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60화 (160/227)
  • < 제 54장 #2 >

    [역시 대 마몬 가의 집사장답게 엘리고스가 보는 눈이 있군요!]

    [무기고에 등록된 장비류 가운데서 최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물건입니다.]

    [소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실버 드래곤의 가죽과 비늘과 뼈! 거기에 브리가다와 각종 귀금속들이 더해졌답니다.]

    [제작자는 역시나 ‘여덟 손의 바루나’입니다.]

    루시아의 설명을 들으며 용호는 눈을 빛냈다. 굉장했다. 루시아의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무기고 안에서 눈앞의 실버 드래곤 아머보다 더 밀도 높은 마력을 발하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버 드래곤 아머는 용의 레오타드들처럼 마네킹에게 입혀져 있었다. 다만 용의 레오타드와 달리 팔 다리가 모두 있었다. 새카만 타이즈 위에 은빛 갑주가 걸쳐져 있는 상태인 터라 맨 살이 노출되는 부분이 아예 없었다.

    티그리우스가 말했다.

    “이런 종류의 갑옷에는 대부분 탈부착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시동어로 마법을 발동시키면 갑옷이 자동으로 해체된 뒤 주인의 몸을 감싸며 재결합하는 형식이죠.”

    “아이언맨처럼?”

    “에?”

    용호의 되물음에 티그리우스가 미간을 좁혔다. 용호는 키득 웃었다. 루시아가 티그리우스를 대신해 말을 이었다.

    [무기고 장악이 끝났으니 주인님은 무기고에 존재하는 모든 무기들의 주인이세요.]

    [시동어만 알아내시면 바로 장착이 가능하실 거예요.]

    “여기 쓰여 있네. 시동어.”

    마치 루시아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카이완이 마네킹 목 부분에 붙어 있던 명패를 뜯어 용호에게 보여주었다. 실버 드래곤 아머라는 간단명료한 이름 아래에는 형식 번호라든지 재질이라든지 각종 정보가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너무 심플해서 나중에 다시 입력해야겠는데?”

    용호의 쓴웃음을 마주한 카이완은 됐으니 어서 입어보기나 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카타리나도 옆에서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스컬스컬.”

    스컬까지 나서니 용호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명패를 엘리고스에게 넘긴 뒤 숨을 한 번 크게 골랐다. 약간의 부끄러움 속에 말했다.

    “장착.”

    처음에는 단순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로부터 의미가 발생했다. 마력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용호는 실버 드래곤 아머에서 일어나는 이변을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은 긴장한 눈으로 마네킹 위에서 들썩이는 실버 드래곤 아머와 용호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앗!

    명쾌한 파공음과 함께 용호가 입고 있던 옷이 산산이 조각났다. 정확히는 찢어져서 허공에 흩날렸다.

    갑자기 느껴진 시원함에 용호는 당황했고, 예속 사역마들은 더더욱 당황했다. 겨우 1초 남짓한 순간이었지만 용호는 완벽한 나체가 되었다.

    연이어 마력이 휘몰아쳤다. 용호의 전신을 휘감은 새카만 마력은 이내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즈가 되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것과 같았다.

    실버 드래곤 아머는 그제서야 움직임을 개시했다. 산산이 분해되어 수십 조각이 된 실버 드래곤 아머가 마네킹에서 용호의 몸 위로 순식간에 날아왔다. 용호가 기대했던 그대로 재결합을 개시했다.

    찰칵찰칵 기분 좋은 금속음이 연달아 울렸다. 용호는 허리를 곧이 세웠고, 이내 전신을 꽉 죄는 실버 드래곤 아머로부터 기분 좋은 구속감을 느꼈다.

    “후우.”

    절로 숨이 토해졌다. 마장을 장착하고 있는 왼팔과 머리를 제외한 전신을 실버 드래곤 아머가 빠짐없이 감쌌다.

    꽤나 멋들어진 광경이었지만 예속 사역마들은 아직도 당황 속에 빠져 있었다. 용호와 눈이 마주친 오필리아는 아주 뒤늦게 꺄-하는 작은 탄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용호는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멋지군요.”

