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1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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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바디의 던전 구조가 워낙 복잡한 터라 엘리고스가 돌아오는 데는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걸렸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아예 야수화까지 해서 달려온 엘리고스는 커다란 손에 들린 서신을 용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야수화를 해제한 엘리고스는 약간은 민망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자신이 너무 수선을 떤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엘리고스에게 무안을 줄 의도는 조금도 없었던 용호였지만 여기서 몇 마디 말을 더해봐야 일만 더 꼬일 것 같았다. 그저 친애의 뜻을 담아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 뒤 옥좌 대신 소파로 향했다. 서신 내용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카이완과 카타리나가 자연스럽게 가운데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오필리아는 어느새 소파 뒤로 돌아가 있었다. 호출을 받고 막 돌아온 티그리우스만이 점잖게 자기 자리를 지켰다. - 스컬 역시 자기 자리를 지킨 것은 동일했지만, 그 자리가 방바닥이었기에 점잖지는 못했다. -
용호가 카이완과 카타리나 사이에 앉자 오필리아가 공손히 나이프를 내밀었다. 서신 겉봉을 뜯는 용도였다.
“후우.”
막상 겉봉을 뜯자니 약간이지만 긴장이 되었다. 서신 겉봉은 평범했지만 내부에서 미미한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용호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서신 겉봉을 마력으로 감쌌다. 마력 컨트롤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기에 펼칠 수 있는 재주였다.
그런 용호의 행동을 뒤에서 지켜보던 오필리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전 티그리우스에게서 결투 신청서가 왔을 때처럼 오필리아 자신이 먼저 서신을 살펴보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던전 상회가 가주에게 해코지를 할 가능성은 낮다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용호에 대한 신뢰였다. 자신의 주인은, 마몬 가의 가주는 이제 결코 녹록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공백지 전체를 일통한 강대한 군주였다.
마침내 용호가 겉봉을 가르고 내용물을 꺼냈다. 펼쳐볼 여지도 없는 카드 형태의 검고 작은 종이였다.
“던전 상회 특별 경매… 초대장?!”
별 생각 없이 카드 최상단에 씌여 있던 금빛 글씨를 따라 읽던 카이완이 경악을 토했다. 깜짝 놀라 용호에게 기대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최속의 날개 사마엘… 세상에! 정말 그 사마엘이란 말인가요?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인?!”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오필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잖은 티그리우스마저도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다, 다섯 이사?!”
엘리고스도 뒤늦게 반응했다. 그리고 다섯 이사가 아닌, 모두가 경악하는 상황에 홀로 당황하던 카타리나는 애써 깜짝 놀란 척을 했다. 다섯 이사가 뭔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카타리나의 어설픈 연기는 들키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용호가 손에 든 초대장에 쏠려 있었다.
“마력을 주입해 봐. 영상 카드인 것 같아.”
카이완이 용호를 보챘다. 오필리아 역시 등 뒤에서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함인지 티그리우스가 설명했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는 단순한 던전 상인들이 아닙니다. 그들 각자가 자신의 던전을 가진 가주들이죠.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의 힘은 신기와 죄악을 제한다면 여섯 왕들과 호각을 이룬다고까지 여겨집니다.”
죄악의 유무가 불러오는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하지만 다섯 이사는 마계 전체의 상권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던전 상회의 주인들이었다. 던전 상회의 여력까지 고려한다면 '세력'이란 면에서는 여섯 왕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을 강자들이었다.
그런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가 용호에게 직접 초대장을 보냈다.
티그리우스의 설명 덕분에 카타리나도 카이완과 오필리아의 조바심에 합류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살라미조차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용호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쳐다보았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용호가 초대장에 마력을 주입했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이자, 경매장의 총지배인인 최속의 날개 사마엘이 위대한 마몬 가의 가주 님께 인사드립니다.]
초대장 끝에서부터 방출된 빛이 사마엘의 형상을 이루었다. 손바닥 두 개를 합쳐 놓은 정도의 크기였는데, 단순히 기록된 영상인 것 같았다.
