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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66화 (166/227)
  • < 제 57장 - 전투조류 >

    제 57장 - 전투조류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들은 저마다 관리하는 지역이 달랐다.

    그중 마계 북쪽, 오만의 왕의 영역을 담당하는 것은 ‘최강의 괴력’ 오로바스였다.

    때문에 식탐의 왕이 마계 동쪽을 담당하는 ‘최속의 날개’ 사마엘과 비밀 거래를 한 것처럼, 오만의 왕이 던전 상회와 비밀 거래를 하고 싶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북쪽의 담당자 오로바스와 마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만의 왕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넓고 커다란 방 안이었지만 앉아 있는 것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오만의 왕은 언제나처럼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자는 색색이 화려한 옷을 입었고, 그 옷만큼이나 요란한 외양을 자랑했다.

    자랑처럼 우뚝 세우고 있는 일곱 개의 뿔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끌었다. 벼슬이 돋은 수탉의 머리와 각기 다른 독을 품은 뱀으로 만들어진 두 다리 역시 기묘함과 신비함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 ‘최강의 마력’ 아브라삭스.

    그는 본래 마계 서쪽을 담당하는 자였다. 격노의 왕과 폭력의 왕이 그의 거래 대상이어야 했다.

    “선전 중이시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인 마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력의 강약이었다. 적어도 아브라삭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브라삭스의 이명인 ‘최강의 마력’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 던전 상회가 보유한 ‘최강의 마력’이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다섯 이사들 가운데서도 순수한 마력만으로 그와 대등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아브라삭스가 존대를 붙였다. 그는 결코 자신보다 마력이 약한 자에게 존대를 붙이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과 대등한 자에게만 존대를 사용했다.

    오만의 왕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브라삭스가 표한 아주 간단한 인사에도 기꺼움을 느꼈다.

    “질시의 왕은 신경질적인 노인네일 뿐이니까. 기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겠지.”

    질시의 왕을 쓰러트린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쓰러트리기 직전부터 펼쳐질 일들.

    “애석하게도 현시점에서 공개적인 도움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수탉의 머리를 가진 아브라삭스에게는 이렇다 할 표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왕관과도 같은 일곱 뿔 아래 자리한 두 눈 뿐이었다.

    오만의 왕은 구태여 그 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유롭게 답했다.

    “개의치 않는다. 던전 상회는 본래 그러한 곳이니까. 처음 만들어진 이후 쭉 그러했지.”

    마지막에 가서 목소리가 뒤틀렸다. 여유 속에 깊은 불쾌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 미묘한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브라삭스가 짐짓 놀란 눈으로 물었다.

    “던전 상회의 시작을 아십니… 이런, 우문이었군요. 이 마계에 던전 상회보다 오래된 곳이 하나 있다면, 그곳은 오직 오만의 왕가뿐일 터이니.”

    진정 실수인지, 아니면 ‘오만의 왕가’를 부각시키기 위한 연출인지 알 수 없는 아브라삭스의 말이었다.

    하지만 오만의 왕의 기분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던전 상회의 시작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던전 상회의 창립자가 어떤 생각으로 던전 상회를 만들었는지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 더욱 더 커져갔기 때문이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들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던전 상회의 창립자.

    그가 던전 상회를 건립한 이유.

    광오하기 짝이 없었다. 그 건방짐의 산물이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탐욕의 왕.’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 천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은 존재.

    그렇기에 ‘탐욕의 왕’이란 칭호는 마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가리켰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었다.

    오만의 왕은 불쾌함을 달랬다. 오만의 왕의 의중을 읽은 아브라삭스는 본격적인 거래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여섯 왕 가운데 하나와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의 비밀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거래는, 여느 비밀 거래보다 조금 더 특별했다.

    &

    ‘특이하네.’

    집사보 준의 안내에 따라 제법 호화로운 방에 자리한 가르디문디는 다소곳이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알현실이 아니었다. 대저 마왕의 알현실이라고 한다면 멋들어진 옥좌와 그 좌우에 도열한 가신들, 옥좌로부터 이어진 붉고 멋진 카펫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방은 달랐다. 일단 방부터가 작았고,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반질반질한 테이블을 끌어안듯이 반원 형태를 한 소파는 푹신푹신 편안했지만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고급 술집의 룸에라도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가르디문디는 다시 눈동자를 굴렸다. 붉고 화려한 벽지로 만들어진 벽 귀퉁이에 자리한 환기구를 향해서였다.

