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8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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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하고 편안했다.
당장이라도 다시 눈을 감아 잠들고 싶었다.
코앞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러했을 터였다.
“도련님! 괜찮아? 내 목소리 들려? 이거 몇 개야?”
걱정이 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용호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푸른 물빛 머리칼의 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이어 눈앞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는 손가락 두 개를 반사적으로 헤아린 뒤 입을 열었다.
“스카자하?”
“몇 개?”
“두 개.”
“멀쩡하구나!”
스카자하가 용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푸른 물속에 들어가 있던 용호인 터라 스카자하도 푸른 물속에 풍덩 빠진 꼴이 되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푸른 물만큼이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스카자하의 몸이었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뒤 스카자하를 마주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스카자하는 와락 끌어안았을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용호를 밀어낸 뒤 씩 웃었다.
“순번이 밀렸으니까.”
“어?”
스카자하는 뒷걸음질 쳐서 푸른 물을 빠져나갔다. 눈앞을 가득 채웠던 스카자하가 뒤로 물러서자마자 새로운 얼굴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주 님!”
“용호야!”
양옆에서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동시에 덮쳐왔다. 용호는 이번에도 얼결에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카타리나는 용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귀를 파닥거렸고, 카이완은 뺨에 연신 입술을 맞췄다.
“몸은 어때? 괜찮아?”
“혹시 부작용 같은 것은 없나요?”
카이완과 카타리나가 경쟁하듯 물었다. 정신없는 가운데 용호는 잠시 대답을 지체했고, 카이완과 카타리나는 각자 눈을 빛내며 용호를 보았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허리를 감쌌던 손을 풀어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보았다.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전과 달라진 것. 과거에는 느낄 수 없던 것.
“식탐의 죄.”
나지막이 말한 용호는 눈을 감았다. 의식을 집중했고, 확신했다.
“내 안에 있어. 지금 당장은 탐욕처럼 다룰 수 없을 것 같지만… 이제 분명 내 것이야.”
용호의 심장과 하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마신왕의 심장 한 편에 식탐이 자리했다. 아직 탐욕과 달리 용호에게 순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의나 악의를 품고 있지도 않았다. 시간을 좀 더 들이면 탐욕처럼 부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오.”
감탄한 카타리나가 용호의 가슴팍을 보며 귀를 파닥 거렸다. 꼬리 역시 푸른 물속에서 살랑거렸다.
흥분하기는 카이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용호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너 그거 알아? 마몬 님 이래 처음이야! 두 가지 이상의 죄악을 한 몸에 모은 왕은!”
시선과 목소리에 자랑스러움이 한껏 묻어났다. 카타리나의 시선은 존경이라 해도 좋았다.
용호 역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약간은 바보 같이 보였지만 즐거이 웃었다.
식탐의 왕을 쓰러트렸다. 그를 이기고 살아남았다. 마몬 이래 최초로 두 개 이상의 죄악을 손에 넣은 왕이 되었다.
용호는 주먹을 가볍게 쥐어 보았다. 새삼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몸이 가벼워. 이건 정수 흡수의 성과인가?”
물속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부유감과는 달랐다. 말 그대로 몸이 가벼웠다. 마치 스스로의 육신이 깃털처럼 느껴졌다.
용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내 이 비슷한 감각을 이미 한 번 느껴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화의 권능.”
아가레스를 쓰러트리고 정수를 취했을 때. 용호 자신보다 강대한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했던 일.
진화의 권능이 육신을 재구성했다. 보다 강맹하고 효율적으로 환골탈태시켰다.
[주인님의 육체 능력이 무척이나 향상되었습니다!]
[외모도 살짝쿵 바뀌셨어요.]
[물론 예전보다 더 멋있게요!]
지금까지 일부러 참았다는 듯 루시아가 밝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외모가 바뀌었다는 말에 용호는 주섬주섬 스스로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자신의 육체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용호였기에 금방 무엇이 변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단 키가 조금 더 자랐다. 피부는 아기 피부처럼 매끌매끌 부드러웠고, 그렇지 않아도 단단하던 몸은 이제 마치 강철과도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오. 오오오오.”
