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9장 - 압도 >
제 49장 - 압도
카이완이 예속 사역마로 합류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카이완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했다. 더욱이 그 유능함은 전투원으로서가 아닌 다른 쪽에서의 유능함이었다.
“척 보기에도 던전이 너무 갑자기 커졌어.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아.”
카이완은 투기장의 강력한 사역마이기 전에 마몬 가의 가주였던 인물이었다. 그것도 망해가기 일보직전이었던 마몬 가를 주변 여러 가주들이 두려워할 정도의 가문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입지적인 가주 말이다.
던전 경영에 대한 노하우는 용호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영 경력도 무려 10년이나 되었다.
더욱이 카이완은 효율성의 화신이었다.
카이완은 작은 자원도 허투루 쓸 수 없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가주 직을 역임했었다. 남들에게는 쓰레기라 치부될 물건도 그녀의 손에서는 어딘가 제 역할을 하는 훌륭한 자원이 되었다.
카이완의 깔끔하고 정확한 일처리에는 오필리아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필리아도 꽤 우수한 경영자였지만 던전과 선술집은 달랐다. 확실히 카이완의 방식 쪽이 보다 효율성이 높았다.
용호는 이 의외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사장이 꼭 전문가가 될 필요 없다는 아버지 천기자의 말씀을 받들어 - 주로 배달을 시키실 때 그러셨다 - 카이완에게 사실상의 던전 경영인 자리를 맡겼다.
용호 스스로가 생각해도 썩 괜찮은 결정이었다.
카이완은 예속 사역마였다. 그런 그녀가 용호 자신을 배신할 걱정은 없었다.
일주일.
서부에서 귀환한 스컬과 티그리우스, 리쿰을 맞이한 용호는 마몬 가의 핵심 인력 모두를 참여시킨 대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장소는 탐욕의 미궁 1층으로 장소를 옮긴 마왕의 방이었다. 옥좌 앞에 놓인 커다란 탁자 좌우로 마몬 가의 가신들이 자리했다.
용호의 오른편 바로 옆자리에는 집사장인 엘리고스와 자유도시의 관리자인 오필리아가 자리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다시 란돌트 가 던전의 관리자인 티그리우스와 마몬 가 경비대장 리쿰, 공방 총책임자인 버그림이 앉았다.
용호는 왼쪽을 보았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카타리나와 카이완이 앉아 있었다. 카타리나는 기다란 귀를 늘어트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카이완은 그런 카타리나를 귀엽다는 듯이 반쯤 끌어안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었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마몬의 기억 속에서 본 엘룬과 시트리를 떠올렸다.
마왕이신데 뭐 어떠냐는 오필리아의 말을 추가로 떠올린 용호는 쓰게 웃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카타리나와 카이완 옆에 자리한 스컬을 보니 어쩐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현재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식탐의 왕의 위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예 잊을 문제도 아니었지만 항상 머리에 이고 있을 문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끼리면 모를까, 다른 사역마들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문제이기도 했다.
“새로 공략한 4층을 장악하기 위해 던전의 영혼- 루시아의 장악력을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의견을 제시한 것은 카이완이었다. 평소에는 용호에게 허물없이 반말을 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처럼 공적인 자리에서는 꼭 경어를 사용했다.
탐욕의 미궁 4층.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서 ‘게 자리’에 해당하는 ‘여덟 손의 바루나’는 엘룬과 마찬가지로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였다. 더욱이 그는 엘룬처럼 안배를 남기지도 않았다.
덕분에 용호는 스카자하가 처음 말했던 ‘거저먹기’를 할 수 있었지만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적법한 의식을 통해서 바루나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신기의 완성도는 높일 수 있었지만 바루나의 힘은 제대로 활용이 불가능했다.
‘여덟 손의 바루나’의 힘은 창조. 스카자하의 설명에 따르면 바루나는 창조의 힘을 이용해 거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수준의 일들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탐욕의 미궁의 건설자다운 능력이었다.