    납작하니 옆으로 긴 환기구의 격자무늬 뚜껑 너머로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네 개가 보였다. 하나는 어린 소녀의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새끼 던전 미어 캣의 것이었다.

    감시자는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뭐랄까, 호기심에 몰래 구경나온 꼬맹이란 느낌이었다.

    ‘설마 딸인가? 아니겠지?’

    가르디문디는 살짝 복잡해진 얼굴이 되어 다시 정면을 보았다. 다행히 적절하게도 집사보 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가르디문디가 들어왔던 바로 그 문이 열렸다. 가르디문디는 다시 한 번 알현실의 진실성 여부에 의구심이 생겼지만 급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은 마몬 가의 가주를 맞이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가르디문디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자연스럽게 마몬 가의 가주와 눈이 마주치자 팔부중의 예법대로 합장을 취했다.

    “격노의 왕 전하의 사자, 가루라 일족의 가르디문디가 마몬 가의 가주께 인사 올립니다.”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노독이 쌓이셨을 터인데 편히 앉으시죠.”

    순간 하대와 존대 가운데서 고민한 용호는 무난한 존대를 택했다. 용호의 존대가 의외였는지 가르디문디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빙긋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용호는 그런 가르디문디의 맞은편에 놓인 1인석에 앉았다. 용호의 뒤를 따라 줄줄이 들어선 카타리나와 카이완, 오필리아 세 사람은 각각 용호의 등 뒤에 섰다.

    ‘호색한이라는 건 역시 진짜였나?’

    항시 여자를 줄줄이 달고 다닌다더니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취향도 참 골고루네.’

    냉정한 표정의 다크 엘프, 잿빛 머리칼을 가진 표독스런 미녀, 성숙한 느낌을 물씬 풀기는 레드 데몬 여인.

    그중에서도 특히 잿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평소라면 시비거냐며 한바탕 했을 가르디문디였지만 이곳은 마몬 가였고, 현재 자신은 격노의 사자로서 찾아온 상황이었다. 애써 시선을 무시한 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해온 선물을 진상했다.

    “격노의 왕께서 직접 담그신 암리타입니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우호의 선물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필리아가 용호를 대신해 기쁜 얼굴로 암리타가 든 황금빛 상자를 받았다. 아무래도 우려와 달리 이야기가 좋게 풀릴 것 같았다.

    “격노의 왕께서는 마몬 가와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찮은 저의 만 가지 말보다는 이 서신 한 장에 담긴 한 줄의 문구가 낫겠지요. 격노의 왕께서 친필로 작성하신 서신입니다.”

    직접 담근 술에 이어 이번엔 직접 쓴 편지였다. 카이완의 표정이 좀 더 표독스러워진 것과는 반대로 오필리아는 더욱 기쁘게 웃었다. 암리타가 든 황금 상자를 카타리나에게 넘긴 뒤 다시 앞으로 나가 서신을 받아들었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용호에게 내밀었다.

    용호는 숨을 한 번 크게 골랐다. 간다르바는 향기가 좋은 종족이라고 하더니, 서신에서 은은히 새어나오는 향기가 실로 굉장했기 때문이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용호는 겉봉을 뜯고 서신을 꺼냈다. 청초한 외모에 어울리는 부드럽고 온화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용호가 서신을 다 읽는 데 걸린 십여 초의 시간.

    모두가 긴장한 그 시간의 끝에서 재차 서신을 접은 용호가 가르디문디에게 물었다.

    “답신을 쓸 동안 잠시 기다려줄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용호는 짐짓 느린 걸음으로 도박장 VIP실을 나섰다.

    “혹시나가 역시나였어! 역시 그날 눈이 마주쳤을 때 뭔가가 있었던 거야!”

    도박장 VIP 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VIP 휴게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카이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알현실도 없는 마당에 VIP 도박장과 휴게실이 있는 이유에 대해서 사유하고 싶어진 용호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카이완의 반응을 애써 무시한 뒤 측근들과 긴급 회의를 개시했다.

    격노의 왕이 보낸 서신은 제법 직접적인 단어와 문장들의 연속이었다.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마몬 가와 친해지고 싶습니다. 우리 작은 교류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볼까요?’

