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46화 (146/227)

< 제 49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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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분명 크고 강렬했다.

녹색의 태양이 지면을 강타한 순간 주변 일대가 초열지옥으로 화하였다.

용호 기준으로는 엠브리오와의 싸움에서 만들어냈던 녹염의 태양보다 지금의 태양이 더 작고 약했다. 카이완을 예속 사역마로 삼음으로써 보다 강해진 용호였지만 마력을 모은 시간의 절댓값 자체가 엠브리오 전 때의 삼분의 일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대국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예비대가 불타올랐다. 사방을 뒤덮는 녹염 속에서 스트라바디는 혼란에 빠졌다. 병사들이 불타 죽으며 외치는 울부짖음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스트라바디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발산했다. 자신을 집어삼키고자 덤비는 녹염을 몰아냈다. 그 열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력의 막을 만들어냈다. 한기 속성을 가진 그의 마력은 녹염을 밀어냈을 뿐만 아니라 스트라바디에게 침착함 또한 부여했다.

스트라바디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병력을 수습해 이상적인 후퇴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

자신과 사르가타나스가 합류하면 이 대국을 뒤집을 수 있는가.

불가능을 떠올린 순간 스트라바디의 이성은 바로 다음 계획을 떠올렸다. 생각과 동시에 스트라바디가 소리쳤다.

“사르가타나스!”

“장인!”

한기가 녹염을 갈라 길을 열었다. 스트라바디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력을 발산해 스스로를 지킨 사르가타나스를 보았다. 보랏빛 피부의 거한인 녀석의 머리 위에는 다섯 개의 뿔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보니 한바탕 분전을 각오한 모양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소리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을 뻗어 사르가타나스를 붙잡았다.

“후퇴한다.”

“장인?!”

시선이 교차했다. 사르가타나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고지식하나 우둔한 녀석은 아니었다. 스트라바디가 말한 후퇴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했다.

이 전장의 동부 군 전체를 버린다. 단 둘이서 도망친다.

사르가타나스는 입을 벌렸다. 달변가인데다가 전략가인 스트라바디를 설득할 자신은 없었지만 무슨 말이든 하고자 했다. 이 자리에 있는 동부 군과 가주들을 모두 합치면 이천이 넘었다. 그런데 그들을 전부 버린다?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은 허락할 수 없었-

사르가타나스는 순간 숨을 멈췄다. 스트라바디는 아무 말 없이 사르가타나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 이상은 시간이 없었다. 녹염 너머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의 소유자가- 저 마몬 가의 가주가 다가옴이 느껴졌다.

사르가타나스는 이를 악물었다. 스트라바디가 권능을 발동시켰다.

스트라바디의 이명은 도약의 마왕.

두 가주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녹염 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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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대를 불태우고 있는 녹염을 향해 급강하를 시도하던 살라미가 돌연 다시 날갯짓을 했다. 순간 방향을 바꿔 고도를 높였다.

용호 역시 스트라바디와 사르가타나스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다섯 개의 뿔을 모두 개방한 사르가타나스의 마력이 거짓말처럼 증발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과거 티그리우스가 했던 것처럼 근거리 공간 도약을 펼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단순히 마력을 감추고 근방에 숨은 것일 수도 있었다.

‘뿔 다섯 개 급은 되었어.’

사르가타나스가 마력을 방출한 순간은 짧았다. 하지만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극히 뛰어난 용호였다. 녹염 사이에서 피어오른 마력의 크기와 색, 속성을 고려했을 때 사르가타나스는 뿔 다섯 개 급의 마왕임이 분명했다.

뿔의 개수가 같다하여 그 마력의 강약마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개수 내에서의 강약의 범위는 뿔의 개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넓어졌다.

사르가타나스의 마력은 뿔 다섯 개를 겨우 만들어낸 수준인 카이완보다 조금 더 강하거나 비슷했다. 스트라바디 역시 비슷한 수준이라 생각하면 뿔 다섯 개 짜리 마왕이 둘인 셈이니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마몬 가의 전력이라면 사르가타나스와 스트라바디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아직 둘의 권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판국에 너무 성급한 판단일지 몰랐지만, 용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염 속에 뛰어들어 동부 군의 두 수장을 상대로 결전을 각오했던 카타리나는 살라미가 방향을 바꾸자 의아한 눈으로 용호를 보았다. 오른손에는 지금까지 사용하던 단검 대신 엘룬에게 계승받은 월광검이 들려 있었다. 마치 초승달처럼 생긴 은빛의 검이었다.

