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65화 (165/227)
  • < 제 56장 #2 >

    가르디문디에 대한 키르티무카의 평은 언제나 간결했다.

    ‘행실이 경박하고 문란하며 지나치게 건방짐.’

    결코 호평이라 할 수 없었지만 가르디문디는 키르티무카의 평에 이렇다 할 불만을 갖지 않았다.

    셋 모두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르디문디가 뛰어난 정찰병인 동시에 전령이란 사실 역시 사실이었다. 그녀는 격노의 왕의 단 네 명 뿐인 예속 사역마 가운데 하나였고, 가루라뿐만 아니라 팔부중 가운데서 가장 빠르고 멀리 날 수 있는 능력자였다.

    키르티무카는 가르디문디의 성격을 정확히 평가했던 것처럼 능력 역시 제대로 평가했다. 그랬기에 가르디문디를 볼 때마다 행실에 대한 잔소리를 퍼부을지언정 직위를 해제해야 한다거나 예속 사역마에서 빼야한다 같은 과격한 주장은 하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무른 걸지도.’

    문득 키르티무카의 얼굴을 떠올린 가르디문디는 공중에서 홀로 키득거렸다.

    가르디문디는 언제나처럼 홀로 비행 중이었다. 격노의 왕의 궁전에서부터 마몬 가가 소재한 세계의 끝- 엔카트로 패그니움까지는 실로 어마어마한 거리가 가로 놓여 있었지만 ‘대붕의 날개’를 가진 가르디문디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저 몇 시간이면 가볍게 주파할 수 있는 거리에 불과했다.

    ‘응? 뭔 일 있었나?’

    하늘을 누비는 자답게 가르디문디는 무척이나 뛰어난 시력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호들갑을 떨고 있는 마몬 가의 던전 미어캣들이 보였다.

    ‘누가 먼저 오기라도 했나?’

    혹시라도 침입의 흔적 같은 것이 있나 해서 가르디문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남부 공백지를 일통한 마몬 가를 이제와서 공격할만한 세력이 어디에 있나 싶기도 했지만 매사에 ‘절대’는 없는 법이었다.

    비상한 관찰력의 소유자인 가르디문디였지만 무언가 커다란 생물이 착지한 흔적 외에는 달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르디문디는 바로 착지하는 대신 허공을 맴돌며 고민했다. 가르디문디 자신의 방문이 격노의 왕과 마몬 가의 ‘첫 교류’가 될 터이니 신중해야만 했다.

    ‘아 몰라. 그냥 가. 어차피 던전 미어 캣들도 날 본 거 같고.’

    키르티무카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귀찮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인 가르디문디는 그대로 지상에 착지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법보 변재천- 사라스바티의 주머니를 열어 주머니보다 수십 배는 더 커다란 깃발을 뽑아들었다.

    지국천- 드리타라슈트라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은 참으로 거대했다. 깃대의 길이만 하여도 5미터가 훌쩍 넘었고, 검정과 초록이 뒤섞인 깃발은 사람을 몇이나 가릴 법 했다.

    자연 깃대와 깃발 합쳐 수백 kg이 넘었지만 가르디문디는 마치 부지깽이라도 다루듯 한 손으로 깃발을 땅에 꽂았다. 붉은 비늘 갑옷의 가슴 부위가 크게 오르내릴 정도로 숨을 들이쉰 뒤 당당하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 전하의 사자, 가루라 일족의 가르디문디가 마몬 가의 가주님을 뵙기를 청하는 바이오!”

    당연하게도 바로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가르디문디는 다시 한 번 소리치는 대신 키르티무카의 평이 무색하게도 얌전히 마몬 가의 대응을 기다렸다. 던전 입구 바로 앞이니 던전 미어 캣들 뿐만 아니라 던전의 영혼 역시 가르디문디 자신을 보았을 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격노의 왕’의 이름을 언급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뭐가 되었든 반응이 돌아올 터였다.

    가르디문디의 생각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마몬 가의 던전 입구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록빛 피부를 가진 남녀 네 명과 커다란 마차, 십여 마리쯤 되어 보이는 한 무리의 늑대들이었다.

    가르디문디는 눈앞의 늑대들 가운데 몇 마리가 낯이 익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엠브리오가 부리던 늑대들 같았다.

    ‘저치들은 대체 무슨 종족이지?’

