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1장 #4 >
가면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교차했다. 용호와 마주한 여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용호는 동요를 억눌렀다. 여인의 눈을 바로 피하는 대신 오히려 잠시 동안 마주했다.
별처럼 빛나는 오색찬란한 눈동자였다. 바라보는 이를 압도하는 위엄과 강렬함이 느껴졌다.
용호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저 우연히 눈이 마주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가면 속에서나마 어색하게 웃은 뒤 언젠가 본 영화 속의 영국 신사처럼 가볍게 목례했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시트리가 그런 용호의 팔을 끌어안았다. 빨리 다음 매물을 보러 가자며 재잘거렸고, 마치 용호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여인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용호를 인도했다.
카타리나와 카이완도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용호의 예속 사역마인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와중에 카타리나의 꼬리가 다소 어색할 정도로 뻣뻣해지긴 했지만 카이완이 잘 해결했다. - 기습적으로 꼬리를 꽉 움켜쥐니 카타리나가 깜짝 놀라 움찔했고, 덕분에 친한 여인들끼리 장난치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
용호와 여인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그 사이를 다시 인파가 메웠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여인은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용호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용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갸웃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뭐지?”
작은 중얼거림은 혼잣말이 아니었다. 뒤늦게 여인을 따라잡은 곰 가면 여장부에게 향한 말이었다.
곰 가면이 딱 어울릴 정도로 덩치가 크고 근육이 우람한 여장부는 여인이 쳐다보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딱히 특별할 것이 없었기에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죠?”
여인은 바로 답하지 않고 일단 입술을 한 번 오므렸다. 팔짱을 끼더니 약간은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분명히 처음 보는 남자인데, 딱 눈을 마주치자마자 갑자기 막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이유는 뭘까? 숨결이 거칠어지고.”
꽤나 진지한 여인의 물음에 여장부는 눈을 껌벅였다. 당혹과 기대가 섞인 의견을 냈다.
“첫 눈에 반해서?”
“미친. 가면 너머의 눈만 보고?”
“몸도 봤을 거 아닙니까. 분위기 같은 것도 느껴졌을 테고.”
여장부의 대답에 여인은 다시 입술을 움츠렸다. 분명 몸이 그리는 선이 꽤나 마음에 들기는 했다. 키도 딱 좋았고 말이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리고 이상한 놈이었다고.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어. 오히려 여유롭게 목례까지 하고 갔다니까? 가면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을 게 분명해.”
“설마 보석안을 발하셨습니까?”
여장부의 목소리에 담긴 당혹이 좀 더 짙어졌다. 여인은 추궁이라도 당한 것 마냥 변명하듯 답했다.
“그… 나도 모르게. 그리고 발했다기 보다는 그냥 쳐다본 거야.”
“흠, 그래서 더 마음에 드신 건 아닐까요? 주인님과 눈이 마주치고도 태연한 사람, 그것도 남자는 거의 없으니까요.”
여인의 눈은 왕의 눈이었다. 남다른 용기와 대범함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감히 마주칠 엄두도 못 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그런가?”
“그럴 수도 있죠.”
여장부의 목소리에 어린 기대가 조금 더 커졌다.
하지만 여인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연애 감각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터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느낌은 무언가 달랐다. 더욱이 일전에 경험한 적이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아냐, 그것도 말이 안 돼.’
여인은 재차 고개를 가로저어 머릿속에 반짝 떠오른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왕들을 마주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전투 중이었다. 그것도 무려 왕들 간의 격돌 말이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격노는 말 그대로 포효했었다. 다른 죄악과 공명하며, 다른 죄악을 적대하며 으르렁거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설명 못할 무언가. 그저 강렬하다고밖에 말 못할 인상을 받았다.
“서, 설마 진짠가?”
여인은 당혹 속에 뺨을 붉혔고, 여인의 수행원이자 신실한 벗인 야차 여장부는 곰 가면 속에서 히죽 웃었다. 나날이 우울함의 최고치를 갱신하는 주인을 위해 기분전환 삼아 방문한 경매장이었는데, 생각도 못한 즐거움이 더해졌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죠. 딱 봤는데 또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면 진짜 뭔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경매는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본 경매 전까지도 시간이 많았다.
