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68화 (168/227)

< 제 57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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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자하의 푸른 물 덕분인지 무지막지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그리 오랜 시간동안 잠들지는 않았다.

아침잠이 많아 여전히 허우적거리는 카타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용호는 잠이 덜 깬 카이완과 가볍게 키스한 뒤 스카자하의 저택을 나섰다.

아침부터 농사일에 한창인 스컬 부대가 용호의 눈에 들어왔다. 스컬 역시 손수 호미를 들고 감자를 캐고 있었다. 어쩌면 스컬의 전생은 기사단장이나 유명한 전사가 아니라 우수한 농부였던 것은 아닐까?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스컬을 보며 시답잖은 상상을 하던 용호는 생명의 정원마저 나온 뒤 마왕의 방으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왈왈!”

“낑낑!”

아침부터 마왕의 방을 청소 중이던 유리아가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대걸레질을 하던 바둑이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리아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새끼 던전 미어 캣은 꽤나 낯설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셋 다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었고, 보기에도 귀여웠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던전 햄스터도 한 마리 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만 잠깐 해보았다.

인사 대신으로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용호는 옥좌에 앉았다.

옥좌 역시 처음과는 많은 곳이 달라졌다. 그저 투박하기만 하던 돌로 된 옥좌에는 이제 제법 그럴싸한 조각들이 붙었을 뿐만 아니라, 등받이 부분에도 쿠션이 생겨 부드러움을 보장했다.

매끄러운 손잡이 부분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용호는 루시아를 불렀다.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했다.

“사랑하는 고객님, 제가 고객님을 각별히 사랑하지만 그래도 이런 이른 시간에 방문하시면 사랑해드릴 수가 없답니다.”

시트리는 침대인지 소파인지 구분이 안가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쿠션에 몸을 거의 파묻고 있었다. 일전에 보았던 하늘하늘하면서도 속이 훤히 비치는 네글리제 차림이었고, 머리에는 성숙함 그 자체인 네글리제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수면 모자가 씌어져 있었다.

용호는 눈 둘 곳을 찾아 헤매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 너무 일렀나요?”

“미인은 잠꾸러기니까요.”

수면 모자를 벗은 시트리는 연달아 손가락을 튕겼다. 눈 깜박할 사이에 나타난 보라색 나이트가운이 시트리의 네글리제를 감쌌다. 시트리가 몸을 파묻고 있던 커다란 쿠션도 멋들어진 의자로 변했다.

어느새 옅은 화장까지 마친 시트리는 당당한 자세로 용호를 마주했다. 변신 과정을 훔쳐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용호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의논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시트리가 마몬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진즉부터 알고 있던 용호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뻔뻔하게 도움을 청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상 지난 번 경매 때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시트리 역시 그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지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이내 온화하게 웃었다. 등받이에 등을 깊이 묻으며 답했다.

“흠, 너무 대놓고 나오시는 것 같지만, 그게 또 고객님의 매력이니까요. 말씀해 보시죠.”

용호는 일단 숨을 한 번 골랐다. 어제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요점만 추려 나열했다.

아몬의 예속 사역마 화.

식탐의 왕의 심복인 십인중의 격퇴.

격노의 왕 측의 교류 요청.

이야기를 하나하나 경청한 시트리는 바로 답하는 대신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고개를 몇 번인가 끄덕이다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이야기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군요.”

식탐의 왕의 공격은 어느 정도 예상 범위 안에 있던 일이었다. 폭력의 왕의 군세가 보인 갑작스런 움직임이 그를 자극했으리라.

시트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격노의 왕의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갑자기 마몬 가에 호감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경매장에서의 만남 때문에?’

시트리는 쓰게 웃었다.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추억 때문이었다.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또한 가슴이 아렸다. 시트리는 어느새 다시 입술을 열었다. 추억을 가슴에 묻고 현재를 보았다. 새로운 탐욕의 왕에게 말했다.

“격노의 왕과의 동맹이 성사된다면 무척이나 이상적인 그림이 그려질 것 같네요. 그녀는 폭력의 왕과도 꽤나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으니까요.”

그 점에 관해서는 용호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폭력의 왕과 격노의 왕 모두 식탐의 왕 쪽으로 군대를 움직였는데, 막상 저들끼리는 조금도 경계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호에게 필요한 것은 짐작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였고, 시트리의 말이 확신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시트리의 말마따나 격노의 왕과 좋은 관계를 구축한다면 마계의 남부 전체가 연합하는 커다란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다.

다소 흥분한 것 같은 용호를 빤히 바라보던 시트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약간의 탄식이 섞인 한숨을 토했다.