    가장 먼저 이성을 회복한 티그리우스가 말했다. 카이완은 깔깔 웃었고, 카타리나는 뺨을 붉히며 귀를 파닥거렸다.

    용호는 갑옷에 집중했다.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마치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뭔가… 내복을 입은 기분 같기도 하고.’

    용호는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몸을 움직여 보았다. 마왕이 된 이래 상당한 괴력을 손에 넣은 용호였지만 지금이라면 그 몇 배나 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한 갑옷이라기보다는 파워드 아머인가?’

    강화 장갑복. 단순히 착용자를 보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각종 능력을 보강해주는 장비류.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마법 갑옷들은 마법으로 착용자의 능력을 보강해주었으니 말이다.

    가슴을 탕탕 두드려 본 용호는 두 번째로 놀랐다.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험 삼아 조금 더 세게, 쾅쾅 두드렸음에도 비슷했다.

    “실버 드래곤 아머가 충격을 분산시키는 한편 흡수하는 걸 겁니다.”

    티그리우스가 그답지 않게 흥분해서 말했다. 오랜 세월 가주로서 살아온 티그리우스도 문헌에서나 보았지 실제로는 구경조차 못해본 드래곤 아머였다. 그 성능을 눈앞에서 직접 보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호오.”

    용호는 다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세 번째로 놀랐다. 불현듯 자각한 어떤 감각 때문이었다.

    “꼬리?”

    딱 꼬리뼈가 있는 곳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크고 굵직한 꼬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자잘한 금속 조각 수십 개를 연달아 붙여 만든 인공 꼬리였다.

    용호는 꼬리를 움직여 보았다. 본래 인간에게는 없는 기관인만큼 어려울 법도 하건만 신기하게도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가볍게 움직이는데 그치지 않고 휙휙 세게도 움직여 보았다. 들어가는 힘을 보니 공격 무기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용호가 꼬리를 흔드니 제일 신이 난 건 카타리나였다. 조금 격할 정도로 꼬리를 파닥거렸다.

    “그런데 문득 생각난 건데.”

    한창 예속 사역마들 앞에서 실버 드래곤 아머 시연에 빠져 있던 용호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이렇게 드래곤을 재료로 한 장비를 입고 다니면 드래곤들의 원한을 사지 않을까? 딱히 그 원한이 두렵다는 건 아니지만.”

    드래곤은 그냥 괴물이 아니었다. 지성을 가진 하나의 종족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의 뼈로 만든 도구에 본능적인 혐오감을 가지듯이 드래곤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어쩌면 예기치 않은 원한 같은 것을 살지도 몰랐다.

    ‘폭력의 왕은 드래곤 로드라고도 했고.’

    물론 처음 말했듯이 딱히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새삼 떠오른 생각일 뿐이었다.

    티그리우스와 오필리아는 서로를 돌아보았고, 무언의 합의 끝에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드래곤들은 홀로 완전한 거인들. 자기 새끼들조차도 해츨링 시절이 지나면 어디서 어떻게 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답니다. 그 이후에 펼쳐지는 삶과 죽음 모두 그 객체의 것이지 ‘타인’인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요.”

    “으음, 꽤 차갑네.”

    오필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면 ‘존중’이라고도 할 수 있죠. 다만 그렇다고 아예 냉담한 것만은 아닙니다. 다른 종족에 비해 희박하긴 하지만 드래곤들도 ‘같은 종족’이란 개념이 있으니까요.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처참함에는 드래곤들도 보통은 반응을 보입니다.”

    “드래곤의 뼈나 가죽, 비늘로 장비를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최고의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드래곤들도 이러한 일에는 오필리아가 말한 ‘처참함’ 같은 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티그리우스가 오필리아의 말을 받아 설명을 완성시켰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실버 드래곤 아머를 돌아보았다.

    “이것도 같은 경우인가.”

    누가 봐도 최고의 갑옷이었다. 이 실버 드래곤 아머에는 조롱이나 능멸의 의도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의 설명대로면 저 폭력의 왕조차도 용호 자신의 실버 드래곤 아머를 보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을 터였다.

