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49화 (149/227)
  • < 제 50장 #3 >

    “그런데 대체 어떻게.”

    스트라바디는 낮은 목소리를 토했다. 노성을 토하는 대신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비상식적인 상황에서 무언가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동부의 네 기사라 불리는, 스트라바디의 예속 사역마들 역시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던전의 영혼이 허공에 펼친 던전 지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스트라바디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마몬 가의 침투 병력들은 똑바로 진군하고 있었다.

    똑바로. 조금의 주저나 헤맴도 없이 완벽하게, 오직 최단 루트를 통해서.

    스트라바디의 자랑인 던전 구조 변형조차 별반 힘을 발하지 못했다. 갈림길과 통로 일부를 조작해 길을 바꾸면 마몬 가의 침투 부대는 그에 딱 맞게 루트를 변경하였다.

    네 기사들은 던전 구조를 완벽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구조 변경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더욱이 마몬 가의 침투 부대는 정확히 변경의 핵심이 되는 구조물들을 골라내 파괴했다. 스트라바디가 던전을 변경할 여지 자체를 조금씩 줄여나갔다.

    스트라바디의 던전은 더 이상 미궁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외길 던전에 불과했다. 더욱이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몬 가는 대규모 부대를 던전에 쏟아 붓지 않았다. 불과 사십 여명이라는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 침투했다. 더욱이 앞에 나서는 것은 평범한 사역마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힘을 갖춘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이었다.

    함정과 사역마 모두 마몬 가를 막지 못했다. 미궁이기에 필연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었던 통로는 오히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스트라바디의 사역마들은 정면에서 감당하지 못할 적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수적 우위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경우를 대비해 던전에는 ‘집결지’와 적의 정예를 격파하는데 특화된 ‘특수부대’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스트라바디의 특수부대는 강했다. 오직 집결지에서의 전투만을 목적으로 양성된 이들은 집결지 내에서라면 자신들보다 곱절은 강한 자들도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 강했다. 강해도 너무 강했다. 이건 숫제 가주 연합- 그것도 수장급만 모인 가주 연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궁이 무력화 되었다. 함정과 사역마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둘 중 하나만 일어났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애당초 마몬 가의 저력은 이미 예측한 바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둘이 동시에 일어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번에도 계산이 어긋나고 말았다.

    스트라바디는 눈을 떴다. 다시 한 번 노여움을 억누르고 옥좌에서 일어섰다. 당초 계획과 달리 마몬 가를 지치게 하는데 실패했기에 위험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더 이상은 방법이 없었다.

    “각개격파를 시도한다.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스트라바디의 명령에 네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 속에 복명한 뒤 서둘러 마왕의 방을 나섰다.

    마몬 가의 침투 병력은 현재 한데 뭉쳐 다니고 있었다. 이 와중에 각개격파를 한다는 것은 그저 꿈같은 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트라바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마왕으로서의 역량이 남아 있었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을 하나씩 낚아챈다. 가주 연합의 수장 급에 육박하는 힘을 가진 놈들을 하나하나 먹어치워 마몬 가 가주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스트라바디 자신의 힘을 키운다.

    ‘우선적으로 노릴 것은 잿빛 머리의 계집.’

    하얀 머리칼의 다크 엘프는 너무 빨랐다. 더욱이 호위기사라도 되는지 마몬 가의 가주 곁에 항상 달라붙어 있었다.

    붉은 야수와 맹수는 항시 짝을 이뤘다. 움직임 역시 짐승 같았기에 둘 중 하나만 낚아채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함정을 해체하는 마법사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역시 다크 엘프 계집마냥 마몬 가의 가주에게서 거리를 두지 않았다.

    해골기사 역시 좋지 못했다. 죽음의 기운이 깃든 언데드의 정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흡수할 수 없었다. 우선순위만을 논한다면 제일 마지막이었다.

