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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74화 (174/227)
  • < 제 59장 - 금의환향 >

    제 59장 - 금의환향

    투기장 25층.

    25층의 플로어 마스터이자 용호로부터 9대 전 가주인 유크라시온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구시온이 자리한 특별관람석 쪽을 돌아보았다.

    그냥 항복하면 안 되냐는 간절한 눈빛에 구시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잔혹한 시험대인 투기장에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다'는 선택지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울상이 된 유크라시온이 다시 정면을 보았다. 무지막지한데다가 살벌하기까지 한 마력이 온몸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유크라시온도 나름 자신의 강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뿔은 다섯 개였고, 전투 기술 역시 투기장에서 오래 구른 만큼 꽤나 높은 수준까지 갈고 닦았다.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바, 반칙이야!’

    24층을 돌파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질식해서 죽을 뻔 하는 등 좀 인간다운(?) 면모가 남아 있었단 말이다!

    용호는 유크라시온 앞에서 전력을 개방했다. 식탐의 왕의 정수를 취한 뒤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우뚝 솟은 여섯 개의 뿔에서 방대한 마력이 용솟음쳤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일대가 진감할 지경이었다.

    녹염으로 대표되는 용호의 마력에는 이제 탐욕만이 깃들지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식탐의 힘이 깃들었고, 식탐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먹고 싶다’는 의지는 용호를 마주한 이들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야기했다.

    유크라시온은 카이완을 닮았다. 아니, 유크라시온이 카이완의 조상이니 카이완이 유크라시온을 닮았다고 해야 할 터였다.

    풍성한 회색 머리칼의 미녀가 울상이 된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으니 용호도 썩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대신 한 방에 끝내줄게요.”

    자비 어린 용호의 선언에 오기가 생긴 유크라시온은 이를 악물고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유크라시온을 마주한 채 용호는 오른 손에 거머쥔 아몬을 높이 들어올렸다. 단숨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으아아아아!”

    유크라시온은 비명 같은 괴성을 토하며 돌진했고, 용호는 아몬을 휘둘렀다. 약속한 것처럼 딱 한 방으로 끝을 내주었다.

    “잔혹한 놈.”

    “고통은 짧았을 거야.”

    용호의 태연스런 대답에 구시온은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흠칫 놀란 척을 하며 말을 보탰다.

    “무서운 놈.”

    유크라시온이 내지른 최후의 단말마는 참으로 처절했다. 어찌나 구슬펐는지 투기장에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순간이나마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용호는 문자 그대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전투시에는 철저해지는 용호다웠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만.’

    구시온은 지금까지의 힐난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껄껄 웃었다. 카이완이 용호의 팔을 바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유크라시온 님은 성격이 좋으신 분이니까. 분명 괜찮을 거야.”

    어째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은 카이완의 말이었지만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홍련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이전과 달리 전투 시에도 용호와 의식을 함께한 아몬은 구시온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의 성장이 어떠한가, 구시온.]

    '어린 주인'이 '주인'으로 바뀌었다. 용호를 굳이 '작은 나리'라 구분해서 부르는 구시온이 그 차이를 눈치 채지 못 할 리가 없었다.

    씩 웃은 구시온은 용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대신 이제는 평소에도 녹색빛을 띄기 시작한 두 눈을 바라보았다. 순순히 인정했다.

    “확실히 강해졌군. 강해졌어.”

    단순히 마력의 강함만을 논한다면 지난 천 년의 세월동안 투기장을 찾은 이들 가운데서 최강이었다.

    그리고 구시온은 알았다.

    단순히 마력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용호는 수많은 담금질을 거친 강철이었다. 투기장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몇 번이고 목숨을 건 사투를 경험했다.

    전투는, 싸움은 단순히 마력과 육체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투지와 싸움 기술, 과감한 판단력과 유연한 사고능력이 승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눈앞의 용호는 싸움에 재능이 있었다. 더욱이 반복된 사투를 통해 풍부한 경험까지 겸비하였다.

    투기장의 주인이 된 이래 처음으로 구시온은 기대하기 시작했다.

    “미적거리지 말고 후딱 올라와라. 나는, 39층에 있다.”

    구시온이 말했다. 투기장의 도전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위치한 층의 높이를 알려주었다.

    믿고 있으니까. 기대하고 있으니까.

    눈앞의 남자라면 반드시 자신 앞에 설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니까.