    [전반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그 갑옷에 얽힌 이야기는 조금 경우가 다르다.]

    용호의 오른팔, 아몬의 또 다른 형태인 붉은 팔찌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호가 계속해서 강해진 덕분에 이제 어느 정도나마 투기장 밖에서도 대화가 가능해진 아몬이었다.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이 다시 용호에게 모였다. 아몬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린 주인이여. 그대가 입고 있는 실버 드래곤 아머는 당대의 드래곤 로드였던 실버 드래곤 에르나사가의 뼈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오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드래곤 로드의 뼈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일 줄이야.

    카이완이 손뼉을 짝 쳤다.

    “이야기책에서 본 적 있어. 마몬 님과 실버 드래곤의 싸움!”

    “저도 알아요. 그 이야기. 천지가 요동치는 엄청난 대결전이었죠!”

    카타리나도 거들고 나섰다. 마몬과 12 사역마들의 이야기는 마계의 전설이었다. 둘 뿐만 아니라 다른 예속 사역마들 역시 저마다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는지 훈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자그마치 삼일 밤낮 동안 이어진 사투였으니 말이다.]

    용호의 머릿속에 거대한 실버 드래곤과 마몬의 싸움이 절로 그려졌다. 예속 사역마들도 비슷한 상상들을 하는 것 같았다. 카이완 같은 경우에는 마른 침까지 삼켰다.

    [그 전투 이후 주인께서는 당시 남아 있던 실버 드래곤 일족 거의 모두와 전투를 벌이셨다. 실버 드래곤 일족이 사실상 멸족한 것은 그 때문이지.]

    “수장을 잃은 이들의 복수인가?”

    [그렇지 않다. 어린 주인의 예속 사역마가 설명했듯이 드래곤들은 ‘복수’를 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것은 수장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럼 대체 왜?”

    실버 드래곤 일족은 어째서 마몬에게 덤볐던 것일까. 사실상 멸족 상태에 처할 때까지 싸운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몬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모르게 망설이는 것 같은 느낌을 풍기더니 이내 나직이 말했다.

    [주인께서 에르나사가의 가죽 일부로 가방과 장신구를 만들어서 엘룬과 시트리에게 선물하셨다.]

    [아마 최하층에 있는 엘룬의 방에도 몇 개 남아있을 거다. 시트리라면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것 같군.]

    용호는 눈을 깜박였다. 카이완과 카타리나도 그랬고, 오필리아와 엘리고스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티그리우스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흠흠. 실버 드래곤은 명예를 아는 종족이었군요.”

    티그리우스다운 포장 솜씨였다.

    [주인께서도 후일 원인을 아시고 크게 후회하셨지.]

    “그… 렇군.”

    갑자기 실버 드래곤 아머가 불쌍해보였다. 용호는 티그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헛기침을 터트린 뒤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예속 사역마들에게도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장비류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게 했다.

    ‘신록의 갑옷은 리쿰한테 줄까? 태양검은 카타리나가 월광검이랑 같이 쓰는 게 좋을 것 같고.’

    용호는 한 발 물러서서 예속 사역마들이 물건 살피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것저것 괜찮은 물건들이 많았지만 무기는 이미 아몬이 있었고, 방어구는 실버 드래곤 아머 이상의 것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침묵하던 아몬이 다시 용호를 불렀다.

    [어린 주인이여.]

    [다음 층까지 점령하면 그대는 탐욕의 미궁의 절반을 손에 넣게 된다.]

    [투기장 역시 이미 절반 이상 진행을 한 상태이지.]

    어찌보면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몬이 굳이 많은 마력을 소모하면서까지 투기장이 아닌 이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대를 주인이라 부를 날이, 그리하여 그대가 알고자 하는 과거의 진실들을 밝힐 날이 이제 멀지 않은 것 같다.]

    “아몬.”

    용호는 아몬의 미소를 느꼈다. 아몬이 속삭였다.