다시 한 번 용호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본 여인은, 격노의 왕 드리타라슈트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스레 가슴을 한 번 두드려 보았다.
&
‘죄악의 소유자가 분명해.’
용호는 확신했다. 그 외의 가능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여섯 왕 가운데 하나가 던전 상회 경매장에 왔다. 그렇다면 누구인 것일까. 용호 자신과 마주한 그 여자는 어떤 죄악의 소유자란 말인가.
“이제 괜찮아요.”
시트리의 목소리가 용호에게 현실 감각을 되찾아 주었다. 어느새 복잡한 자유 경매장을 빠져 나와 있었다. 처음 경매장을 방문했을 때 들른 적이 있던 비밀 방 안이었다.
카타리나와 카이완은 영문 모를 당혹감과 긴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인지 일단 가면부터 벗었다. 용호 역시 숫사자 가면을 벗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시트리가 다시 말했다.
“아마도, 그녀는 격노의 왕이겠죠.”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화들짝 놀랐다. 반면 시트리는 가면을 벗은 뒤 태연한 얼굴로 머리칼을 정돈했다. 용호의 맞은 편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이야기했던 것처럼 가면으로 가릴 수 있는 건 얼굴뿐이니까요. 정체를 특정 지을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답니다.”
용호는 섣불리 의견을 내는 대신 경청했다. 시트리는 하나하나 이유를 나열하며 손가락을 꼽았다.
“일단 여자라는 사실. 중간 키, 하얀 피부와 늘씬한 몸매, 검푸른 머리칼, 간다르바의 특징인 달콤한 체향.”
간다르바는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종족이었다. 간다르바 여성인 동시에 경매장에 출입할 수 있을 정도의 신분을 가진 자는 드넓은 마계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격노의 왕은 수많은 싸움터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고, 그만큼 그 외형에 대해 알려진 것들이 많았다. 방금 언급한 모든 것들이 격노의 왕의 외형과 일치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인 사랑하는 고객님의 직감. 많이 놀라신 것 같더군요.”
시트리는 마지막으로 은색 팔찌를 가리켰다. 브리가다의 힘을 감추는 팔찌에는 착용자들 간의 상태 정보를 공유하는 효능 역시 있었다.
용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죄악 간의 공명이 아니었어요.”
근거는 미미했지만 강한 확신이 들었다. 시트리의 말마따나 직감이라 해도 좋았다. 그리고 시트리는 용호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님께는 그 사람의 유산이 있으니까요.”
마신왕의 심장.
탐욕의 왕 마몬이 인계에 남긴 유산.
순간 용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말했다.
“탐욕, 격노, 식탐.”
과거 마몬이 손에 넣었던 죄악들.
이제 알 것 같았다. 역시 단순한 공명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용호가 가진 마신왕의 심장은 과거 탐욕의 왕 마몬이 소유했던 물건의 복제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질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완벽한 복제였기에 본체의 기억 역시 공유했다.
마신왕의 심장은 격노를 잊지 않았다. 한때 자신이 품었던 죄악을 그리워했다.
“격노의 왕이 절 알아봤을 가능성은 낮겠군요.”
부지불식간에 결론이 도출되었다. 용호 자신에게는 마신왕의 심장이 있었지만 격노의 왕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격노 외에 다른 죄악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요. 하지만… 어떤 강렬한 인상 정도는 받았을 겁니다. 가슴의 두근거림 같은 것을요.”
이 역시 납득이 갔다. 격노의 왕과 용호 자신이 시선을 교환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용호에게는 경험이 있었다.
‘귀신 가면의 남자.’
격노의 왕을 마주했을 때보다는 거리가 멀었었다. 탐욕의 힘 역시 지금보다 훨씬 더 약했을 때였다.
하지만 용호는 당시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이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것을 알았다. 마신왕의 심장과 하나 된 탐욕이 확신을 주었다.
그렇다면 귀신 가면의 남자는 누구인가.
어떤 죄악의 소유자인가.
시트리의 말이 도움이 되었다. 가면 외에도 정보를 유추할 구석은 얼마든지 있었다.
엠브리오가 전해준 정보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
자연스럽게 답이 나왔다.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이 존재했다.
“식탐의 왕.”
눈앞의 대적.