    “역시 전투광이라는 풍문과는 달리 상냥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오필리아가 제일 먼저 말했다. 연이어 티그리우스 역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서신 내용도 정중하고 불평등한 요구도 없군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이 좀 걸리긴 합니다만, ‘교류를 시작해보자’라는 면에서는 딱 좋은 시작인 것 같습니다.”

    격노의 왕과의 동맹은 마몬 가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남부 공백지에서 사방의 적을 상대로 싸우던 시절과는 달랐다. 여섯 왕과 같은 무대에 올라선 이상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군이 필요했다.

    사실상 가주가 된 이래로 처음 받은 ‘동맹 신청’이었기에 용호 역시 꽤 흥분해 있었다.

    머릿속으로 격노의 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이쪽도 교류를 환영한다고만 쓰면 되려나?”

    일단 친필 서신을 받았으니 이쪽도 용호의 친필 서신을 전하는 것이 예의에 맞았다.

    오필리아가 답했다.

    “식탐의 왕과 사실상 대립이 시작된 상황인 것을 알리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아직은 시기상조일 것 같기도 하군요.”

    “식탐의 왕은 오늘 전투로 인해 예속 사역마를 거의 다 잃었습니다. 타격이 심대할 터이니 한 동안은 마몬 가를 어찌하지 못할 겁니다. 격노의 왕과 어느 정도 우애를 다질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티그리우스가 오필리아의 말을 보충했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말했다.

    “다행이다. 적이 아닌 우군이 될 것 같으니.”

    식탐의 왕과 싸움을 시작한 지금 새로운 적이 생기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런데 이때 마침 다른 왕이, 그것도 식탐의 왕과 대립각을 세우는 왕이 먼저 손을 내밀어왔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격이었다.

    “그런데 가주 님, 우리도 뭔가 선물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카타리나가 품에 안은 황금빛 상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서신과 마찬가지로 상장에서도 극상의 향기가 진동했다.

    오필리아가 옳은 말이라는 듯 바로 거들고 나섰다.

    “격노의 왕이 선물로 준 암리타는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불로장생의 영약이라고도 불리는 값비싼 물건이죠. 더욱이 간다르바의 수장인 격노의 왕이 직접 만들었다면 그 가치는 실로 굉장할 겁니다.”

    “으음.”

    대단한 선물을 받은 것은 기뻤지만 이쪽에서도 그와 대등한 물건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너무 격이 맞지 않는 물건을 보냈다가는 좋게 시작한 격노의 왕과의 교류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다.

    오필리아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스트라바디의 컬렉션 가운데서 괜찮은 것을 몇 개 추려보겠습니다. 격노의 왕이 생각하는 ‘마몬 가’는 몰락에서 다시 부활을 시작한 과거의 명문가이니… 성의만 보일 수 있다면 충분할 겁니다.”

    한 마디로 저쪽에서도 그리 비싼 선물을 기대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카타리나가 다소 소심하게 손을 들며 말했다.

    “어… 거기에 치킨을 더하는 건 어떨까요?”

    “어?”

    용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벅였지만 예속 사역마들의 반응은 달랐다. 엘리고스가 가장 먼저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군요. 치킨은 우리 마몬 가의 특산품이기도 하니까요.”

    “아니, 잠깐. 특산품?”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티그리우스가 엘리고스에게 동의했다.

    “보존 마법을 사용하면 운송에 걸리는 시간도 문제없을 겁니다. 가주 님께서 직접 튀기신 치킨-이라고 하면 존중의 의미가 담기기에도 충분할 것 같군요.”

    “저기, 이거 왕들 간의 교류 아니었나?”

    오필리아가 까르르 웃었다.

    “비밀 교류인데다가… 저쪽은 아직 가주 님께서 탐욕의 왕이라는 사실을 모르니까요. 그리고 저쪽의 말대로 차근차근 교류를 시작해보자는 뜻도 되고요. 저도 엘리 오라버니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치킨도 선물에 포함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호평을 듣자 카타리나는 귀와 꼬리를 파닥이며 우쭐함을 드러냈다.

    카이완이 홀로 혼란스러워 하는 용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부심을 가져. 네 치킨은 최고니까.”

    “스컬스컬.”

    마지막은 어쩐지 모를 스컬의 동의.

    용호는 결국 예속 사역마들의 뜻에 따라 앞치마를 둘렀다.

    &

    “일등 신랑감입니다.”

    < 제 57장 - 전투조류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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