환향 끝, 제 60장 - 동맹으로 이어집니다.

    < 제 59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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