“하여간, 좋지 못한 곳까지 닮을 건 없을 텐데.”

“시트리 씨?”

시트리는 용호보다 격노의 왕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았다. 누가 뭐라 해도 시트리는 ‘창립 당시부터’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한 자리를 맡아온 이였다. 사실상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도 상당한 정보력을 자랑했다.

만약 정말로 경매장에서의 만남이 이 교류의 시작이 되었다면.

재차 한숨을 토한 시트리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뭐, 다른 누구도 아닌 탐욕의 왕이시니 봐드리죠. 서비스는 이 정도로 하고… 그럼 잠시 거래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싱긋 웃은 시트리는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허공 위에 커다란 카탈로그가 나타났다.

용호는 시트리가 꺼낼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용호의 예상대로, 시트리는 카탈로그를 활짝 펼치며 말했다.

“전에 네크로멘싱이 가능한 언데드 계열의 사역마를 요청하셨죠? 적당한 사역마를 구했습니다.”

용호의 시선이 카탈로그에 나타난 사역마의 그림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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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을 거듭하고 또 거듭해서 실수되는 일이 없도록 해라. 물론 우리 전하의 영상 하나가 이미 모든 것을 제압할 터이지만 그래도 네 녀석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우리 전하의 명예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키르티무카가 엄한 얼굴로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가르디문디는 언제나와 같이 상큼한 얼굴을 한 채 키르티무카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친필 서신을 쓸 때 그러했던 것처럼 몇 번이고 영상을 고쳐 찍은 격노의 왕은 제법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밝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잘 부탁해. 이 동맹이 잘 성사되면 팔부중들은 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앞으로 있을 북부의 대전도 보다 적은 피해로 이겨낼 수 있을 거고.”

“사적인 일들도 해결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르디문디의 대답에 격노의 왕은 얼굴을 붉혔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또 다시 마음에 든 가르디문디는 깔깔 웃었다. 마몬 가의 가주와 정말 사적으로도 좋은 관계가 구축될 지는 의문이었고, 꼭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이왕지사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럼 드리타라슈트라 전하의 신실한 벗이자 충직한 수하인 저 가루라 일족의 가르디문디, 명을 수행코자 남부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잘 다녀와.”

격노의 왕이 마지막으로 가르디문디를 살짝 포옹했다. 가르디문디는 저 너머에서 소리 없이 표정만으로 잔소리를 잇고 있는 키르티무카에게 찡긋 윙크를 한 뒤 돌아섰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격노의 왕의 방 발코니에서 지면을 향해 뛰어내렸다.

마침 강한 바람이 불었다. 붉은 날개를 활짝 핀 가르디문디는 남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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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의 왕은 새벽에 자신의 궁을 나섰다.

마계의 붉은 하늘을 가르며 그는 과거를 추억했다.

험난한 나날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인 마계에서 최약자인 아귀로 태어났다는 것은 곧 누군가의 노리개나 한 끼 식사로 사라질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식탐의 왕 자신은 일어섰다. 같은 아귀들을 잡아먹어 힘을 키웠고, 조금씩 조금식 계단을 밟아나갔다. 마침내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식탐의 왕이 과거를 추억한 것은 그저 감상에 빠져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왕의 자리에 오른 이래 잊고 있었던 스스로의 본질을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십인중이 살아있었다면 식탐의 왕 자신을 말렸을지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너무 큰 위험을 동반했다. 격노의 왕과 폭력의 왕의 군세가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남부- 저 마몬 가의 힘은 현재 미지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움직여야만 했다. 위험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편한 길만을 택해 걸어왔다면 결코 지금의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으리라.

식탐의 왕은 지상에 착지했다. 고속 비행 마법의 여파가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숨을 크게 삼켰다. 마몬 가의 던전 입구와 그 위에서 알짱거리는 던전 미어 캣들을 눈에 담았다.

식탐의 왕은 두 손을 벌렸다. 여섯 왕들과의 대전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언데드 군단을 강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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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이어진 습격이 마몬 가를 진감시켰다.

루시아는 즉각 용호와 던전 상회 가상공간의 연결을 끊었다. 대신해서 식탐의 왕이 마몬가의 던전 입구 자체를 소멸시키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식탐의 왕은 홀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곁에는 십여 마리에 달하는 데스나이트들이 있었다. 노라이프 킹이라고도 불리는 강대한 뱀파이어 로드들 또한 다섯이나 있었다.

