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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55화 (155/227)

< 제 52장 - 이변 >

제 52장 - 이변

용호의 결정은 언제나처럼 빠르고 단순했다.

“돌아가자.”

카타리나가 귀를 쫑긋거렸다. 카이완은 못내 아쉬운 눈으로 읽고 있던 자유 경매장 카탈로그를 내려놓았지만 딱히 이견을 내놓지는 않았다. 용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죄악 간의 공명이 확인된 상황이었다. 더욱이 현재 경매장 안에는 격노의 왕이 존재했다.

격노의 왕은 용호가 탐욕의 왕임을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확률의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다시 마주치면 용호에 대해 다른 생각을 품게 될 수도 있었다.

‘식탐의 왕.’

격노의 왕보다도 피해야 할 상대가 바로 식탐의 왕이었다. 그는 이미 귀신 가면을 쓰고 경매에 참가한 전적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매장 어딘가에서 카탈로그를 뒤적이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도 소득이 꽤 있었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입술을 삐죽인 카이완은 괜스레 옆에 앉은 카타리나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움찔한 카타리나는 급히 용호에게 구조의 시선을 보냈지만 용호는 딴청으로 회피했다. 카이완의 심기를 살펴서라기보다는 울상 짓는 카타리나가 귀여워서였다.

경매장에 와서 물건 하나 사지 못했지만 용호 스스로의 말마따나 소득이 꽤 있었다.

죄악들 간의 공명에 대해 알게 되었고, 격노의 왕과 식탐의 왕의 느낌을 인지했다. 이제 언제 어디서고 두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힘의 성장 역시 확인했다. 용호 자신의 위치가 마계 내에서 대강 어디쯤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카이완이랑 시트리가 만날 기회도 되었고.’

고개를 끄덕인 용호는 더 망설이지 않고 시트리 쪽을 보았다. 시트리가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바로 출발하시려고요?”

“아뇨, 마차까지 가는 도중에 마주할 수도 있으니까요. 본 경매가 시작되면 그때 나가도록 하죠.”

한창 경매장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이때에 혼자 돌아가면 그게 오히려 눈에 띄었다.

용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트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사랑하는 고객님다우신 판단이군요.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시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완과 카타리나에게 다가갔다.

“귀여운 고객님, 혹시 꼭 갖고 싶은 물건이라도 있나요?”

“시트리?”

카이완이 당황해서 물었다. 시트리의 질문 때문이 아니었다. 질문에서 유추 가능한 사실 때문이었다.

시트리는 카이완 옆에 앉은 뒤 우아한 손길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전 경매장에 남을 생각이라서요. 사마엘과 직접 만나 나눌 대화도 있고요. 아시다시피 전 던전 상회의 거물이니까요.”

시트리는 마몬 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반드시 같이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설혹 다른 왕을 마주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 물론 무료로 선물해 드린다는 건 아니에요. 나중에 다 사랑하는 고객님에게서 받아낼 거랍니다? 대신 제 수고료는 서비스해드리죠.”

시트리가 다시 경매물품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카이완과 카타리나는 선뜻 답하기에 앞서 용호 쪽을 보았고,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골라.”

돈주머니의 허락이 내려졌다.

카이완은 작게나마 쾌재를 부른 뒤 카탈로그를 쫙 펼쳤다. 항목 하나를 딱 가리켰다.

“그럼 역시 이거. 이거 부탁드릴게요.”

자유 경매장에서부터 만지작거리던 마귀 손톱이었다. 시트리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말했다.

“흠, 상대에게 근접해야하는 데다가 상처까지 내야하지만… 조건이 까다로울수록 저주는 더 강력해지는 법이죠. 괜찮은 선택 같네요.”

“그쵸?”

시트리의 동조가 반가운 듯 카이완이 희희낙락 했다. 약간 긴장된 얼굴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카타리나 역시 카탈로그를 펼쳤다.

“전 이걸 부탁드립니다.”

귀신 얼굴 모양의 팬던트였다. 마치 석고 조각같은 회색빛인 게 인상적이었다.

