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48화 (148/227)
  • < 제 50장 #2 >

    &

    [인식 번호 : 009]

    [그 남자의 후예.]

    [마몬 가의 현 가주 천용호]

    [인식을 완료했습니다. 환영합니다.]

    온통 하얀 가상공간에 도착하자마자 빛의 문자가 눈앞에 펼쳐지며 딱딱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한 번 경험해본 일이었기에 용호는 당황하는 대신 기다렸다. 예상대로 설명이 이어졌다.

    [시트리 님은 현재 개인 업무를 처리 중이십니다.]

    [지금은 시트리 님과 대화하실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통상모드로 거래에 임하시겠습니까?]

    용호는 잠시 고민했다. 지난번에는 통상 거래를 하며 시트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시트리와의 대화가 즐거운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 용호 자신은 가상공간에 놀러온 것이 아니었다. 보급 물자와 던전 공략을 위한 각종 장비들을 구매하러 온 것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북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왕들 간의 전쟁이 상상 이상으로 던전 상회에 영향을 주는 모양이었다.

    “통상 거래를 부탁한다. 보급 물자와 던전 공략 장비를 사고 싶다.”

    [알겠습니다. 관련된 카탈로그들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용호의 등 뒤로 하얀 의자가 솟아올랐다. 용호는 자리에 앉아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두 권의 카탈로그가 용호의 손에 쥐어졌다.

    ‘일단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식량이랑 던전 조명- 여자?’

    마지막은 생각의 종류가 달랐다. 불현듯 느껴진 감각에 퍼뜩 고개를 든 용호는 조금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땅이 모두 순백이기에 지평선조차 구분할 수 없는 온통 하얀 세상에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

    환한 금발과 새카만 날개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단정하면서도 활동적인 정장 차람은 인계의 커리어 우먼을 연상시켰다.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난 미녀였다. 마치 허공을 계단 밟듯이 내려온 그녀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아무래도 용호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달라.’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놀란 것 같았다.

    용호는 일단 바닥에서 탁자를 불러내 카탈로그를 올려놓았다. 섣불리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여자 쪽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지켜볼 요량이었다.

    여자 쪽의 고민은 짧았다. 그녀는 날개를 한 번 크게 펄럭이더니 순식간에 용호와의 거리를 좁혔다. 가까이서 보니 검은 날개에도 불구하고 ‘천사’라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로 착하고 순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었다. 순한 양처럼 부드러운 두 눈에는 날카로운 총기가 빛나고 있었다.

    용호 앞에 착지한 그녀는 시트리가 그랬던 것처럼 공손히 예를 표했다. 살포시 미소 지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인 사마엘이라고 합니다.”

    “천용호입니다.”

    용호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사마엘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용호와 사마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빠르게 탐색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마엘이었다.

    “마몬 가의 가주시군요. 남부에서의 활약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마엘이 다시 한 번 예를 표했다. 아무래도 용호와 시선을 교환하던 그 짧은 사이에 던전 상회로부터 무언가 정보를 열람한 모양이었다.

    용호 역시 사마엘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던전 상회 경매장.’

    시트리와 함께 참여했던 그곳의 관리자.

    그녀가 이곳에는 왜 온 것일까. 어째서 용호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인계로 치자면 사마엘은 전 세계를 주름잡는 국제기업의 임원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유럽 대륙 쪽의 일을 총괄하는 엄청난 위치의 임원 말이다.

    그런데 사마엘은 지금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버려진 땅이라 불리는 변경지의 가주를 눈앞에 두고 말이다.

    물론 변경지의 상황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용호 자신의 힘 역시 이제는 마계의 제법 유력한 마왕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아무리 던전 상회의 이사라 해도 하찮게 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찮게 보지 않는 것과 지금처럼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시트리 님을 뵈러 왔는데 예기치 않게 귀인을 뵙게 되었네요. 평소에도 시트리 님과 거래를 하시나요?”

    고민이 무색하게도 사마엘이 선뜻 답을 제시했다. 그녀는 지금 시트리 때문에 용호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용호는 사마엘의 질문을 곱씹었다. 평소에도 시트리와 거래를 하냐는 질문과 그녀가 처음 이 공간에 나타났을 때 보인 행동- 누군가가 이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 모습으로부터 숨은 내용들을 읽어냈다.

    시트리가 누군가와 직접 거래를 하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사마엘은 어째서 시트리가 용호 자신과는 직접 대면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사마엘.”

    용호가 아니었다. 사마엘은 자연스럽게 돌아섰다.

    “시트리 님.”

    나이트가운 차림인 시트리는 숨을 한 번 길게 토했다. 피로를 감추고 용호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부탁드릴게요.”

    사마엘이 다시 용호를 돌아보았다. 용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러자 시트리와 사마엘이 사라졌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시트리가 나타났다.

    “사마엘 씨는?”

    용호가 반사적으로 묻자 시트리는 눈썹을 팔八자로 만들었다. 입술을 한 차례 움츠리더니 용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일단 돌려보냈습니다. 혹시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던가요?”

    “아니오, 전혀요.”

    용호의 대답에 시트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토했다. 일전 마몬과 관계된 기억들을 들켰을 때처럼 마음이 편치 않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다시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지은 시트리는 가볍게 자신의 가슴팍을 눌렀다. 눈 깜빡할 사이에 나이트가운을 지우고 평소 즐겨 입던 드레스를 걸쳤다.

    “방금, 동공 커지신 거 알아요?”

    짓궂은 목소리에 용호는 대답 대신 헛기침을 토했다. 시트리는 평소처럼 까르르 웃었다.

    “자, 오늘은 어떤 거래를 하러 오셨나요? 죄송하기도 하니 평소보다 살짝 더 서비스를 해드리죠.”