크게 감탄한 용호는 무척이나 만족스런 얼굴이 되었다. 그런 용호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이완과 카타리나는 이내 용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거의 동시에 뺨을 붉혔다.
카이완의 입꼬리가 살살 올라갔다. 카타리나의 귀가 격렬하게 파닥거렸다.
침묵하던 아몬이 아주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번뇌력이 증가하는군.]
루시아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흠흠. 그보다 주인님. 중요한 소식이 있습니다.]
[격노의 왕이 또 서신을 보냈어요.]
스카자하의 저택 안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루시아의 힘이 강해진 덕분인지 카타리나와 카이완도 루시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카타리나가 얼른 자신의 허리춤을 뒤지며 말했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카타리나가 서신을 찾는 동안 용호가 카이완에게 물었다.
“내가 쓰러지고 얼마나 지났지?”
“딱 하루. 이번에도 가루라 계집이 서신을 가지고 왔어. 지금은 자유도시 선술집에서 네 답장을 기다리고 있고. 상황이 상황이니 외인을 함부로 던전에 들일 수 없잖아?”
마지막 어조가 마치 칭찬해달라는 것 같았기에 용호는 카이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잘했어.”
“여기 있습니다.”
타이밍 좋게 카타리나가 격노의 왕의 서신을 내밀었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머리도 한 번 쓰다듬은 뒤 겉봉의 봉인을 뜯었다. 바로 서신을 꺼내들기 앞서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마력이 느껴지는데?”
“영상 마법이 들어있는 것 같아.”
카이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용호는 서신을 펼쳤다. 과연 카이완의 말마따나 서신 바로 위 허공에 빛 무더기가 모이더니 하나의 형상을 갖추었다. 던전 상회 특별 경매장에서 마주한 바 있는 격노의 왕 그녀의 얼굴이었다.
[아아.]
[여기다 대고 말하면 되는 거지?]
격노의 왕이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그리 말했다. 그러자 약간 먼 곳에서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이미 녹화 시작했습니다.]
화들짝 놀란 격노의 왕은 다시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헛기침을 토했다. 자세를 바로하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흠흠.]
[이렇게 영상으로나마 인사하게 되어 반갑소, 마몬 가의 가주여.]
[나는 격노의 왕이자 간다르바의 족장이며, 팔부중의 수장인 드리타라슈트라라고 하오.]
“저거 귀여운 척 하려는 거 아냐? 허당에 호구 끼도 좀 있는 것 같고.”
카이완이 낮게 말했고, 카타리나는 어쩐지 모를 위기감을 느끼며 집중했다. 용호는 청초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하오체가 꽤 신선하다는 얼굴로 격노의 왕을 보았다.
격노의 왕이 계속 말했다.
[나의 신실한 벗이자 수하인 가루라 일족의 가르디문디를 통해 그대가 보낸 답장과 특산품은 잘 받았소.]
[그대 역시 우리 팔부중과 우호적인 관계를 생각하고 있다하니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소.]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인 격노의 왕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망설이듯이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 겨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조금 이를지도 모르지만, 한 차례 만남을 가져 팔부중과 마몬 가의 교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어떻겠소?]
[북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의 전쟁으로 인해 마계의 미래가 불투명하오. 호전성이 높은 식탐의 왕 또한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기세라오.]
[우리 팔부중과 마몬 가가 힘을 합치면 이 난세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격노의 왕의 목소리에는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강직한 어조로 말을 잇던 그녀는 한차례 숨을 고르더니 다시 표정을 풀었다. 온화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나 스스로가 말했듯이 만남을 가지자는 것은 조금 이른 이야기일수도 있소.]
[그러니 혹여 거절을 생각한다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하오.]
[그대의 기탄없는 답변을 기다리겠소.]
[추신 : 치킨은 정말 맛있게 잘 먹었소. 감사하오.]
마지막에 떠오른 추신은 목소리가 아닌 빛의 문자였다. 하지만 격노의 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용호는 일단 서신을 덮었다.