    가르디문디의 초록빛 눈동자는 어느새 늑대들에서 초록 피부를 가진 남녀, 그중에서도 홍일점인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정장을 깔끔하게 갖춰 입은 여인은 도통 종족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검은 생머리가 찰랑거리는 얼굴은 제법 미인 축에 속했다. 귀는 마치 고블린이나 오크의 것처럼 그 끝이 뾰족했고, 피부 역시 두 종족과 같은 초록색이었다.

    오크는 아니었다. 오크 특유의 엄니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오크라고 하기에는 체구가 지나치게 가녀렸다.

    ‘고블린은 절대로 아니고.’

    몇 가지 종족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거다 싶은 종족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머지 세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 끝이 뾰족하고 피부가 초록색에 전부 인간형이라는 것 외에는 꽤나 천차만별이었다. 마차 마부석 위에 올라타 있는 자는 여간한 오크 뺨 때릴 정도로 덩치가 좋았고, 여인 뒤에 선 키가 큰 자는 마치 엘프처럼 몸이 가늘고 길었다. 다시 그 옆에 선 자는 그냥 평범함 그 자체였지만 워낙 이질적인 둘 사이에 서 있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특이해 보였다.

    가르디문디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뛰어난 정찰병답게 눈앞에 본 사실 그대로를 머릿속에 저장한 뒤 다음으로 넘어갔다.

    가르디문디가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검은 정장 차림의 여자가 대표로 예를 표했다.

    “마몬 가의 집사보 준입니다. 가주 님께서 가르디문디 님의 알현요청을 수락한다 하셨습니다. 마차에 오르시죠.”

    검은 정장의 여자- 준 바로 뒤에 서 있던 사내 둘이 자연스럽게 마차 문을 열었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창문 하나 없는 마차라는 사실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외인을 던전에 들일 때 흔히들 하는 방법이었다.

    “마몬 가 가주 님의 배려에 감사하는 바이오.”

    시원한 미소로 화답한 가르디문디는 격노의 왕의 깃발을 거둬 다시 사라스바티의 주머니에 갈무리했다. 마술 같은 광경에 준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순간 입을 벌리며 감탄을 토했다.

    ‘다들 순진하네.’

    다시 키득 웃은 가르디문디는 바로 마차 위에 올랐다. 제법 아늑했지만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창문 하나 없는 답답한 공간이었다. 벽도 꽤 두꺼운 것이 방음도 확실해 보였다.

    가르디문디가 자리를 잡고나자 집사보 준과 그 뒤에 서 있던 사내 둘이 함께 마차에 올랐다.

    ‘이것 봐라. 생각보다 더 하는데?’

    마차가 출발한 직후, 가르디문디는 자신의 방향감각이 어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발산시킨 마력 역시 마차 주변을 맴돌 뿐 그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이제는 용호의 것이 된 늑대 무리가 발산하는 특수한 마법장 때문이었다. 늑대 무리가 굳이 마차와 함께 나타난 것은 준을 비롯한 고블린 레인져 사인을 호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과 같이 마차 안의 존재가 마차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차는 늑대들의 걷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기동했다. 방어 구역 자체를 확장시킨 마몬 가인만큼 가르디문디를 생활 구역까지 인도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곧 용호가 생각할 시간이기도 하였다.

    “저거 대체 왜 온 거지?”

    카이완이 일단 삐딱하게 말했다.

    급히 잠에서 깨어난 오필리아가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수행단을 이끌지 않고 혼자 온 것을 보면 비밀 특사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 그러니까 왕들에게 지금의 접촉을 감추기 위해서요.”

    “흠.”

    제법 타당한 이야기였다. 티그리우스가 말을 보탰다.

    “아마도 동맹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몬 가는 이제 당당한 남부 공백지의 패자입니다. 아직 공백지 전체의 힘을 집결시키지는 못했지만, 격노의 왕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동맹 후보로 보일 것입니다.”

    “격노의 왕은 우리 마몬 가 입장에서도 상당히 괜찮은 동맹 대상입니다. 그녀 역시 현재 식탐의 왕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으니까요.”

    오필리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구경만 하던 스카자하가 빼꼼 손을 들었다.

    “저기,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암살 시도 가능성은 없을까?”