    살짝이란 말에 맞춰 윙크한 시트리는 어느새 솟아오른 의자에 털썩 앉아 등을 기댔다. 용호 역시 자리에 앉았다. 시트리의 바람대로 거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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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공간에서의 거래가 끝났다. 접속 역시 끊어졌다. 하지만 용호는 바로 눈을 뜨는 대신 잠시 미뤄두었던 생각을 했다.

    사마엘은 시트리에게 존대를 했다. 그리고 시트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인 사마엘을 단 몇 초 만에 되돌려 보냈다.

    ‘최소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라는 건가?’

    늘상 농담처럼 말하던 ‘거물’이란 말이 사실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트리는 탐욕의 왕 마몬의 연인이었다. 이는 곧 그녀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거마 중의 거마라는 뜻이었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라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때문에 그다지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시트리가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든 아니든 지금의 관계가 딱히 변할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다섯 이사들- 적어도 사마엘은 시트리와 마몬의 관계를 몰라. 그리고 시트리는… 그 관계를 감추고 싶어해.’

    약간의 가정이 섞였지만 제법 타당한 결론이었다. 여기에 용호는 한 가지 생각을 덧붙였다.

    시트리와 자주 만남을 가지는 가주. 그런 가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지는 것은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괜한 기우인가?’

    어쩌면 별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정말 뭔가 큰일이라면 시트리는 사마엘이 아니라 용호 자신을 돌려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만은 분명했다. 괜히 불필요한 시선을 끌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찌되었든.’

    용호는 눈을 떴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당장 눈앞에 주어진 과제는 동부를 제압하는 일이었다.

    “다녀오셨어요?”

    “싸게 많이 사 왔어? 내 선물은?”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용호는 둘 대신 사무적인 대화를 위해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를 찾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

    용호는 스트라바디의 던전 공략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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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 공략의 정석에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했다.

    하나, 대규모 부대를 밀어붙여 양으로 함정을 무력화 시키는 무식한 방법.

    둘, 최정예 부대를 침투시켜 제대로 던전을 공략하는 방법.

    대부분의 가주들은 여력만 있다면 두 번째 방법보다는 첫 번째 방법을 선호했다. 비록 피해가 크더라도 말이다.

    던전은 공격자에게 있어서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수비자에게는 그야말로 궁극의 홈그라운드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곳에 최정예 부대를 진입시키는 것은 위험했다. 혹시라도 최정예 사역마가 예기치 못한 함정에 빠져 죽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돈만 있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저질의 사역마와는 달랐다. 최정예 사역마는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물며 죽은 게 예속 사역마라도 되었다가는 가주 자신에게 상당한 타격이 돌아왔다.

    때문에 작금 마계의 던전 공략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질의 대규모 부대를 진입시켜 수비자의 함정을 무력화시키는 한 편 던전 내부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이후 무력화된 함정지대를 지나 최정예 부대를 투입, 수비자의 정예 부대를 꺾고 던전을 함락시킨다.

    공격자들의 전술을 선택할 때 수비자들 역시 전술을 선택하기 마련이었다. 공격자들의 전술이 저리 변하니 수비자들 또한 그에 맞게 던전을 변형시켰다.

    위력과 정확도가 높은 함정보다는 유효 범위가 넓고 학살에 특화된 함정들이 선호되었다. 던전 구조는 소수보다는 다수를 상대하기 쉬운 쪽으로, 다수를 한 번에 가둘 수 있는 형태로 변화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던전을 공략하는 입장에서 가장 짜증나고 곤란한 일은 무엇일까?

    던전 공략 경험이 별로 없는 용호도 저 질문에는 쉬이 답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즐겨하던 PC게임만 생각해봐도 금방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던전에서 길을 잃는 것.

    바른 길을 찾지 못해 계속 같은 곳을 헤매는 것.

    과거 던전 제작으로 이름이 높았던 마왕 아우르파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고이자 최악의 던전은 곧 미궁이다.”

    합리의 추구자인 스트라바디는 그의 던전을 미궁으로 만들었다.

    일단 거대했다. 공백지에 존재하는 평범한 던전이라면 세 개에서 네 개 정도 담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더욱이 길이 복잡했다. 단순히 갈림길이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 스트라바디의 던전은 실시간으로 내부 구조를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가변성이 추가되거나 길이 지나치게 복잡하면 던전 벽의 내구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스트라바디는 이 문제를 굉장히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던전 부지를 넓힌다. 충분한 두께와 강도를 가진 벽들로도 복잡한 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던전 부지가 넓으면 해결될 문제이지 않은가.

    던전 구조를 완벽하게 꿰고 있는 것은 오직 던전의 설계자인 스트라바디 본인 한 사람뿐이었다. 사역마들은 자신들에게 배정받은 구역 이상을 알지 못했다.

    던전 최심부에 위치한 마왕의 방에 자리한 스트라바디는 자신의 던전을, 공들여 만든 미궁을 믿었다. 그렇기에 언제나처럼 합리적이고 단순한 전략을 구상했다.

    스트라바디에게 있어 마몬 가는 이제 유일무이한 난적이었다. 그 하나만 쓰러트리면 되었기에 이번 던전 전투에 여력을 아끼지 않았다.

    던전으로 마몬 가의 전투력을 깎는다. 그들을 지치게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사역마고 함정이고 아낌없이 사용하다.

    진정한 미궁은 진입뿐만 아니라 후퇴 또한 쉬이 허락하지 않는 법이었다. 일단 진입을 유도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일은 반쯤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몬 가의 가주와 예속 사역마들은 미궁 속에서 천천히 죽어갈 터였다.

    그랬다.

    그래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 제 50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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