카이완과 카타리나는 섣불리 입을 여는 대신 각자 생각에 잠겼다. 격노의 왕의 제의에 관한 대답은 마몬 가의 향후 장래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용호는 잠시 눈을 감고 시트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가 했던 말. 그녀가 가장 중요하다 말한 한 가지 결정.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
탐욕의 왕인 것을 숨긴다.
물론 이번에 손에 넣은 식탐 역시 숨기는 것이 맞았다.
격노의 왕의 호의는 ‘용호가 왕이 아니다’라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구태여 진실을 드러내 우호 관계를 깨트릴 필요는 없었다.
식탐의 왕을 쓰러트린 사실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용호가 탐욕뿐만 아니라 식탐 역시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격노의 왕이 알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왕들이 그 사실을 알면 어떤 행동을 할까?
역사가 답을 알려주었다. 칠대 죄악 가운데 셋을 모은 마몬을 상대하기 위해 나머지 왕들 전원이 힘을 합친 전례가 있었다.
숨기는 것이 좋았다. 격노의 왕과 만나는 것은 탐욕의 왕이 아닌 마몬 가의 가주로 충분했다.
방침을 정한 용호가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가만히 용호의 상태를 살피던 루시아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주인님.]
[예속 사역마를 확보할 수 있는 공간 역시 크게 늘었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를 더 예속 사역마화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장의 주제인 격노의 왕의 서신과는 다소 어긋나는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허투루 들을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용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스카자하를 보았다. 스카자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맙지만 나는 아직이야. 도련님이 나랑 약속했던 거 기억하지?”
“기억하고 말고.”
스카자하의 시험의 통과 조건은 구시온의 해방과 복속이었다. 스카자하보다 구시온을 손에 넣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이건 마몬 가의 회복사로서 하는 권유야. 조만간에 집에 한 번 다녀와.”
“집? 설마 인계를 말하는 거야?”
용호의 되물음에 스카자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용호와 카타리나, 카이완이 들어있는 푸른 물에 다가서며 말했다.
“맞아. 이번에 육신 자체가 완전히 새로 태어난 결과라고 해야 할까? 마신왕의 심장도 그렇고 인계 공기를 한 번 더 쐬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지만 오히려 새로운 의문을 낳았다. 용호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나는 그렇다치고 마신왕의 심장은 왜?”
“마몬 주인님은 마신왕의 심장을 마계가 아닌 인계에서 완성하셨어. 마신왕의 심장의 재료 중 상당부분은 인계의 것도 섞여 있는 걸?”
용호는 눈을 깜박이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브리가다로 만들어진 마신왕의 심장이 새삼 새롭게 보였다.
카이완이 얼른 용호의 팔을 끌어안았다.
“나도 가고 싶어. 아버님한테 인사도 드리고 싶고.”
“저도요.”
카타리나가 질세라 반대쪽 팔을 끌어안았다.
용호는 잠시 카이완과 카타리나를 동시에 마주하신 아버지를 떠올려 보았다. 과연 아버지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실까?
상상만해도 키득 웃음이 나왔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용호는 카이완과 카타리나의 품에서 두 팔을 부드럽게 빼낸 뒤 말했다.
“일단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하도록 하자.”
격노의 왕의 사자가 자유도시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은 그 문제부터 서둘러야 했다.
“루시아, 회의실에 사역마들을 모아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예속 사역마들과 수비대장 리쿰, 작업장 버그림을 1층 회의실에 집결시키겠습니다.]
[시간이 다소 걸릴 터이니 천천히 준비해주세요.]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새삼 카이완과 카타리나, 스카자하에게 질문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지?”
식탐의 왕이 생명의 정원을 급습했을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십여 마리에 달하는 데스 나이트들과 얼핏 보아도 다섯이 넘는 뱀파이어 로드들이 있었다.
식탐의 왕을 쓰러트린 뒤 경황이 없어 그것들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미처 살피지 못했다. 예속 사역마들도 눈앞에 있는 카이완과 카타리나, 언제나 함께하는 아몬 외에는 상황을 알지 못했다.
용호의 물음에 세 사람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고, 이내 씩 웃었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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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8장 #2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