“어둠의 속성력을 강화하는 물건이군요. 우리 호위기사 양에게는 이것도 썩 괜찮은 물건 같네요. 다만…….”

말끝을 흐린 시트리는 용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깨를 늘어트리며 약간은 타박하듯 말했다.

“사랑하는 고객님, 평소에 대체 어떻게 행동하셨으면 아름다운 한창 때 아가씨들이 죄다 전투용 도구만 고르는 걸까요? 그냥 예쁜 장신구 같은 것도 얼마든지 있는데.”

카이완은 그저 샐죽 웃었고, 카타리나는 그런 게 아니라는 얼굴로 시트리를 보았다.

용호는 변명하는 대신 영리하게 굴었다.

“시트리, 저도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 돌리시기는. 말씀해 보세요.”

작은 웃음이 번졌다. 용호는 카타리나나 카이완처럼 카탈로그를 펼치지 않고 말했다. 본 경매에 출품될 모든 물건들이 카탈로그에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네크로멘싱이 가능한 마법사 계열 사역마를 하나 구하고 싶습니다.”

“어라? 엘프 정령사가 아니라요?”

“시트리.”

시트리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 소파에 등을 깊이 묻으며 답했다.

“흠, 좋아요. 이번 경매에서 구할 수 없다면 던전 상회의 카탈로그에서라도 하나 추천해드리죠. 아무래도 언데드 계열이 좋으시겠죠? 리치라든가.”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라면.”

오래 전부터 바라온 데스나이트와 리치의 결합.

설사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네크로멘서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다소 과한 투자를 해서라도 구할 가치가 있는 사역마였다.

바로 그 때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법 먼 곳에서부터 들려온 소리에 시트리가 매력적인 눈썹을 꿈틀거렸다.

“본 경매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네요. 이제 움직여 볼까요?”

시트리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용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카이완은 별 생각 없이 일어나려던 카타리나의 꼬리를 잡아 당겨 다시 앉힌 뒤 시트리와 비슷한 눈으로 용호를 쳐다보았다.

“갑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용호는 아무도 에스코트하지 않았고, 시트리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

“벌써 돌아갔을 리가 없는데…….”

은은하게 울리는 종소리는 아름다웠지만 듣는 이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의 심복이자 벗인 야차 여장부 키르티무카는 다급한 눈으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매장 어디에도 숫사자 가면이 보이지 않았다.

“됐어, 키르티무카. 어차피 그냥 심심풀이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키르티무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주인인 격노의 왕을 내려다보았다. 흉측한 귀신 가면 때문에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꽤나 실망한 얼굴일 것이 분명했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키르티무카 자신 이상으로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으니 말이다.

키르티무카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 숫사자 가면의 남자에게 진짜 뭔가로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첫 눈에 반했네, 어쨌네 키르티무카 자신이 떠들기는 했지만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키르티무카가 바란 것은 그저 가벼운 일탈이었다. 사려 깊고 정이 많은 성격 때문에 안 해도 될 걱정까지 어깨에 이고 사는 자신의 주인이 잠시나마 복잡한 일들을 잊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땐 그런 일도 있었지-하며 잠깐 웃을 수 있는 소소한 사건이면 충분했다.

마침내 종소리마저 멎었다. 이제 잠시 후면 본 경매가 시작되었다. 다소 어두운 경매장 안에서 저마다 사담을 나누던 이들도 하나 둘 이야기를 멈추고 무대에 집중했다.

“바람이나 좀 쐬고 올게. 혹시 소마나 암리타 매물로 나오면 꼭 사고.”

격노의 왕은 그런 모두와 반대로 행동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말을 툭 던진 뒤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없잖아.’

혹시나 해서 나가는 와중에 다시 눈동자를 굴려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격노의 왕은 입술을 삐쭉였다. 저도 모르게 기대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기분 전환이 되기는 했네.’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발코니 쪽으로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쐬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남자 생각을 해본 게 대체 얼마만일까. 어렸을 때 폭력의 왕을 처음 봤을 때 그 웅장한 자태에 감탄했던 이후로 처음이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본 경매 시작 전의 자신이 엉뚱하고 우스웠다. 이게 뭐라고 실망까지 했는지 원.