    식탐의 왕의 공격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도 있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격노의 왕 입장에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식탐의 왕과는 경우가 다르기도 하고요.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오필리아는 이내 얼굴 가득 자랑스러움을 담아 말을 맺었다.

    “지금의 가주 님이시라면 걱정 없고요.”

    식탐의 왕의 예속 사역마 일곱을 두려움에 떨게 한 탐욕의 왕이었다. 스스로를 가르디문디라 밝힌 가루라가 결코 범속한 이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용호를 어떻게 해본다는 것은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오필리아가 정말 단순히 용호의 강력함 하나만을 믿고 안일한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용호에게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아몬이 있었고, 알현실에도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대동할 터였다. 오필리아 자신도 아무런 대비 없이 용호가 가르디문디를 만나는 상황을 연출할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었다.

    “격노의 왕이 정말로 동맹을 요청한다 할지라도 미리 생각해둘 것이 있습니다. 어떤 식의 동맹을 원할 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동맹에 관한 건으로 되돌린 티그리우스가 연이어 말했다.

    “겉으로 보이는 객관적인 지표만으로 본다면 격노의 왕의 세력은 우리 마몬 가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대등한 동맹 관계가 아닌 사실상 속국 같은 관계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현실성이 있었다. 힘이 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공평한 동맹을 제의하는 것은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현실은 훨씬 더 비정하고 냉혹한 법이었다.

    “현재 마몬 가는 식탐의 왕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시작한 상태입니다. 격노의 왕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여부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티그리우스가 말을 맺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용호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최악의 상황은?”

    “격노의 왕과도 적이 되는 상황입니다.”

    오필리아가 즉답했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머지는 저쪽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자.”

    머릿속으로나마 대강 지침을 정한 용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따라 일어서려던 엘리고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거지? 설마 1층에 있는 마왕의 방에?”

    아무리 그래도 외인을 표면의 마몬 가도 아닌 탐욕의 미궁 1층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티그리우스가 얼결에 답했다.

    “보통은 따로 마련해둔 알현실 같은 곳으로 데려가기 마련입니다.”

    “우린 알현실 같은 거 없잖아.”

    티그리우스가 정말 그러냐는 눈으로 엘리고스를 돌아보았다. 엘리고스는 무척 난처한 얼굴이 되더니 급히 용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방이 적인 상황이라 이렇게 빨리 알현실이 필요하게 될 지 몰랐습니다.”

    “아니, 지금 추궁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아무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엘리고스는 바로 대답하기에 앞서 마찬가지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필리아와 시선을 교환했다. 약간은 어색하게 답했다.

    “도박장 VIP 룸입니다.”

    &

    식탐의 왕의 친위대인 십인중은 여덟 마리의 예속 사역마와 두 마리의 일반 사역마로 구성되어 있었다.

    북부 국경 지대에서 각기 군대를 이끌고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의 전쟁을 주시하던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는 식탐의 왕의 소집령을 받고 급히 공간을 뛰어넘었다. 식탐의 왕이 자신의 영지 내에 미리 설치해둔 시설들을 통한 것이었기에 불과 수십 여 분만에 사실상 식탐의 왕의 영지 전체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소집령이었기에 표범 머리의 악마 아비고르와 새하얀 일각수의 머리를 가진 암두시아스는 적잖게 당황했다. 자신들을 제외한 십인중들이 이미 한 차례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평소 이상으로 두려움에 가득 찬 아프사라스의 모습을 보니 무언가 왕을 진노케할만한 사건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식탐의 왕이 기다리고 있을 알현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모를 불길함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는 십인중에 속할 만큼 충직한 자들이었다. 주인의 진노보다도 주인을 진노케한 사건에 관심을 보이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비고르가 주인님을 뵙습니다.”

    “암두시아스가 주인님을 뵙습니다.”

    반투명한 천들로 천장과 벽, 바닥이 꾸며진 넓은 방 끝에는 식탐의 왕이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욕정을 풀기라도 했는지 거의 헐벗은 상태였고, 방 여기저기에 반라 혹은 전라의 아프사라스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식탐의 왕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신음하는 아프사라스를 바닥에 던진 뒤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라.”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는 불길한 마음을 억누르고 식탐의 왕에게 다가갔다. 식탐의 왕은 그런 두 사람에게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가볍게 한 순배가 돌자마자 말했다.