하나하나만을 논한다면 십인중보다 아래였다. 하지만 저들 사이에 식탐의 왕 본인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용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십인중과 싸웠을 때처럼 놈들을 바로 생명의 정원으로 유도해서 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겉의 마몬 가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적의 전력을 깎아내는 것이었다.

양쪽 모두 장단이 존재했다. 그리고 용호에게는 오랫동안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용호는 옥좌를 박차고 일어섰다. 예속 사역마들 모두가 스카자하의 저택에 모여 있는 상황이었기에 따로 소집령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용호는 차분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식탐의 왕의 기습 공격은 분명 허를 찌른 것이었지만, 이곳은 용호 자신의 던전이었다.

무익한 희생은 피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식탐의 왕을, 저 여섯 왕 가운데 하나를 온전한 상태로 맞이하는 것 또한 무모한 일이었다.

용호는 결정을 내렸다. 명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용호가 생명의 정원에 도착한 그 순간, 다급한 표정의 예속 사역마들을 마주한 그때.

[지면이 파괴됩니다!]

[마몬 가 1층과 탐욕의 미궁 1층 사이의 경계로가 파괴되었습니다!]

루시아의 보고는 눈앞의 상황을 묘사한 것에 불과했다. 생명의 정원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똑바로 나아가던 식탐의 왕은 정확히 한 지점을 파괴했다. 용호가 십인중을 유도해 생명의 정원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경사로가 존재하는 지점이었다.

생명의 정원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용호에게 주어졌던 두 가지 선택지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길만이 남았다.

천장에서 데스나이트들과 뱀파이어 로드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의 곁에서 거짓말처럼 언데드 군단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뱀파이어 로드들이 소환한 죽음의 군세였다.

그들 사이에서 식탐의 왕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주변의 냄새 모두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식탐의 후각.

탐욕이 소유코자 하는 것으로 주인을 인도한다면, 식탐은 먹고자 하는 것으로 주인을 인도했다.

용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식탐의 왕의 가슴 또한 거칠게 요동쳤다.

“과연.”

식탐의 왕이 말했다. 먼 거리에서나마 용호를 본 순간 확신했다. 어째서 자신이 그날 그 경매장에서 낯선 애송이 따위에게 시선이 팔렸는지를 이해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폭풍 전의 고요와도 같았다.

일초 혹은 이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식탐의 왕의 언데드 군단이 흉성을 드러냈고, 스컬 부대가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이 급히 자신들의 힘을 드러냈다.

사방 천지에서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용호 역시 식탐의 왕을 똑바로 노려본 채 실버 드래곤 아머를 소환했다.

은색의 갑주가 용호의 전신을 에워쌌다. 그 순간 식탐의 왕은 지면을 박찼다. 스스로 군단에서 뛰쳐나와 개인이 되었고, 그대로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생명의 정원은 드넓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실내의 공간이었다. 식탐의 왕은 빨랐다. 그는 결코 둔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눈 깜빡 할 사이에 생명의 정원을 반 이상 가로질렀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스컬은 스컬부대를 돌진시켜 언데드 군세를 막았다. 오필리아와 엘리고스는 즉각 야성을 일깨운 뒤 카타리나와 카이완의 뒤를 따랐다.

오히려 좋았다. 식탐의 왕이 스스로를 돌출시킨다면 이쪽으로서는 포위 공격하기 편해질 뿐이었다.

스컬과 티그리우스는 언데드 군세를 막을 생각을 했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은 용호와 식탐의 왕 사이의 공간에 몸을 날렸다. 실버 드래곤 아머가 용호를 완벽히 감쌌다. 스카자하가 급히 생명의 정원 가득히 생명의 힘을 발산했다.

그리고 그 때.

식탐의 왕이 두 번째 도약을 개시했다. 지면을 박찬 그 순간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포착했지만 무시했다. 그녀들에게 무언가 공격을 펼치지도 않았다. 오로지 용호만을 보았다. 포위 따위 두렵지 않다는 듯 오로지 가까워지는 것만을 생각했다.

식탐의 왕의 머리 위로 여섯 개의 뿔이 돋아났다. 순식간에 개방된 마력은 폭탄이라 해도 좋았다. 마력의 폭발이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덮쳤다. 그뿐만 아니라 오필리아와 엘리고스조차도 순간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식탐의 왕이 용호를 보았다. ‘탐욕’과 공명을 개시한 ‘식탐’을 잠시 잊었다. 그의 손에서 새로운 죄악을 갈구하는 신기 또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가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손에 넣은 힘.

그를 지금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또 다른 원동력.

일컬어 부르나니 경계의 마왕.

