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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64화 (164/227)
  • < 제 56장 - 결단 >

    제 56장 - 결단

    격전의 흔적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불타버린 밀밭이 다시 황금빛 물결로 출렁거렸다. 부서지고 파헤쳐진 지형들이 복구되었고, 피 냄새가 섞였던 바람은 다시 맑음을 되찾았다. 호숫 물도 같았다. 조금의 붉은 기운도 없이 이전처럼 맑고 푸르렀다.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구되지 않은 것은 경사로를 완전히 틀어막았던 거목들이었다. 이것들은 오히려 부서지고 남은 것들조차 다시 땅 속으로 사라졌다. 생명의 정원을 ‘원상태’로 되돌린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생명의 정원은 외형에 그치지 않고 그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되찾았다. 인공 태양을 감싼 푸른 하늘 아래 바람이 시원했다.

    하지만 격전 전으로 돌아간 것은 생명의 정원 그 자체만이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스컬 부대가 생명의 정원 곳곳에 널려 있었다. 스컬 부대가 처음 상대했던 비프로스트의 언데드 군단 전원이 생명의 정원의 양분이 된 것에 비하자면 말끔한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적잖게 손상된 것만은 분명했다.

    생명의 힘으로 치유할 수 없는 언데드라는 점이 특히 치명적이었다. 이번 전투로 인해 아예 영원한 안식을 맞이한 부대원들도 제법 되었다.

    부대 단위 전투력만이라면 마계 전역에서도 이름을 떨칠 스컬 부대를 상하게 한 것은 식탐의 왕의 예속 사역마들과 강대한 괴수 옹골리언트였다.

    바닥에 큰 대자로 뻗은 용호는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자세로 죽은 옹골리언트의 시신이 거슬렸지만 저 커다란 걸 치우고 자시고 할 여력도 없었다.

    말 그대로 격전이었다. 식탐의 왕의 예속 사역마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용호 자신과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이 급격한 성장을 거듭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마력 역시 십인중 - 사브나크가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하는 것을 들었다. -과 호각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갖추고 살아온 세월이 달랐다.

    무술에서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다루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한 통제를 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 자신의 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했다. 팔 길이는 얼마나 되고, 어느 정도 힘을 낼 수 있고 등등 말이다.

    마력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커진 힘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소위 말하는 천재들뿐이었다.

    ‘나 좀 천재인듯.’

    아무도 못 듣게 혼자 시답잖은 농담을 한 용호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 중에는 전투 센스가 좋은 자들이 많았다. 거의 대부분 갑자기 커진 힘을 무척이나 잘 유용해 주었다.

    십인중은 전멸했다. 반면에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 중에서는 죽거나 크게 다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격전이 분명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만들어진 것은 용호 자신만의 힘이 아니었다.

    ‘생명의 정원.’

    처음 엠브리오에게 식탐의 왕에 대한 경고를 받았을 때부터 생각해온 일이었다.

    식탐의 왕의 군세에게 공격을 받으면 최종적으로 어디에서 싸울 것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정원뿐이었다. 이후 탐욕의 미궁을 몇 층이나 더 확보했지만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스카자하의 생명의 힘이 회복시키는 것은 생명의 정원만이 아니었다. 스카자하는 전투 중인 예속 사역마들의 부상을 실시간으로 회복시켰다.

    ‘무한 힐 받았다 이거지.’

    십인중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싸움터였을 터였다.

    실시간으로 손상된 체력과 부상을 회복하는 적. 더욱이 한두 명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적 전원이 그런다.

    초재생능력을 갖춘 엠브리오와 싸워본 용호는 저 사실 자체가 얼마나 막대한 정신적 박탈감을 낳는지를 잘 알았다. 생명의 정원이 엠브리오의 초재생능력만큼의 회복속도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십인중이 느낀 충격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으리라.

    다시 숨을 고른 용호는 신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눈높이가 높아져서 그런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모두가 지친 가운데 홀로 건재한 스컬이 스컬 부대에게 명령해 십인중의 시신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있었다. 스켈레톤 워리어 몇 마리가 반쯤 실신 상태에 빠진 오필리아와 엘리고스를 스카자하의 저택으로 나르는 모습도 보였다.