“도망친 모양이야. 일단은 전장을 정리하자.”

카타리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용호는 살라미에게 선회를 명령했다. 스트라바디가 거느리고 있던 예비대는 수백에 달했고, 그중 녹색 태양에 당한 놈들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더 신경 쓰지 않았다. 본대 자체가 와해된 지금, 지휘관까지 잃은 놈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용호의 예상대로 예비대는 전장에 합류하는 대신 도망치기 시작했다. 동부 군의 압도적인 패배를 사방에 전할 산증인들이었다.

살라미가 다시 날갯짓을 했다. 눈을 가늘게 떠 지상에서 주인과 함께 활보 중인 부케팔로스를 보았다.

살라미가 ‘파이어 엘리멘탈 드래곤’으로 승급했듯이 부케팔로스 역시 ‘나이트메어 로드’로 승급을 했다. 일반적인 전마보다 두 배 이상 거대한 크기에 녹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갈기와 칠흑의 육신을 가진 부케팔로스는 평범한 팬텀스티드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녹색 안광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동부 군의 병사들이 기겁해 무기를 놓칠 지경이었다.

주인인 스컬과 인마일체가 되어 전장을 질타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살라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을 보니 라이벌의 자태가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지상에서는 전투가 아닌 학살극이 벌어졌다.

대형을 갖춘 두 군대가 정면에서 전투를 벌이면 의외일 정도로 사망자가 적게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의 대형이 무너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여기에 더해 어느 한 쪽이 등을 보이고 도주를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사망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러 회전에서 패배한 쪽이 승리한 쪽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상자를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만큼 대형을 잃고 도망치는 군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스컬 부대의 압도적인 파괴력은 정면에서부터 동부 군의 대형을 깨부쉈다. 부케팔로스와 하나되어 흡사 바포메트와 같이 사방에 죽음을 뿌리는 스컬은 존재 자체가 동부 군의 재앙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대형이 무너진 데에는 엘리고스와 오필리아, 카이완의 합류가 컸다.

세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카이완은 전장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았다.

일반적인 장수의 역할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립 기동대라 명명받은 세 예속 사역마들의 역할은 달랐다. 카이완은 자신을 암살자- 아니, 저격수라 생각했다.

“벌 받을 시간이야!”

카이완의 사복검이 고군분투 중이던 동부 군 가주의 허리를 휘감았다. 상대가 뭔가 반항할 틈도 없이 사복검을 거칠게 휘둘러 땅바닥에 매다 꽂았다. 연달아 휘둘러 몇 번이고 지면에 충돌시켰다.

카이완은 무척이나 화려하게 싸웠다. 가늘고 높은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동부 군의 시선을 자신에게 모았다. 카이완의 표적은 단순했다. 말을 타고 있는 자. 잘 싸우는 자. 소리를 지르는 자. 지휘를 하는 자. 후방에서 마법으로 지원을 하는 자.

수많은 개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이게 하는 구심점들만을 골라 공격했다. 잡병 수십을 쓰러트리는 것보다 가주 하나를 쓰러트리는 쪽이 몇 배나 더 이득이었다.

야수성을 폭발시킨 엘리고스는 정밀한 조절이 불가능했지만 오필리아는 아니었다. 이내 카이완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녀와 똑같이 행동했다.

지휘관의 부재는 곧 전선 전체의 붕괴를 야기했다. 싸울 의지를 잃은 동부 군은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는 곧 대학살의 신호탄이 되었다.

카이완에 의해 몇 번이나 땅에 내동댕이쳐진 동부 군 가주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온 몸에 뼈가 다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열이 끓어올랐다. 고통 때문에 권능을 발하는 것도 무리였다.

