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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70화 (170/227)

< 제 58장 - 탐욕 >

제 58장 - 탐욕

식탐의 왕의 결계가 붕괴했다. 경계의 틈바구니 사이에 존재하던 거짓 세상이 무너지며 진정한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카자하로부터 비롯된 생명의 힘이 가득한 생명의 정원.

용호는 인지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쾌락 속에 울부짖었다.

탐욕은 식탐의 왕의 정수를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온전히 집어삼키고자 한껏 힘을 발했다.

용호의 심장이 이에 호응했다. 마신왕의 심장으로 인해 부서지기 일보직전이었던 용호의 심장은 식탐의 왕의 마력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형태를 유지했다.

정수 흡수는 보다 강한 자의 힘을 흡수했을 때 최적의 효율을 보였다. 식탐의 왕의 마력은 거대했다. 과거 아가레스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처럼 용호의 그릇을 상회하는 거대한 덩어리였다.

진화의 권능이 눈을 떴다. 정수 흡수의 전율 속에 이지를 잃은 용호를 대신 해 스스로를 진화시켰다.

그릇을 깨트렸다. 넘쳐나는 마력을 재료 삼아 새로운 그릇을 빚어냈다.

환골탈태라 해도 좋을 것. 이미 한 번 경험해본 바가 있었다. 두 번째 환골탈태는 용호의 육신을 보다 효율적이고 강맹하게 변모시켰다.

뿔의 개수는 여섯 개 그대로였다. 허나 환골탈태 이전과 결코 같지 않았다. 용호의 육신이 보다 마력에 가까워졌다. 마력을 통제하던 통로의 개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세세하게 이어져 있던 샘물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었다.

초록빛 섬광이 눈부시게 일었다. 용호의 육신이 완벽히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었기에 어깨의 손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력의 덩어리가 뼈가 되었다. 연이어 근육과 혈관이 이어졌고, 그 위에 잡티 하나 없는 피부가 더해졌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방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의 격렬함에 뒤지지 않는 강렬한 힘의 충돌이 용호의 육신 내부로부터 이루어졌다.

식탐의 발악이었다.

이미 본신을 잃고 탐욕에게 집어삼켜진 식탐이었지만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부에서부터 탐욕을 먹어치우고자 했다. 식탐의 왕이 남긴 최후의 악의는 식탐과 함께 지독한 저주가 되었다.

진화의 권능은 탐욕을 도울 수 없었다. 환골탈태만으로도 이미 무시무시한 마력의 격류가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탐욕과 식탐이 서로를 잡아먹었다. 두 죄악을 담은 마신왕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두 죄악의 아귀다툼에 용호의 심장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용호에게 다가서는 자가 있었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카타리나가 양 어깨를 끌어안은 채 비명을 질렀다. 머리 위에 돋아난 다섯 개의 뿔이 사정없이 진동하며 마력을 발산했다.

고통과 환희의 이중주 속에서 카타리나가 발걸음을 내딛었다. 카이완 역시 다섯 개의 뿔을 우뚝 세운 채 억지로 눈을 떴다. 용호의 잘려나간 팔로부터 빠져나와 홀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 탐욕의 신기를 보았다.

스컬이 신기를 붙잡았다. 오필리아와 엘리고스가 각자의 가슴을 움켜쥔 채 괴성을 토했다. 티그리우스가 합체의 권능을 일깨웠다.

아몬이 허공에 홀로 피어올랐다. 홍련의 마창은 격렬한 초록빛을 내뿜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예속 사역마들 모두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이끌었다.

탐욕의 신기가 빛을 발했다.

환골탈태뿐만 아니라 탐욕과 식탐의 대립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부유하던 용호는 예속 사역마 모두를 느꼈다. 동시에 탐욕의 신기로부터 목소리를 높이는 유호유안의 힘을, 조화의 힘을 인지했다.

식탐의 왕이 쌓아올린 모든 것.

그가 먹어치운 것들.

탐욕이 그 모든 것을 소유했다. 예속 사역마 모두의 힘을 이끈 용호가 식탐의 왕의 발악을, 그 악의를 찍어 눌렀다.

식탐이 마지막 악의를 발산했다. 하지만 이미 판도가 기울었다. 탐욕 앞에 무릎 꿇은 식탐의 죄가 마신왕의 심장에 자리했다.