    소거법상 남는 것은 잿빛 머리칼의 계집뿐이었다. 그리고 비단 소거법이 아니더라도 잿빛 머리칼의 계집을 택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녀석은 언제나 앞장섰다. 공격 방식이 화려하고 광범위한 덕분인지 다른 예속 사역마들과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마력까지 강대했다. 잡아먹는다면 상당한 마력 상승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스트라바디는 던전의 영혼과 다시 한 번 소통했다. 정면을 보았고, 권능을 발동시켰다.

    공간을 뛰어넘었다.

    &

    “합체 마법! 거스트 오브 아이스!”

    티그리우스가 일으킨 거센 바람이 바닥에 낮게 깔렸다. 벽면에서 새어나오는 진한 녹색의 독기를 밀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통째로 얼려버렸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는 나란히 날뛰었다. 제법 넓다고 하나 결국 실내에 불과한 집결지는 스트라바디의 사역마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눈앞에서 날뛰는 짐승들에게서 도망칠 곳이 없었다.

    용호는 집결지 후방에 서서 예속 사역마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탐욕으로 길을 찾는 것 외에는 힘쓰는 일을 자제하는 중이었다. 이 던전 최심부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스트라바디와 사르가타나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을 비축해두어야만 했다.

    카타리나 역시 같은 이유로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스컬 또한 스컬 부대를 지휘할 뿐 후방에서 대기로 일관했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 가운데서 현재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은 엘리고스와 오필리아, 카이완 이렇게 셋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셋도 전력을 다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들어와! 들어와!”

    카이완이 고성을 토하며 사복검을 휘둘렀다. 집결지의 천장에 닿지 않을 정도의 길이로만 딱 늘어난 사복검이 칼날에 걸리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겼다. 숫제 칼날의 소용돌이라 해도 좋았다.

    처참한 학살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스트라바디의 특수부대는 전의를 잃지 않았다. 반복된 세뇌과정을 거친 이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에게 조금이라도 손상을 가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다.

    집결지 곳곳에서 커다란 폭발이 연이어졌다. 특수부대의 자폭이었다.

    특수부대와 바로 근접해 싸우던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는 급히 손발을 놀려 폭발로부터 스스로를 지켰다. 티그리우스는 다시 한 번 거센 바람을 일으켜 폭발의 불꽃과 열기를 밀어냈다.

    카이완 또한 폭발에 휩쓸렸다. 급히 왜곡의 장벽을 펼쳤기에 약간의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시야가 차단되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카이완은 숨도 고를 겸 사복검을 잠시 늘어트렸다. 눈앞의 흙먼지가 티그리우스의 바람에 흩날리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긴 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카이완!”

    카타리나가 돌연 벼락처럼 외쳤다. 카이완에게 접근하는 살기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경고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카이완은 반사적으로 카타리나를 돌아보았고, 그로인해 사각이 더욱 커졌다. 상대에게 시간을 허락하고 말았다.

    스트라바디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카이완과 카타리나의 시선이 교차한 그 순간에 그는 카이완의 등 뒤에 자리했다. 카이완의 허리를 낚아챔과 동시에 마력을 개방했다.

    소리 없는 포효였다. 집결지 전체가 진감했다. 스트라바디의 거친 마력이 카이완을 억압했다.

    “스트라바디!”

    용호가 소리쳤다. 카타리나는 지면을 박찼다. 카이완이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스트라바디의 팔을 보았다.

    그리고 스트라바디는 자신이 출발했던 곳을 보았다. 도약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도약의 권능은 무적이 아니었다. 최대 600미터나 되는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었지만 결정적인 제약이 하나 존재했다.

    스트라바디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곳.

    오직 그곳을 향해서만 공간 도약을 할 수 있었다.

    카타리나의 월광검이 허공을 베었다. 집결지 출구 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스트라바디는 지체하지 않고 연달아 권능을 발동시켰다. 던전의 영혼을 통해 던전 지형을 변경함으로써 자신의 시야를 확보하는 한편 마몬 가의 시야를 차단시켰다.

    정확히 일곱 번.