    구시온의 강렬한 눈빛을 마주한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밝은 얼굴로 말했다.

    “집에 좀 다녀온 다음에. 그리고 이건 스카자하의 편지.”

    “응?”

    바로 다음 층에 도전하지 않고?-라는 의문이 그대로 담긴 표정이었지만 용호는 문자 그대로 휙 돌아섰다. 연이어 용호의 팔을 안고 있던 카이완이 말했다.

    “선물 사올게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카타리나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아몬이 말했다.

    [다음에 보자.]

    짐승 가면 사내의 안내도 필요하지 않았다. 용호는 성큼성큼 걸어 투기장을 나섰다.

    잠시 멍한 얼굴로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를 쳐다보던 구시온은 스카자하의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편지를 펼쳤다. 단순히 ‘보고 싶다’에 그치지 않고, 조만간에 만나자는 스카자하의 편지 내용에 고개를 끄덕였다.

    구시온은 다시 용호가 빠져나간 통로 쪽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

    가르디문디는 날아올랐다. 그녀의 품에는 마몬 가주가 직접 전해준 서신이 들어 있었고, 허리에 찬 사라스바티의 주머니 안에는 몇 가지 답례품이 들어 있었다. - 물론 특산품인 치킨도 빠지지 않았다. -

    마몬 가의 가주는 본인이 직접 자유도시를 방문했다. 꽤나 파격적인 행보였고, 어찌 보면 그만큼 격노의 왕의 사자인 가르디문디를 대우한다고도 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가르디문디는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어째서 자신을 부르지 않고 직접 자유도시를 방문했을까.

    가주들 가운데는 자신의 던전을 외부인에게 노출하고 싶지 않아 모든 외교적인 일을 던전 입구에서 처리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몬 가는 이미 한 번 가르디문디 자신을 던전에 들인 역사가 있었다. 이제와서 굳이 던전을 들이기 싫어한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싫다면, 역시 입구가 파손된 것과 연관이 있으려나?’

    마몬 가는 공격 받았다. 여간해서는 파괴되지 않는 던전 입구가 송두리째 날아갔으니 공격한 쪽도 보통내기가 아닐 터였다.

    마몬 가의 가주는 뒤틀림으로 인해 만들어진 공간의 문을 통해 이계인들이 공격해왔다고 말했다.

    과연 그 말이 진실인 것일까.

    만약 거짓이라면 왜 구태여 말을 꾸며냈을까.

    마몬 가의 던전이 위치한 세계의 끝- 엔카트로 패그니움은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곳으로 유명했다. 애당초 마력의 흐름이 거센 곳이라 뒤틀림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일단 저쪽도 우호적이긴 한데.’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마몬 가의 환대는 당연했다. 격노의 왕과의 동맹은 어떻게 보아도 마몬 가에게 이득이었으니 말이다.

    ‘강해졌어.’

    마몬 가의 가주는 가르디문디 자신의 앞에서 단 한 번도 뿔을 개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느낄 수 있는 차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강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마몬 가의 가주 좌우에 있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변화의 원인을 찾자면 역시 마몬 가가 당한 공격일 터였다.

    ‘결과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한창 설레발을 떨고 있는 키르티무카와 달리 가르디문디는 친애하는 드리타라슈트라- 자신들의 주인인 격노의 왕의 ‘혼담’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몬 가의 가주가 눈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세력이 약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몬 가의 가주와 그 예속 사역마들은 강했다. 아직 부족한 구석이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이제 격노의 왕 곁에 설 수 있었다.

    팔부중 내에서 신랑감을 찾는 것은 별반 이득이 없었다.

    강대한 외부 세력과의 결합이야말로 팔부중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가르디문디는 격노의 왕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꼈다. 하지만 그녀는 왕이었다. 그녀의 혼담은 그녀 개인 차원이 아니라, 팔부중 전체를 고려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가르디문디는 날갯짓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 가루라 일족 가운데서도 최고라 불리는 붉은 날개로 마계의 하늘을 질주했다.

    &

    용호가 깨어나고 정확히 하루가 지났다. 마몬 가의 주요 사역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공간의 문이 위치한 방에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라 마력을 보다 많이 소모하게 되었습니다.]

    [식탐의 왕과의 싸움에서 던전에 비축된 마력을 쓰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물론 이번에 다녀오시면 비축 마력이 탈탈 털릴 것 같긴 하지만요.]