식탐의 왕이 권능을 발동시켰다. 세상 사이에 새로운 세상을 펼쳐놓았다.

그곳에는 오로지 하늘과 땅만이 존재했다.

생명의 정원도, 언데드 군단도, 사방에서 요동치던 강대한 마력의 폭풍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용호는 루시아와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마치 투기장에 들어왔을 때처럼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루시아만이 아니었다. 카타리나나 카이완 역시 느낄 수 없었다. 브리가다를 통해 항시 전해지던 예속 사역마들의 마력 역시 단절되었다.

갑자기 찾아든 고립감 속에 용호는 시선을 멀리하였다. 시선 끝에는 식탐의 왕이 서 있었다.

“나는 이것을 사냥터 혹은 식탁이라 부른다.”

식탐의 왕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여섯 개의 뿔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마력에 호응한 그의 신기가 짐승의 발톱과도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권능. 이곳에는 오직 사냥꾼과 사냥감만이 존재한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만이 존재하지. 그리고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먹어치우기 전에는, 죽이기 전에는 결코 해제되지 않는다.”

이 권능이 있었기에 군대 없이도 성장할 수 있었다. 식탐의 왕 자신이 충분한 힘을 갖추기 전까지 스스로를 숨길 수 있었다.

이 결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두 사람. 그렇기에 설사 상대방의 던전 안이라 해도 상관 없었다. 던전의 지원도, 예속 사역마들의 도움도 없었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사이의 순수한 힘의 대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식탐의 왕이 언데드 군단을 끌고 온 것은 그들과 함께 마몬 가를 제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마몬 가의 가주에게 권능을 발동시킬 수 있는 거리를 확복할 때까지- 그 때까지의 싸움을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너무나 손쉽게 권능을 성공시킨 식탐의 왕은 조급함을 잊었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사냥터에서 아늑함을 느꼈다. 그를 괴롭히던 조바심은 이제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먹음직스럽게 자라주었구나, 탐욕의 왕.”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충분히 영글도록 시간을 준 것은 정답이었다. 비록 폭력의 왕으로 인해 수확의 시기가 뒤틀렸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권능이 발동한 이상 십인중을 어떻게 이겼는지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던전의 지원과 예속 사역마들의 도움이 없는 이 땅에서 놈이 식탐의 왕 자신을 압도할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먹어주마, 탐욕의 왕.”

아귀의 본성이 드러나기라도 한 듯 식탐의 왕의 입술을 따라 침이 질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식탐의 왕은 연신 군침을 삼키며 마력을 발산했다.

용호는 그런 식탐의 왕을 보았다. 분명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마력이었다. 실로 왕에 어울리는 강함이었다.

그렇다, 왕.

왕에 어울리는 강함.

용호는 손을 뻗었다. 허공을 움켜쥐어 홍련의 마창을 손에 넣었다.

용호와 하나라 할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식탐의 왕의 권능에도 불구하고 용호와 함께한 존재.

아몬이 말했다.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로서, ‘진정한 왕’의 강함을 목도한 자로서 요청했다.

[보여주소서, 나의 주인이시여. 위대한 탐욕의 왕이시여.]

결코 들려서는 안 되는 이질적인 목소리에 식탐의 왕이 움찔했다. 하지만 무어라 반응을 보일 새가 없었다. 목소리에 대한 생각 따위는 눈앞에서 날려버릴 거대한 마력이 눈앞에서 폭발하듯 일어났다.

여섯 개의 뿔. 단순히 숫자만을 논한다면 식탐의 왕에게 뒤지지 않을 그것.

단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용호는 식탐의 왕이 당황으로 만들어진 그 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리지 않았다. 아몬을 거머쥔 채로 오른주먹을 가슴에 가져다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는 힘의 간극을 메우고자 마몬의 유산인 마신왕의 심장을 발동시켰다.

식탐의 왕의 말대로였다.

이 공간에서는 루시아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아몬을 제외한 다른 예속 사역마들의 마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스카자하의 지원 역시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눈앞의 식탐의 왕 역시 혼자였기에.

이 자리에 선 것은 둘 모두 죄악의 힘을 가진 왕이었기에.

마신왕의 심장의 발톱이 용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나씩 파고들 때마다 용호의 힘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발동한 발톱은 총 네 개. 지금의 용호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

사냥터 혹은 식탁.

어느 하나가 죽어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곳.

용호는 구태의연한 말을 내뱉지 않았다. 폭발적인 기세로 진각을 밟아 돌진했다.

오직 하나뿐인 사냥꾼이 되었다.

< 제 57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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