    [6층의 주인들은 지금의 주인에게 딱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힘을 잘 활용한다면 주인은 지금 가진 힘만으로도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다.]

    “주인들?”

    용호는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다. 아몬은 그 사실에 기꺼워하며 말을 이었다.

    [6층의 주인은 두 사람.]

    [쌍둥이 좌, 음과 양의 유호유안.]

    [그들의 힘은 ‘조화’이다.]

    &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라.”

    “딱히 더 없어. 나도 그냥 관찰한 정도니까. 선술집에 나도는 정보를 모은 것뿐이고.”

    가르디문디는 어깨를 으쓱이며 붉은 머리칼을 비비 꼬았다. 그 불성실한 자세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키르티무카였지만 일단은 용서했다. 격노의 왕 쪽으로 빠르게 돌아서며 말했다.

    “비록 버려진 땅이라 매도당하지만 남부 공백지 전체의 여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그 공백지를 일통한 자라하니… ‘좋은 관계’를 맺는다면 분명 우리 팔부중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묘하게 한 부분을 강조하는 키르티무카였다. 격노의 왕이 입술을 움츠렸다.

    “조, 좋은 관계?”

    “예! 좋은 관계요! 다른 왕의 휘하도 아니라고 하니 딱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재빠르게 낚아채야 할 겁니다.”

    이번에도 특정 부분에서 늬앙스가 강했다. 키르티무카는 격노의 왕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전투에서 죽은 자들의 시신을 수습했을 뿐만 아니라 유가족들에게 보상까지 해줬다는 걸 보니 품성 역시 훌륭할 것 같군요. 성군의 자질이 보입니다.”

    격노의 왕은 반은 얼결에, 그리고 반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부분에 관해서는 격노의 왕도 동의했다. 죽은 부하의 유가족들에 대한 복지를 신경 쓰는 왕은 작금 마계에 격노의 왕 자신 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하나 더 나타난 것이었다.

    “더욱이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명문 마몬 가이니 격도 딱 맞는군요. 지금은 다시 부활하기도 했고요.”

    키르티무카가 이 정도면 어떠냐는 듯 눈을 찡긋했다. 그 속에 담긴 검은 의도를 단번에 눈치 챈 격노의 왕은 얼른 키르티무카를 밀어냈다.

    “미, 미친 소리 좀 작작할래?”

    하지만 말하는 것과 달리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귓불도 붉었고, 묘하게 입 꼬리 역시 올라가 있었다.

    키르티무카는 엉덩방아를 찧었음에도 호탕하게 웃었다. 다시 한 번 입술을 움츠린 격노의 왕은 새삼 자신이 그린 마몬 가 가주의 초상화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가르디문디는 생각했다.

    ‘호색한이란 소문은 일단 숨기자. 신빙성도 낮으니까.’

    격노의 왕은 초상화를 들어올렸다. 저도 모르게 수줍은 미소를 그렸다.

    &

    폭력의 왕은 고개를 들었다.

    정신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장장 수백 미터에 달할 그의 거체가 수십 년 만에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거룡의 눈꺼풀이 세월의 무게를 털어냈다.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에 직면하게 하는 황금빛 눈동자에 한 사람을 담았다.

    폭력의 왕은 고개를 든 것에 이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방문자를 내려다보았다. 스스로가 초대했지만 정말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한 객에게 진성을 토했다.

    “오랜만이군.”

    작고 나직한 목소리는 증폭되었다. 환상의 수맥을 올곧이 이은 자- 저 일자왕의 후예가 내뱉는 숨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법이 되었다. 폭력의 왕의 거체를 품은 공동 안이 위대한 왕의 마력으로 가득 찼다.

    방문자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칠흑의 로브를 늘어트리며 폭력의 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방문자는 당당했다. 마계를 지배하는 여섯 왕 가운데 하나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두려움이나 어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폭력의 왕은 방문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경의를 섞어 방문자의 이명을 불러보았다.

    “나태의 왕.”

    두 왕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교차했다.

    제 54장 - 조우 끝, 제 55장 - 자각으로 이어집니다.

    < 제 54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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