격노의 왕은 가면을 벗었다. 경매장 내에서는 쓰고 있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어차피 다들 본경매장에 들어간 상황이니 거릴 낄 것도 없었다.

가면 속에서 보호받던 하얗고 보드라운 뺨이 차가운 밤공기에 노출되었다. 피부를 에는 서늘한 감각이 기분 좋았다.

경매가 끝나고 돌아가면 다시 지긋지긋한 대치의 시작이었다. 북부의 싸움이 어찌 흘러가는지, 식탐의 왕은 어찌 행동하는지. 전부 지켜보며 때를 기다려야 했다. 참으로 못할 짓이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한 방 붙는 편이 좋을 텐데.

‘아니, 아니지. 무슨 생각이야. 진정해, 드리타라슈트라. 답답함을 해소하자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을 순 없어.’

스스로를 질책한 격노의 왕은 다시 머리를 비우고 밤하늘을 우러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여섯 마리 천마가 끄는 비행마차가 비상했다. 격노의 왕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발코니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비행 따위가 아니었다. 거리는 제법 되었다. 하지만 간다르바의 왕이자 격노의 왕인 그녀는 비상식적인 신체능력의 소유자였다. 마차를 보았고, 마차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녹색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 새카만 머리칼. 단정한 이목구비.

천마들은 날아올랐고, 비행마차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자연 사내의 얼굴 역시 격노의 왕의 시야를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몇 초.

격노의 왕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꾹 눌러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사실에 재차 놀란 격노의 왕은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멍한 목소리를 토했다.

“지, 진짠가?”

순간 뺨이 확 달아올랐다. 그리고 때를 맞추듯 등 뒤에서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주인님! 주인님!”

“키르티무카?”

서둘러 다시 가면을 뒤집어쓴 격노의 왕이 돌아섰다. 키르티무카는 그런 격노의 왕과는 반대로 가면을 벗었다. 굳은 얼굴로 말했다.

“큰일 입니다.”

&

본 경매가 시작되고 이제 겨우 첫 번째 매물이 올라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식탐의 왕은 경매장을 나섰다. 자신에게 급보를 전한 소악마 임프를 우득우득 뼈채로 씹어 삼켰다.

그래도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다. 평소 인내심이 강한 식탐의 왕이었지만 그에게도 역린이란 것이 존재했다. 한 번 터진 노여움은 결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식탐의 왕의 미희들은 혹여 자신들도 잡아먹힐까 두려워 몸을 떨었다. 식탐의 왕에게 식인은 결코 금기가 아니었다.

이동하는 궁전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마차 앞에 당도하자마자 아프사라스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마차 안에 쌓아둔 음식들을 서둘러 간이 식탁에 옮겼다.

식탐의 왕은 게걸스럽게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아예 접시까지 씹었고, 급기야는 가엾은 아프사라스 가운데 하나의 목을 비틀었다. 나머지 아프사라스들은 비명을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떨리는 손으로나마 더욱 서둘러 음식들을 날랐다. 방금까지 자신들과 함께 숨 쉬었던 여인이 그나마 산채로 잡아먹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참으로 비참한 노릇이었다.

‘공백지의 왕.’

열매가 영글었다. 다채로운 양분을 흡수한 열매는 참으로 달콤할 것이 분명했다.

진실로 탐욕이라면 그보다 좋을 수 없었다. 설사 탐욕이 아니라 할지라도 공백지의 왕 정도라면 먹을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식탐의 왕은 수확을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경매장 일정을 마치면 바로 남정을 준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헝클어졌다.

공백지의 왕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 수작질을 부렸다면 지금처럼 진노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식탐의 왕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존재. 가장 눈엣가시로 여기는 적.

그가 오랜 침묵을 깨트렸다. 식탐의 왕 자신과의 국경 지대로 병력들을 전면 배치시켰다.

죄악을 소유하지 않은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에 오른 괴물, 마계에서 가장 강대한 드래곤.

“폭력의 왕.”

그가 움직였다. 식탐의 왕의 계획을 헤집어놓았다.

&

< 제 52장 - 이변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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