용호 자신은 이미 그와 만난 적이 있었다.
&
“그럼 오늘 거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엘이 부드럽게 웃었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한 식탐의 왕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좋은 거래였소.”
“언제나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였다. 사마엘이 몇 번인가 식탐의 왕과 비밀 거래를 하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결코 특별한 관계라 할 수 없었다.
사마엘과의 거래는 완벽한 비밀 거래가 아니었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들은 사마엘이 식탐의 왕과 무엇을 어떻게 거래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마엘은 단지 단말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 거래는 던전 상회와 식탐의 왕 사이의 거래였지, 사마엘 개인과 식탐의 왕 사이의 거래가 아니었다.
다른 왕들 역시 던전 상회와 비밀 거래를 했다. 그리고 그 정보들 역시 다섯 이사들의 회의 내에서 공유되었다.
“경매장이 여전히 호황이더구려. 이번에도 여러 인사들이 참여한 것 같더군.”
별다른 의미 없는, 그저 인사치레 같은 말이었지만 대화하는 두 사람의 위치는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마엘은 여전히 천사 같은 얼굴로 사근사근하게 답했다.
“북부의 전쟁이 곧 세계의 멸망인 것은 아니니까요.”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말이었다. 식탐의 왕은 소리 내어 웃었다.
“본 경매에서 뵙겠소.”
“그때 뵙겠습니다.”
식탐의 왕은 귀신 가면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식탐의 왕을 배웅했다.
두 사람 모두 마지막 인사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가슴에 품은 말들을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밀실 문이 닫혔을 때 사마엘은 검은 날개를 축 늘어트렸다. 식탐의 왕과의 대면은 언제나 상당한 심력을 소모케 했다. 마치 왕이라는 사실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식탐의 왕은 자신의 욕구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불같은 욕망 속에 감춘 것은 공백지의 왕인가.’
식탐의 왕이 사마엘 자신에게 품는 욕망-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식욕’ 사이에 숨은 욕구가 하나 있었다. 평상시라면 다른 강렬한 욕구에 눈이 멀어 눈치 채지 못했을 터였지만, 오늘은 알 수 있었다.
사마엘은 시트리의 말마따나 성실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마몬 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남부의 소문이, 정확히는 마몬 가 가주와 늑대의 마왕 엠브리오의 싸움에 관한 소문이 인위적으로 비틀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남부 공백지는 다섯 이사 가운데서도 최고참인 시트리의 영역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는 의식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공백지가 사실상 일통되었다. 더욱이 그 통일의 방식이 무척이나 난폭했다.
어느 하나의 일방적인 통일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마치 토너먼트 경기를 치르듯이 서로를 잡아먹었다. 그 결과 그렇지 않아도 황폐한 남부 공백지가 더더욱 황량하게 변했지만 반대로 더 강해진 것도 있었다.
마왕은 자신과 동등 혹은 더 강한 자의 정수를 취했을 때 큰 성장을 이루는 법이었다.
자신보다 약한 자의 정수를 취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각지에서 벌어진 토너먼트 형식의 싸움은 정수의 효과적인 집중을 불러왔다. 어느 하나가 일방적으로 남부를 통일했다면 남부의 던전들과 가주들은 보존했을지언정 지금과 같이 거대한 힘의 집중을 이루지는 못했을 터였다.
공백지의 왕.
식탐의 왕은 어째서 그를 탐하는 것일까. 그저 단순히 집중된 공백지의 정수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사마엘 자신이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혹여나 그 무언가가 사마엘 자신의 추측대로라면.
사마엘은 생각을 끊었다. 지친 날개를 추스른 뒤 밀실을 나섰다.
공백지의 왕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
격노의 왕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옆에서 자꾸만 이상한 이야기를 떠드는 야차 여장부 때문인지 숫사자 가면은커녕 수캐 가면조차 보이지 않는데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식탐의 왕은 느긋하게 걸었다. 하지만 느릿느릿한 움직임과는 반대로 식탐의 죄는 왕성한 움직임을 보였다. 끊임없이 허기를 토로했다.
본 경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들을 비롯한 여러 유력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또 한 명의 왕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제 51장 - 공백지의 왕 끝, 제 52장 - 이변으로 이어집니다.
< 제 51장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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