    “스컬컬!”

    뒷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스컬이 껄껄 웃었다. 언데드라는 특성 때문에 스카자하의 보조를 거의 받지 못했음에도 이렇다 할 큰 부상 없이 십인중과의 전투를 마친 스컬이었다. 어쩌면 진짜 전투 천재는 스컬일지도 몰랐다.

    “용 뼈가 좋긴 좋구나.”

    “스컬스컬.”

    용호의 농담에 마주 웃은 스컬은 다시 스컬 부대를 부리는데 집중했다. 용호는 그런 스컬이 모아놓은 십인중의 시신들 앞에 섰다.

    솔직히 말해 먹을 것이 별로 없었다.

    정수 흡수는 자신과 대등하거나 더 강한 적을 흡수할 때 외에는 터무니없이 비효율적인 것이 보통이었다.

    십인중의 마력 평균치는 대략 뿔 다섯 개 정도.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용호 자신보다 약했다. 더욱이 예속 사역마들은 죽은 이후가 문제였다.

    ‘정수가 약해졌어.’

    예속 사역마들은 죽는 순간 가주와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단절은 가주에게만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속 사역마에게 치명적인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십인중은 죽음의 순간 식탐의 왕의 힘을 잃었다. 예전의 용호라면 모를까, 아몬의 주인이 되어 탐욕의 왕으로 거듭난 지금의 용호에게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태반이 언데드란 말이지?’

    십인중 일곱 가운데 무려 다섯이 언데드였다.

    이쯤되면 식탐의 왕이 언데드 애호가가 아닌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지만 용호는 보다 합리적인, 그리고 식탐의 왕이라면 할 법한 생각을 떠올렸다.

    ‘고의적이야.’

    죽음의 특성을 가진 정수는 일반적으로 흡수가 어려웠다. 어설프게 흡수했다가는 득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식탐의 왕은 ‘예속 사역마가 적에게 패했을 경우’를 고려한 것이 분명했다. 적에게 이로운 짓은 조금도 하지 못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전부 ‘일반적인 가주’가 작금의 상황을 마주했을 때 이야기였다.

    용호 자신은 탐욕의 왕이었다. 욕심쟁이였고, 눈앞의 재물을 조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용호가 손을 펼치자 탐욕이 발동했다. 십인중 가운데 여섯의 시신으로부터 정수가 추출되었다. 저마다 다른 색을 내며 떠오른 빛 덩이들은 한데 엉켜 회전하기 시작했고, 이내 커다란 빛 덩이 하나가 되어 용호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용호의 전신이 순간 요동쳤다. 하지만 단 한 번에 불과했다. 용호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고, 이내 십인중의 정수를 완벽하게 집어삼켰다.

    탐욕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을 ‘소유욕’은 죽음의 특성을 가진 정수조차 자신의 것으로 하였다.

    작은 정수들을 하나로 묶어 보다 크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용호는 심호흡을 했다.

    조금이지만 마력이 성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뿔 여섯 개부터는 마력의 성장이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였다.

    ‘정수 그 자체보다는 십인중이었기 때문인가.’

    흡수 대상이 가지고 있던 경험을 비롯한 많은 것들.

    용호는 머리를 비웠다. 시선을 옆으로 살짝 돌려 해골 형상의 리치인 비프로스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고민이군.’

    비프로스트를 처음 보자마자 한 생각은 스컬의 합체 진화의 대상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자고 하니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일단 첫 번째 문제는 비프로스트의 자아가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용호는 합체 진화 때마다 스컬의 자아를 보존하기 위해 합체 진화의 재료가 되는 사역마들을 엄선해 왔다. 아예 자아가 없거나, 있어도 희박한 대상만을 골랐고, 그나마도 오필리아의 정신마법으로 자아를 사실상 제거한 뒤에야 합체 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비프로스트는 지금까지의 합체 진화 재료들과는 달랐다. 그는 강력한 리치였고, 당연히 제대로 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식탐의 왕에게 충분한 타격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십인중 전원을 죽여야만 했다. 예속 사역마가 죽었을 때 약해지는 것은 가주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식탐의 왕은 이번 전투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맛봤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제까지 용호가 ‘죽은 사역마’를 재료로 합체 진화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용호는 다시 한 번 비프로스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죽은 언데드에게 ‘죽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우스웠지만 어찌되었든 비프로스트는 죽었다.