언젠가 바루나의 자리를 계승할 예속 사역마가 나타나면 다시 창조의 힘을 되살릴 수 있을 터였다. 마치 스컬과 카타리나가 각각 바포메트의 죽음과 엘룬의 정의를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용호는 아쉬운 가운데도 창조에 대한 미련을 접어둘 수 있었다.
카이완이 굳이 탐욕의 미궁 4층을 장악해야 한 이유는 4층에 갖춰진 시설들 때문이었다.
탐욕의 미궁 4층은 작업장이었다. 더욱이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났다. 반자동화된 공장이었기에 재료만 충분하다면 양질의 장비를 대량생산 하는 것도 가능했다.
《4층의 시설들은 정말 굉장합니다.》
《그 시설들을 활용할 수만 있다면 장담컨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무구들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기존의 것보다 더 강력한 함정의 자체 생산 역시 가능할 겁니다. 설계도면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버그림이 칠판에 열성적인 필체로 문장을 써내려갔다. 잔뜩 흥분했는지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길게 가지는 않았다. 기술자들이 언제나 직면하는 문제를 떠올린 버그림은 약간은 소심하게 새로운 문장을 추가했다.
《예산과 정수의 양을 조금만 더 늘려주신다면…….》
용호는 즉답해주지 못했다. 일단은 다음 사역마의 의견을 들었다. 이번에는 리쿰이었다.
“전투 마차와 각종 전장비를 추가로 구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운송에 쓸 수 있는 대형 사역마들 같이 특수화된 병종이 추가되면 전력을 크게 상승시킬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제법 강대한 가주들끼리 전쟁을 할 때는 다양한 종류의 사역마들이 투입되기 마련이었다.
거대한 바위를 던져 포탑 역할을 하는 마운틴 자이언트라든가, 탱크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거대 골렘이라든가, 한 번에 수십 명 이상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대형 비행 사역마 같은 것들 말이다.
진화의 권능을 가진 용호였지만 대형 사역마들을 단시간 내에 키워내는 것은 어려웠다. 스컬 부대를 구성하는 스켈레톤들을 양성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이번에도 용호는 즉답하는 대신 다음 의견을 들었다.
엘리고스가 약간은 소심하게 말했다.
“아비게일 가의 던전 은광에 작업용 골렘이 추가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필요하다’가 아니라 ‘좋을 것 같다’였다.
이미 앞에 나온 요구들만 해도 처리하는 데 상당한 예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시아를 키울 정수가 필요하다.
장비를 만들고 던전을 개량하기 위한 예산과 각종 자원이 부족하다.
용호는 마지막으로 스컬을 보았다. 스컬 역시 진지한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했다.
“스컬스컬.”
용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예속 사역마들은 용호에게 스컬이 무어라 했냐고 묻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현재 직면한 문제들.
이 모든 문제들을 단 번에 해결할 방책이 있기는 했다.
처음 세웠던 방침과는 달랐지만, 상황이 변한만큼 방침 역시 변해야 했다.
처음에는 투기장과 탐욕의 미궁을 공략하는 것만이 능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대가가 매혹적인 만큼 리스크 역시 큰 두 공간이었기에 공략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식탐의 왕 본인 혹은 그 수하들과 어디서 싸울 것인가.
던전이었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이번에는 마몬 가의 던전에서 싸워야 했다. 단순히 표면의 마몬 가뿐만 아니라 탐욕의 미궁까지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마왕은 자신의 던전에서 싸울 때 가장 강했다. 던전의 영혼을 통해 던전의 마력을 이용할 수 있었고, 던전에 설치된 각종 함정을 통해 지리적인 이점 역시 취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던전에서 싸울 채비를 갖춘다. 그러기 위해 던전을 개조한다.
보다 강한 던전을 위한 예산과 사역마들의 경험 모두를 짧은 시간 내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용호는 짧고 명확하게 말했다.
“동부를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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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를 양분한 두 가주 가운데 하나인 스트라바디는 스스로 전략가를 자처했다.