    식탐의 왕과의 싸움은 외부의 간섭이 모두 차단된 곳에서 이루어졌다. 덕분이라 하기는 뭐하지만, 그 때문에 큰 싸움이 연이어졌음에도 마몬 가 던전의 비축 마력은 충분함 그 자체였다.

    카이완과 카타리나와 함께 공간의 문 앞에 선 용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역마들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스컬과 제일 먼저 눈이 마주쳤다.

    “스컬스컬.”

    스컬은 여전히 드래곤 본 나이트인 상태였다. 용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다녀와서 결정하자.”

    “스컬컬.”

    네크로멘싱의 비의가 담긴 마검과 네크로멘싱에 특화된 리치.

    용호는 결국 둘 다 선택했다. 덕분에 마몬 가의 예산이 다시 위태로워졌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언제나 투자 이상의 성과를 보여준 스컬이었다. 마몬 가의 재산은 예나 지금이나 소수정예를 이루는 ‘인재’였다.

    용호는 다시 눈동자를 굴려 스컬보다 더 커다란 존재를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미안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에는 너도 먹을 수 있는 걸 가져올게. 기대해도 좋아.”

    트리엔트가 가지를 덩실덩실 흔드는 것으로 응답했다. 진화를 거듭한 덕분에 바둑이나 고블린 레인저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결코 평범한 트리엔트라 할 수 없는 그였다.

    용호가 사역마들을 하나 둘 돌아보며 선물을 약속하자 카이완이 용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약간은 힐난하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선물 사다가 마몬 가 기둥뿌리 다 뽑는 거 아냐? 절약 좀 해야지.”

    물론 장난이었다. 하지만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자신과 용호의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던 유리아에게는 아니었다.

    마몬 가의 재산 사정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는 얼굴이 된 유리아를 마주한 용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유리아의 뺨을 꼬집으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 돈 많아.”

    “다녀오세요.”

    안심한 유리아가 얼른 배꼽 인사를 하자 바둑이와 새끼 던전 미어 캣도 따라서 허리를 숙였다.

    “왈왈!”

    “낑낑!”

    사역마들과의 인사가 대충 끝나자 용호는 가장 믿음직한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속 사역마들을 대표해서 오필리아가 말했다.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고 오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알려주고.”

    “알겠습니다.”

    오필리아와 엘리고스, 티그리우스는 함께 예를 표했다. 앞의 유리아, 바둑이, 새끼 던전 미어 캣들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른 배웅 인사였다.

    용호는 돌아섰다. 이미 한 번 경험해봤기 때문인지 마냥 즐거워하는 카타리나와, 약간은 긴장한 것 같은 카이완의 손을 각기 꽉 붙잡았다.

    “가자.”

    용호와 카타리나가 동시에 뛰었고, 카이완은 두 사람에게 딸려가듯 한 박자 늦게 지면을 박찼다.

    새파란 공간의 문이 세 사람을 집어삼켰다.

    &

    문이 열렸다. 문을 통과하는 과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짧으면서도 긴 것 같은 시간의 흐름. 눈을 떴을 때 용호가 마주한 것은 익숙하기 그지없는 거실 풍경이었다.

    용호는 숨을 크게 골랐다. 카타리나 역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으로 평온함을 표했다. 카이완만이 평소보다 조금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 때였다.

    “용호?”

    부엌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던 용호의 아버지- 천기자가 숟가락을 든 채 눈을 껌벅였다. 용호는 밝게 웃으며 돌아섰다.

    “아버지.”

    천기자는 침착하게 수저를 내려놓은 뒤 냉수를 마셨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왼쪽에 있는 건 우리 며느리고.”

    통역 마법석 덕분에 ‘며느리’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인식한 카타리나가 귀와 꼬리를 파닥거렸다. 천기자의 시선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오른쪽의 아가씨는?”

    용호보다 카이완이 빨랐다. 약간의 멀미 따위 단숨에 씹어 삼킨 카이완은 그녀답지 않게 약간의 애교를 섞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카이완이라고 해요. 용호 부인이에요.”

    특정 부분에서 특히 발음을 강하게 했다.

    천기자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박였다. 혹시나 하는 눈으로 카타리나를 돌아보았고, 해맑기 그지없는 카타리나의 표정에서 이혼이나 헤어짐 같은 단어들을 지워도 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용호 너, 왕 맞구나.”

    천기자의 말에 용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 제 59장 - 금의환향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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