    덕분에 첫 번째 고민이었던 비프로스트의 강한 자아는 해결이 되었다. 아예 말끔히 날아갔으니 말이다.

    두 번째 고민인 식탐의 왕의 약화 역시 이뤄졌을 것이 분명했다.

    ‘한 번 시도해 볼까?’

    마력이 강해지면서 진화의 권능 역시 강해졌다. 지금이라면 죽은 사역마를 재료로 한 합체 진화 역시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할 거다, 나의 주인이여.]

    “아몬?”

    지금까지 침묵하던 아몬이 돌연 목소리를 꺼냈다. 어쩐지 모르게 다소 격앙된- 정확히 말해 감정적이 된 목소리였다.

    참으로 오랜 만에 제대로 된 힘을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아몬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아몬이 계속해서 말했다.

    [각 사역마 별로 단 한 번씩이긴 하지만, 진화의 권능은 사역마와 마법 장비를 합체 진화시키는 것까지 가능하다.]

    용호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아몬이 이야기해준 진화의 권능의 새로운 가능성이 놀라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가 좀 더 컸다.

    “설마?”

    [그렇다, 나의 주인이여.]

    [위대한 탐욕의 왕 마몬께서도 진화의 권능을 가지고 계셨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호는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몬이 마몬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아몬이 근래 들어 자주했던 말. 용호 자신이 마몬의 진실을 들을 자격을 거의 다 갖추었다던 그 말.

    [너무 조바심을 낼 것 없다, 주인이여.]

    [주인도 의도한 바이겠지만, 식탐의 왕은 지금 극한 혼란에 빠져 있을 것이다. 예속 사역마들이 갑자기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 ‘과정’을 전혀 모르니 말이다.]

    [식탐의 왕으로서는 자신의 예속 사역마들이 격전 끝에 죽었는지, 압살 당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을 거다. 그리고 그런 불확실함은 식탐의 왕의 머릿속에서 괴물로 자라날 것이 분명하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식탐의 왕을 억제하겠지.]

    [지금 당장은 푹 쉬는 것을 권한다.]

    [주인의 부상 정도는 경미하지만, 처음으로 뿔 여섯 개 수준의 마력을 사용한 상태이다.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컬 역시 기다려줄 것이다.]

    “스컬스컬.”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컬이 목소리를 냈다. 껄껄 웃으며 비프로스트의 시신을 어깨에 짊어졌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스카자하의 저택으로 향했다.

    &

    “왈왈와왈왈!”

    “낑낑! 낑! 끼낑!”

    “굉장해요! 갱장해!”

    스카자하의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요란한 환영이 쏟아졌다.

    차례대로 몹시 흥분한 바둑이, 어쩐지 모르게 바둑이의 머리 위에서 흥분하고 있는 새끼 던전 미어캣, 그리고 앞의 둘을 모두 합친 것만큼이나 흥분한 유리아였다.

    얼굴에 잔뜩 열이 올라 빨개진 상태로 손발을 마구 흔드는 유리아와 바둑이, 낯설지만 아무튼 귀여운 새끼 미어 캣을 내려다본 용호는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의자에 파김치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푸른 머리칼의 미녀에게 물었다.

    “설마 싸우는 거 다 보여준 거야?”

    “힘을 쪽쪽 빨아 먹히는 와중에도 보모 노릇을 잘 해주길 기대한 거야? 우리 도련님 너무하시네. 너무 하셔. 마몬 주인님도 이렇게 부려먹지는 않았는데.”

    스카자하가 흑흑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평소처럼 장난치는 모습을 보면 크게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꾀병인 것 같지는 않았다. 말하는 와중에도 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호수 위에 나타난 스카자하는 마법으로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진짜 스카자하는 전투 시작 전부터 지금까지 내내 의자에 앉아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에게 생명의 힘을 문자 그대로 퍼붓는데 주력하였다.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 용호는 무어라 말을 꺼낼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바로 그때였다. 유리아가 다시 팔 다리를 파닥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멋있어요! 멋져! 특히, 특히 이게 멋졌어요!”