    공간도약이 끝났을 때 스트라바디는 지하 3층에 위치한 마지막 집결지에 서 있었다. 아무런 배려 없이 이루어진 공간 도약에 고스란히 노출된 카이완은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여덟 번째 공간 도약이 이루어졌다. 카이완이 몸을 비틀며 휘두른 사복검으로부터 사 미터 가량 거리를 둔 곳에 스트라바디가 나타났다. 스트라바디는 가볍게 돌아서서 중력의 법칙에 따라 바닥에 추락한 카이완을 보았다. 지체 없이 다음 수를 펼쳤다.

    던전의 영혼이 집결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집결지로부터 강력한 저주의 마법이 발동했다. 미리 와 대기하도 있던 네 기사 역시 각자 술법을 펼쳐 저주의 힘을 강화시켰다.

    가장 기본적이며, 그렇기에 가장 효과적인 약화의 저주였다.

    카이완은 몸을 떨었다. 마력을 개방해 저주를 떨쳐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가라쟈 특유의 독이 온몸에 퍼진 탓이었다. 아마도 스트라바디에게 허리를 붙잡혔을 때 중독당한 모양이었다. 더욱이 스트라바디는 카이완을 아무 곳에나 내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카이완의 추락 지점은 독 웅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키가 크고 마른 스트라바디는 뱀과 같은 사내였다. 갈색에 가까운 금발 아래 지적이인 얼굴을 가진 그는 던전 전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엷은 미소를 그렸다.

    스트라바디의 이마와 귀 위로 솟은 다섯 개의 뿔 모두가 미세하게 떨렸다. 사르가타나스를 먹어치움에 따라 폭발적으로 증가한 압도적인 마력이 집결지 내부를 가득 채웠다.

    카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까스로 뿔을 개방한 뒤 곧장 왜곡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거북이가 집 속에 숨듯이 반구 형태로 만든 왜곡의 방패로 전신을 보호했다. 아예 싸우기를 포기하고 버티기만 하겠다는 태도였다.

    끌끌 혀를 찬 스트라바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으로 무익한 행동이었다. 카이완의 저 행동이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약해진 상태로 펼친 방패 따위 강대한 마력으로 얼마든지 찢어발길 수 있었다.

    “네 년을 먹어치워 주마.”

    카이완은 욕지거리를 토하는 대신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스트라바디의 공격을 과연 몇 번이나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스트라바디가 가느다란 세검을 뽑아들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왜곡의 방패를 강타했다.

    정확히 세 번.

    카이완은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피를 토했다. 가까스로 유지하던 왜곡의 방패가 깨진 여파였다. 나가라쟈의 독이 내장을 상하게 했다.

    스트라바디는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쓸데없이 카이완을 괴롭히는데 시간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구둣발로 카이완의 복부를 짓밟았다. 고정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세검으로 가슴을 노렸다.

    그리고 천장이 폭발했다.

    집결지에 흐르던 마력의 흐름이 끊겼다. 저주가 파괴되었다. 네 기사는 경악성을 토하며 부서진 천장을 보았다.

    스트라바디도 돌아섰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성을 집어던지고 노성을 터트렸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도대체 무슨 수로!”

    마력의 흐름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한 집결지였다. 예속 사역마가 발하는 마력을 따라 추적해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길을 안다? 그것도 불가능했다. 지하 2층에서 3층의 집결지로 이동한 것은 제대로 된 길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스트라바디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엉뚱한 곳에서 공간을 도약한 결과였다.

    그런데 어떻게 추적해왔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용호는 대답하기에 앞서 보았다. 오직 한 갈래로 뭉친 탐욕의 연기가 집결지 안에 자리한 카이완을 단단히 휘감았다. 카이완은 고통 속에 웃었고, 용호는 약간은 뻔뻔하게 말했다.

    “그야, 내꺼니까.”

    “뭐?”

    스트라바디가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용호는 대답하는 대신 오른 손을 허공에 뻗었다.

    홍련의 마창 아몬을 움켜쥐었다.

    &

    < 제 50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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