눈부시게 작렬하던 초록빛이 사그라들었다. 마력에 의해 부유했던 용호의 육신이 지상에 추락했고, 예속 사역마들을 휩쓸었던 고통과 환희가 잦아들었다.

실버 드래곤 아머가 해체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두 번째 환골탈태를 마친 용호는 지고의 쾌락 속에 눈을 감았다.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비틀거리며 용호에게 다가섰다. 스컬이 탐욕의 신기를 손에 든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몬은 마지막으로 스카자하의 저택 쪽을 돌아보았다. 저택을 나설 수 없는 스카자하는 애타는 표정으로 서서 용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칠대 죄악 가운데 둘이 모였다.

마몬 가의 손에 다시 한 번 일곱 신기 가운데 하나가- 저 ‘격노의 신기’가 돌아왔다.

아몬은 불현듯 왕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계단을 홀로 오르던 그의 마지막 모습.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일이었다.

아몬 자신이 그리 만들 터이니까. 반드시 그리할 테니까.

아몬으로부터 홍련의 불길이 일었다. 새로운 탐욕의 왕에게 돌아가고자 한줌 불꽃으로 화해 사라졌다.

&

가르디문디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떠도 눈앞의 광경이 변하지 않았다.

마몬 가의 던전 입구가 사라져 있었다.

단순한 붕괴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괴물에게 한 입 베어 물린 것처럼 입구 자체가 없어졌다.

가르디문디는 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마몬 가의 던전 미어 캣들을 찾을 수 있었다. 던전 입구부터 시작된 둥지가 꽤나 깊었는지, 깨끗이 잘려나간 단면에 난 구멍으로 빼꼼 머리들을 내밀고 있었다.

가르디문디가 걱정한 것은 던전 미어 캣들의 안위가 아니었다. 던전 미어 캣들조차 던전을 버리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을 염려한 것이었다.

마몬 가는 습격을 당했다. 그렇다면 습격자는 누구인가. 남부 공백지 내에 마몬 가를 공격할 자는 사실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외부’의 세력일까?

가르디문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단을 내렸다. 다섯 개의 뿔을 우뚝 세우는 한편 날개를 조절해 활강을 개시했다. 마몬 가를 살펴보고자 지상에 안착했다.

던전 미어 캣들이 자신을 보았다. 그러니 마몬 가의 던전의 영혼이 아직 살아있다면, 던전 입구에 나타난 외부인을 상대할 여력이 있다면 무언가 반응이 돌아올 터였다.

가드디문디는 격노의 왕을 상징하는 거대한 깃발 대신 강철 창을 거머쥐었다. 가만히 늘어트린 채 마몬 가의 던전을 노려보았다.

가만히 숫자를 헤아렸다. 오 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오 분 뒤에는 던전 내로 진입할 생각을 했다.

공백지 ‘외부’라 하면 결국 폭력의 왕과 식탐의 왕밖에 남지 않았다. 한참 먼 곳에 있는 색욕이나 저들끼리 싸우느라 바쁜 오만이나 질시가 세상의 남쪽 끝에 있는 마몬 가에까지 시비를 걸 가능성은 너무나 낮았다.

만약 폭력이나 식탐의 공격이라면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격노의 왕의 눈과 귀 역할을 대행하는 첨병으로서의 의무였다.

긴장이 시간을 가속화시켰다. 눈깜박할 사이에 오 분이란 시간이 지났다.

각오를 다진 가르디문디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동시에 강철 창으로 정면을 겨누었다.

“마몬 가의 집사장 엘리고스가 인사드립니다.”

난폭한 질주가 무색하게도 붉은 야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예를 표했다. 다급한 변신의 여파인지 상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상태였지만 강철 같은 근육 덕분인지 헐벗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가르디문디는 짧게나마 안도의 숨을 토했다. 일전 방문했을 때 마주했던 집사장과 얼굴과 목소리가 일치했다.

“가루라 일족의 가르디문디요. 격노의 왕 전하의 서신을 가지고 왔소. 혹여 마몬 가에 우환이라도 있는 것이요?”

직설적인 물음에 엘리고스는 단정한 미소를 보였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작은 우환이 있었지만 해결되었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결국 축객령이었다. 가르디문디는 다시 한 번 직설적으로 말했다.