    용호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유리아는 숨을 크게 삼켰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나름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어 허공에 삿댓질을 했다.

    “나는! 탐욕의! 왕이다!”

    “왈왈!”

    “낑낑!”

    바둑이와 이름 모를 새끼 던전 미어 캣이 호응하듯 떠들어댔다. 엄격 진지한 표정을 짓고있는 유리아가 귀엽긴 했지만 동시에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용호 자신이 대체 언제 저랬단 말인가.

    [정말 저렇게 했다.]

    언제나처럼 아몬의 일격이 폐부를 찔렀다. 그리고 연이어 유리아의 두 번째 공격이 가해질려는 찰나였다.

    “괜찮아, 멋있었어.”

    불쑥 나타난 카이완이 용호의 오른팔을 끌어안았다. 연이어 나타난 카타리나는 왼팔을 끌어안으며 말을 보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부상을 적게 입은 두 사람이었다. 용호는 카이완과 카타리나를 한 번씩 번갈아본 뒤 여전히 파김치 상태로 늘어져 있는 스카자하를 보았다. 의자 양 옆에는 오필리아와 엘리고스, 티그리우스가 예의 파란 물속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용호는 카이완과 카타리나가 각각 매달려 있는 두 팔을 살짝 움직이더니 카이완쪽으로 몸을 돌렸다.

    “카이완, 유리아 좀 위층에 데려다주고 올래? 가는 김에 다른 사역마들 상태도 살펴봐주고.”

    용호의 지목에 카이완은 눈썹을 한 번 움직이더니 씩 웃었다. 손을 쭉 뻗어 카타리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카타리나, 너도 같이 가자.”

    때 아닌 물귀신에 말려든 카타리나는 급히 용호를 돌아보았다. 계급장을 앞세운 횡포에서 벗어나고자 나름 간절한 시선을 보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럴 줄 알고 카이완 시킨 거야. 둘이 같이 다녀와. 리쿰에게도 소식 전해주고. 걱정하겠다.”

    카이완은 깔깔 웃었고 카타리나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흥분해서 펄펄 뛰던 유리아와 그 일행, 카이완과 카타리나까지 나가고나니 스카자하의 저택이 다시 조용해졌다. 용호는 스카자하 곁으로 다가섰고, 스카자하는 힘겨운 가운데 손가락을 놀려 바닥에서 새로운 푸른 물이 솟아나게 했다.

    “도련님도 푹 쉬어. 나도 도련님 잠자리 봐준 다음엔 꿈나라로 떠날 거니까.”

    용호는 순순히 실버 드래곤 아머를 해체한 뒤 푸른 물속에 몸을 집어넣었다. 스카자하가 다시 말했다.

    “아직 주인님은 아냐. 도련님이지. 도련님이 나랑 약속했던 거 기억하지?”

    “걱정 마. 구시온이라면 조만간 대령할 테니까.”

    “기대할게.”

    스카자하가 앉은 자세를 고쳤다. 용호는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오늘 고마웠어.”

    “천만의 말씀을. 언제든지 좋으니 명령만 내려줘.”

    스카자하의 미소를 마주한 용호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가만히 앉아 잠든 용호를 바라보던 스카자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작은 목소리로나마 말했다.

    “푹 주무세요, 주인님.”

    “뭐라고?”

    그 순간 용호가 눈을 살짝 떴다. 얼굴을 보니 듣고도 모른 척 하는 것 같았다.

    간만에 용호에게 한 방 맞은 꼴이 된 스카자하는 턱을 괴었다. 구시온이 늘 그랬던 것처럼 얼버무리는 대신 능청스럽게 말했다.

    “도련님이라고.”

    &

    시간은 어디서나 공평하게 흘렀다.

    십인중과의 전투를 마친 마몬 가가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그 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부 공백지의 하늘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는 것이 있었다.

    붉은 머리칼과 날개, 가루라 일족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자.

    격노의 왕의 신실한 벗이자 충직한 수하인 가르디문디였다.

    < 제 56장 - 결단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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