“전체 초대장이 아니야. 용호 너한테 특별히 보낸 초대장이라고!”
카이완이 흥분해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가 직접 위대한 마몬 가라 칭했다.
엘리고스는 간만에 눈시울을 붉혔다. 카타리나 역시 가슴 벅찬 얼굴로 귀를 파닥거렸다. 눈가엔 물기가 어렸다.
오필리아는 그런 엘리고스와 카타리나를 이해했다.
마몬 가가 인정받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몰락한 끝에 모두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던 마몬 가가.
남부 공백지 마왕들의 연회에조차 초대받지 못하던 그 마몬 가가.
뒤늦게 합류한 오필리아 자신조차도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하물며 그 어려운 세월을 피부로 느낀 엘리고스와 카타리나는 오죽하겠는가.
카이완 역시 약간이지만 눈물을 보였다. 비록 자신이 가주이던 당시에는 이루지 못한 위업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더욱이 인정받은 것은 자신의 사랑이자 주군인 용호이지 않던가.
영상 속의 사마엘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칠주야 뒤에 특별 경매가 열릴 예정입니다. 마몬 가의 가주님께서도 부디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방문을 위한 편의는 이쪽에서 모두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하실 의사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초대장에 첨부한 소환 스크롤을 사용해 주십시오. 저희 직원이 가주 님을 찾아 뵐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밝힌 사마엘은 우아하게 예를 표했다.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초대장을 마무리 지었다.
[다시 뵙게 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영상이 끝났다. 카이완이 바로 물었다.
“다시 뵐 날이라니? 언제 만난 적 있어? 다섯 이사와?”
“어, 며칠 전에.”
반사적으로 답한 용호는 겉봉을 조금 더 살펴보았다. 과연 초대장과 동일한 크기의 스크롤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바로 그 때 카이완이 용호의 팔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갑작스런 애정 표현이라기보다는, 딴 짓하지 말고 마저 이야기해달라는 신호였다.
카타리나를 비롯한 다른 사역마들 역시 비슷한 시선이었기에 용호는 일단 초대장을 내려놓았다. 잠시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가상공간에서 우연찮게. 둘 다 시트리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시트리? 던전 상회의 그 시트리?”
이번에도 카이완이었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도 순간 놀라 눈을 깜박였다.
용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트리.”
용호 이전의 가주들이 즉위할 때마다 도움을 준 던전 상인. 하지만 막상 카이완 외의 가주들에게는 별반 관심을 주지 않았던 그녀.
“그리고 아마… 시트리도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일 거야.”
“시, 시트리 그 여자가 말씀이십니까?!”
엘리고스가 목소리를 떨었다. 카타리나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용호는 잠시 망설였다. 엘리고스와 카타리나가 이미 그로기 상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친걸음이었기에 다시 입을 벌렸다. 추가타를 날렸다.
“그리고 시트리는… 마몬의 여인 중에 한 명이고. 나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나… 할머니라고 해야 하려나?”
엘리고스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반면 카타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붉은 머리칼의 여자! 엘룬 님을 늘 괴롭… 아니, 아무튼 마몬 님의 연인 가운데 한 분이셨던 마녀!”
시트리도 붉은 머리였다. 오필리아가 넋이 나간 엘리고스를 대신해 설명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마몬 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여인들을 거느리셨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한 여인이 두 분 계셨죠. 마몬 님의 호위기사이자 여인이었던 엘룬 님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붉은 머리칼의 마녀입니다.”
용호는 속으로 자신의 조상인 구미호 연을 떠올렸지만 굳이 그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다.
카이완이 용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였구나.”
아마도 시트리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시트리가 카이완을 ‘앙칼지지만 귀여운 아이’라고 칭했던 것을 보면 꽤나 살가운 관계였을 터였다.
“아무튼 경매장인가.”
“던전 상회 경매장은 단순히 경매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남부 공백지에서도 주기적으로 열렸던 마왕들의 연회와 마찬가지로- 평소라면 결코 마주할 일이 없는 마왕들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만남의 장입니다.”