카이완은 그런 가주에게 다가가 사복검을 풀었다. 전투의 승패가 갈린 상황이었기에 무익한 살생을 하지 않았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가주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살려는 드릴게.”

생긋 웃은 카이완은 허리를 곧이 세우고 하늘을 보았다. 살라미에 탄 용호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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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바디는 연속해서 권능을 사용했다. 그의 권능인 공간 도약은 충분히 집중한 상태라면 최대 600미터의 거리를 한 순간에 뛰어넘을 수 있었다. 연속해서 사용한다면 순식간에 몇 km 이상을 도망치는 것도 가능했다.

정확히 열 번. 전장에서 약 6km가량 거리를 둔 기암 지대에 착지한 스트라바디는 차오른 숨을 골랐다. 이용하기에 따라 실로 사기적인 능력을 발할 수 있는 공간 도약이었지만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력과 체력을 함께 소진했기에 너무 많은 사용은 빠른 전투력 손실을 야기했다.

때문에 스트라바디는 언제나 합리에 근거하여 공간 도약을 사용했다. 열 번이란 사용 횟수는 충동적으로 나온 숫자가 아니었다.

사르가타나스는 다섯 개의 뿔 모두를 해제하고 급히 서쪽을 돌아보았다. 6km 밖인 데다가 기암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전장을 바라볼 수 없었다.

“맙소사.”

넋이 나간 목소리였다. 이천에 달하는 병사들을, 그것도 함께 북부를 공략했던 이들을 모조리 사지에 버리고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패배였다. 마몬 가의 저력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한 번 싸울 것인가? 아니면 동부를 고스란히 바쳐 목숨을 구걸할 것인가.

사르가타나스는 힘겨운 얼굴로 돌아섰다. 처음 의기투합한 이후로 늘 방향을 제시해준 자신의 맹우이자 장인인 스트라바디를 보았다.

“놈은 강하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

스트라바디는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마몬 가의 가주의 강함과 휘하 예속 사역마들의 힘을 추론했다. 한 가지 결론을 이끌어냈다.

“장인.”

스트라바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곧이 세우고 혼란에 빠진 사르가타나스를 마주했다. 긴한 말을 전하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말을 잘 들어라, 사르가타나스.”

사르카타나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동부를 일통하고 북부를 휩쓰는 내내 존중하고 따랐던 장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입술을 벌렸다. 신음에 이어 피를 토했다. 자신의 가슴에 박힌 스트라바디의 손을 보았다.

경악을 토할 틈 같은 것은 없었다. 스트라바디는 사르가타나스의 반항 일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사르가타나스가 다시 고개를 든 순간 한 손에 거머쥔 사르가타나스의 심장을 터트렸다.

소리없는 비명이 터졌다. 스트라바디는 다른 한 손으로 사르가타나스의 입을 막았다. 그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마력을 발산함과 동시에 마법을 행사했다. 부지불식간에 심장을 잃은 사르가타나스의 최후의 발악마저도 무위로 돌려버렸다.

강대한 마왕이었던 사르가타나스는 심장이 터졌음에도 바로 절명하지 않았다. 그는 원망과 분노를 실은 눈으로 스트라바디를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짜고자 노력했다.

스트라바디는 사르가타나스의 입을 막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약한 둘로 강대한 하나를 상대할 수는 없다. 너와 내가 함께 싸운다 하여 마몬 가를 이길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강자 하나이다. 회전이 아닌 던전 전투로 놈을 막아야 한다.”

사르가타나스의 눈이 떨렸다. 몸이 굳었고, 빠르게 온기를 잃었다.

“잘 가라, 사르가타나스. 이렇게 되어 애석하구나.”

진심이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스트라바디는 눈을 뜬 채로 사망한 사르가타나스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입을 막았던 손으로 눈을 감겨준 뒤 자신의 예속 사역마들을 감지했다. 모두 지령한 대로 전장을 벗어난 것 같았다.

스트라바디는 더는 감상적인 말을 쏟아내지 않았다. 사르가타나스의 정수를 집어삼켰다.

제 49장 - 압도 끝, 제 50장 - 던전 돌파로 이어집니다.

< 제 49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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