“조력이 필요하다면 기탄없이 말하시오. 부족한 힘이나마 돕도록 하겠소.”

“괜찮습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을 안으로 모시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엘리고스의 뜻은 단호했다. 결국 가르디문디는 던전 내부를 살펴보는 것을 포기했다. 괜히 성급하게 계속 달려드는 것보다는 한 발 물러서서 시간을 두는 편이 나았다.

가르디문디는 철창을 회수한 뒤 뿔까지 모두 갈무리했다. 허리춤에 자리한 사라스바티의 주머니를 열어 서신과 작은 상자를 꺼냈다.

“격노의 왕 전하의 서신과 마몬 가 특산품에 대한 답례품이요.”

가르디문디는 두 손으로 물건들을 내밀었고, 엘리고스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가르디문디에게 다가가 직접 물건들을 수령했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가르디문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정한 첨병의 눈은 단순히 천리 밖만을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사물은 물론이고 사람을 감별하는 능력 또한 중요했다.

달라졌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변모했다. 힘을 갈무리한 상태인 터라 어떤 식의 변화가 있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강해졌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했다.

가르디문디는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마치 가면이라도 쓴 것 마냥 의구심 하나 없는 맑은 얼굴로 말했다.

“오는 길에 북쪽에 있는 도시를 보았소.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도록 할 터이니 기별을 주시오. 마몬 가의 가주께 인사를 올리고 답장을 받아가겠소.”

그냥은 물러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엘리고스는 이 직설적인 사자가 마음에 들었다.

“가능한 빨리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도시 서부에 위치한 선술집이 마몬 가의 소유이니 아무쪼록 편히 머물러 주셨으면 합니다.”

선술집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마몬 가의 소유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르디문디는 엘리고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크고 단단한 손을 가볍게 움켜쥔 뒤 웃으며 물러섰다.

“기다리겠소.”

“다시 뵐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가르디문디는 날개를 펼쳤다. 엘리고스의 등 뒤, 마몬 가의 던전 내부로 눈길을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날아올랐다. 자유도시를 향해 날갯짓을 했다.

&

시트리는 말했다.

“격노의 왕이 마몬 가에 호의를 보이는 이유는 참으로 단순합니다.”

마몬 가와 연합하면 커다란 남부 연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남부 공백지를 일통한 마몬 가의 저력을 두려워해서도 아니었다.

“마몬 가는 그 어떤 왕의 휘하에도 속해있지 않다.”

그 안에 의미가 숨어 있었다. 한 꺼풀만 벗겨 보면 격노의 왕이 마몬 가에 적의 대신 호의를 보이는 이유가 명백히 드러났다.

“왕이 아니다. 격노의 왕 자신보다 한 수 아래에 있다.”

그것이 호의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죄악과 신기를 놓고 견제해야만 하는 상대가 아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믿을 수 있다.”

약육강식의 세계인 마계에서 자신보다 강한 자를 믿는 것은 어려웠다. 하물며 그 상대가 왕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죽여 죄악을 취할 동기를 품은 존재라면.

“격노의 왕과의 관계를 꾸려나갈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역시 그것이겠죠.”

탐욕을 숨기느냐 밝히느냐.

한 사람의 왕으로서 그녀를 마주할 것인가, 공백지를 일통한 명가의 후예로서 마주할 것인가.

용호는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났다.

&

< 제 58장 - 탐욕 > 끝

ⓒ 취룡

작가의 말

덧1) 왕들의 대략적인 나이

오만 : 백~이백 사이.

질시 : 천~이천 사이.

색욕 : 천하고도 수백.

나태 : 미상

격노 : 백 세 이하.

식탐 : 백~이백 사이.

폭력 : 천하고도 수백.

* 마몬이 활동하던 시기는 정확히 천 년 전은 아니고, 천하고도 수백 년 전입니다.

* 천 세 이상의 마족은 굉장히 드뭅니다.

덧2) 신기에 대해 다시 언급드리자면,

오만 - 오만의 신기 보유

색욕 - 색욕의 신기 보유

질시 - 질시의 신기 보유

나태 - 나태의 신기 보유

격노 - 식탐의 신기 보유

식탐 - 격노의 신기 보유 - 용호에게 뺏김

폭력 - ‘오리지날 탐욕의 신기’ 보유

용호 - 마몬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미완성 상태인 ‘탐욕의 신기’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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