평정을 되찾은 티그리우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필리아도 말을 보탰다.
“긴장을 완화하는 수단이죠. 대화를 통해 직접 충돌을 피할 수도 있고요.”
“잠깐, 설마 마왕들의 연회라는 것도 던전 상회가 여는 거였어?”
“예, 몇 년에 한 번 꼴이지만요.”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왜 눈물까지 보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전대 가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결한 그 가주는 다른 가주들뿐만 아니라 던전 상회에조차 무시를 당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 던전 상회가, 그것도 던전 상회의 최고위층인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가 마몬 가를 인정했으니 감정이 북받치는 것도 당연했다. 가슴 깊이 묻어둔 서러움이 폭발했으리라.
“단순한 상단이 아니라는 건가?”
지금까지 이야기대로면 던전 상회는 그저 물건을 파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마치 국민의 복지를 신경 쓰는 정부처럼 마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여러 가지로 손을 썼다.
식량을 싼 가격에 공급한다든지, 방금 이야기처럼 긴장 완화의 수단을 마련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건을 팔려면 물건을 살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요. 마계라는 거대한 사회를 유지하는 편이 던전 상회에게도 이득이죠. 그래야 더 많이 팔 수 있으니까요.”
오필리아의 대답은 정론이었다. 수요 없이는 공급도, 수익 창출도 없는 법이었다.
“결국 돈인가. 돈이라면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별 생각 없이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의외일 정도로 오필리아가 반응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탐욕의 왕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죠.”
단순히 상인정신 때문이 아니었다. 용호는 다른 누구도 아닌 탐욕의 왕이었다.
“돈, 여자, 권력… 욕망을 가진 이들이라면 끊임없이 탐할만한 것들이죠.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할까요?”
그리고 그 욕망이 바로 용호의 힘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탐욕의 왕이 그 정도면 만족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다니.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 용호는 자신의 양 팔을 각각 세게 붙잡는 카타리나와 카이완을 느꼈다.
카타리나는 울상이 된 채로 귀를 늘어트렸고, 카이완은 참으로 오랜만에 표독스런 눈으로 용호 자신을 노려보았다. 서로 상반된 얼굴이었지만 속에 품은 뜻은 대충 동일한 것 같았다.
‘여자는 그만!’
용호는 헛기침을 터트렸다.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초대에 응할지 말지 여부를 결정해야겠네.”
용호가 다시 카드에 시선을 두었다. 티그리우스가 말했다.
“견문을 넓히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북부에서 한창 전쟁이 이어지는 중이라 하나... 던전 상회의 특별 경매라면 마계 유수의 실력자들이 모여들 겁니다.”
‘확실히.’
용호는 시트리와 함께 경매장에 참석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좋은 경험이었다. 그때 더 넓은 세상을 보았기에, 하늘 위의 하늘을 보았기에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때의 성장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용호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브리가다도 챙겼고.’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더 좋은 매물이 용호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좋아, 그럼 남은 건 경매장 참석 전에 일을 마무리 짓는 것뿐인가.”
동부에는 아직 사르가타나스의 던전과 몇 개인가 되는 중소 던전들이 남아 있었다. 지금의 용호에게는 손만 뻗으면 손에 넣을 수 있는 던전들이었다.
좋은 매물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었다. 경매장 참가를 위해서라도 돈을 싹싹 긁어모을 때였다.
용호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고, 소리 없이 지켜보던 아몬은 안심했다. 용호의 탐욕은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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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이 도착하고 정확히 일주일 뒤.
스트라바디의 던전에 이어 사르가타나스의 던전까지 완벽하게 정리한 용호는 나가라쟈 가주의 던전 입구에 섰다. 한껏 멋지게 차려입은 카이완과 카타리나가 그런 용호의 좌우에 섰고, 나머지 예속 사역마들은 입구에 서서 용호를 배웅했다.
던전 상회는 언제나처럼 시간을 잘 지켰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 너머로 던전 상회의 비행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제 51장 #2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