    “아비고르. 그리고 암두시아스. 너희 둘을 나의 예속 사역마로 삼겠다.”

    그야말로 폭탄선언이었다.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는 여러 가지 의미가 뒤섞인 놀라움 속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예속 사역마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왕께서 지금 자신들 두 사람을 예속 사역마로 삼는다 말하셨다.

    예속 사역마 자리에 ‘공석’이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어찌하여 공석이 생긴 것일까.

    의문과 더불어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치밀어올랐다.

    그간 얼마나 원했던 예속 사역마의 자리였던가. 예속 사역마가 아님에도 십인중 자리에 오른 두 사람이었다. 예속 사역마가 되어 식탐의 왕의 힘을 직접적으로 나눠받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힘과 권력 양쪽 모두에서 말이다.

    식탐의 왕은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말을 끝내자마자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커다란 손을 올려 의식을 단행했다.

    고작해야 1분 남짓한 시간.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는 완전히 새로워진 자신들을 느꼈다. 커다란 환희와 쾌락 속에 포효했고, 몸 안에서 용솟음치는 강대한 마력에 전율했다.

    정신적인 열락 속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의 귓가에 다시 식탐의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탐의 왕은 차분히 말했다.

    “아직이다. 너희에게 줄 것이 조금 더 남아 있다. 눈을 감고 긴장을 풀도록 해라. 마력을 가라앉혀라.”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는 곧장 왕의 말을 따랐다. 눈을 감고 용솟음친 마력을 억지로나마 가라앉혔다. 이제 막 예속 사역마화로 인한 강화가 이뤄진 상태인 터라 작업을 모두 끝마치는 데는 거의 십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마력을 가라앉혔다.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는 평온한 마음이 되어 식탐의 왕이 말한 '다음'을 기다렸다.

    식탐의 왕은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가슴으로 옮겼다. 단숨에 두 사람의 가슴을 찢고 심장을 뽑아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격통을 느낀 순간 이미 일이 끝나 있었다.

    “왕…이… 시여?”

    아비고르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암두시아스는 왈칵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식탐의 왕은 그런 두 사람 대신 손에 들린 펄떡펄떡 뛰고 있는 심장을 쳐다보았다. 정수를 가득 머금은 그것을 통째로 먹어치웠다. ‘식탐’의 힘을 발동시켰다.

    부족했다.

    식탐 덕분에 예속 사역마가 죽었을 때 잃게 되는 마력보다 예속 사역마 화로 인해 강해진 두 사람을 먹어치워 손에 넣은 마력이 훨씬 더 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함을 느꼈다. 예속 사역마 여덟을 연달아 잃은 손실은 그만큼이나 컸다.

    식탐의 왕은 손을 뻗었다. 강인한 생명력 덕분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비고르와 암두시아스를 산채로 씹어먹었다. 다시 한 번 발동한 '식탐'의 힘은 식탐의 왕이 먹어치운 것들로부터 아주 작은 힘까지 모두 이끌어내 식탐의 왕을 강화시켰다.

    식탐의 왕은 이제 십인중 전원을 잃었다.

    폭력의 왕과 격노의 왕은 건재했고, 북부의 전쟁은 아무리 길어도 몇 달 안에 마무리가 될 터였다.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흘려보냈다가는 어처구니없게도 식탐의 왕 자신이 ‘최약체’가 되어 잡아먹히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해내야만 했다.

    아비고르의 피를 마시며 식탐의 왕은 생각했다. 암두시아스의 뼈를 부수며 결단을 내렸다.

    칠대죄악이란 너무나 강렬한 빛에 짓눌려 잊히기 쉬웠지만, 각각의 왕들에게는 저마다가 갖춘 마왕으로서의 권능이 있었다.

    식탐의 왕 자신의 ‘권능’이라면 아직 이 판도를 뒤엎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힘을 회복해야만 했다.

    여섯 왕의 자리에 오른 뒤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권능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권능이 쇠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찮은 아귀이던 시절부터 자신을 지탱해준 권능이 이번에도 역전의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기에 식탐의 왕은 주저하지 않았다. 십인중 가운데 겨우 살아남은 둘을 제손으로 죽여가면서까지 힘을 회복시켰다.

    식탐의 왕이 식사를 계속했다. 충직한 수하들을 먹어치웠다.

    < 제 56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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