그는 뱀의 눈과 심장을 가진 나가라쟈였다. 여느 나가라쟈들이 그러하듯 스트라바디는 냉철했다. 동부의 양분이란 용단 역시 그의 냉철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트라바디는 북부 원정을 통해 자신의 경쟁자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우군인 사르가타나스와의 우호를 돈독히 했다. 사르가타나스는 이제 남이 아니었다. 그는 스트라바디의 외동딸의 남편이었고, 언젠가 스트라바디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동부는 이제 둘이 아니었다. 하나였다. 더욱이 북부를 초토화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북부 가주들의 정수를 마음껏 취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엠브리오는 죽었고 서부와 북부는 초토화되었다. 천방지축처럼 날뛰던 아가레스 역시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
남부의 마몬 가.
굉장히 단순한 상황이었다. 마몬 가만 쓰러트리면 이제 남부 공백지에 적이 없었다. 저 위대한 마몬 이래 최초로 공백지를 통일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불안요소가 있었다. 마몬 가의 저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엠브리오와 마몬 가의 격돌.
당연히 밀정을 파견해두었다. 엠브리오가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을 지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밀정이 돌아오지 못했다. 어처구니없게도 파견한 밀정 모두가 전투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본 드래곤의 광범위 브레스가 밀정들을 불태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스트라바디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스트라바디는 어쩔 수 없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와 소문을 조합할 수밖에 없었다. 엠브리오 군의 생존자가 많았기에 정보를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완전히 상반된 소문이 공존했다.
어떤 소문을 믿을 것인가.
최악을 가정하고 허황되기 짝이 없는 소문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이성에 근거하여 보다 상식적이고 여러 사람이 믿는 소문을 믿을 것인가.
‘본 드래곤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카드가 있었다면 어째서 서부와의 싸움에서는 꺼내들지 않았는가.
엠브리오는 서부 가주 연합과의 싸움에서 상당히 고전했다. 서부 가주 연합을 끝장내기 위해 몇 달이 넘는 시간을 쏟아 부어야 했고, 그나마도 던전과 도시 대부분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수를 써야만 했다.
엠브리오가 서부 가주 연합과의 싸움에서 본 드래곤을 꺼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터였다. 서부 가주 연합은 진즉에 와해되었으리라.
그리고 애당초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본 드래곤 같은 몬스터는 돈만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종류의 몬스터가 아니었다. 엠브리오가 북부와 서부를 탈탈 털어 모은 돈으로 본 드래곤을 구매했다?
누구에게서? 던전 상회에서? 던전 상회에서 본 드래곤을 구매하려면 경매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경매도 없이 그 정도 몬스터를 구매할 수 있는 자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당연히 엠브리오는 그 제한된 인원 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본 드래곤을 제한 다른 부분을 봐도 와이번이 등장하는 소문 쪽이 신빙성이 높았다.
스트라바디는 마몬 가의 서부 원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밀정이 먼 거리에서 관찰한 것이기에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스켈레톤 솔져나 워리어의 숫자가 일백을 넘어 근 이백에 가까웠다.
본 드래곤이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 마몬 가의 병력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엠브리오가 서부를 초토화시킨 데다가 생존자가 너무 많아 승전 이후에도 마몬 가가 이렇다 할 전리품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투 이후에 새로 언데드 몬스터들을 사들였을 가능성도 낮았다. 그러기에는 언데드 몬스터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때문에 스트라바디는 와이번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마몬 가의 전력을 추산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놈은 엠브리오를 꺾었다.’
어느 이야기를 믿든 간에 그 사실 하나만은 변하지 않았다. 엠브리오는 서부 가주 연합을 사실상 혼자서 박살낸 괴물이었다. 이후 서부 가주 연합의 정수를 모두 취한 것까지 고려하면 뿔의 개수는 다섯 개라 보는 것이 타당했다.
‘마몬 가의 가주 역시 최악을 가정해 다섯 개로 판단한다. 엠브리오를 꺾었으니 그 정수 역시 취했을 터.’
스트라바디는 눈을 감았다. 이 싸움이 가주들 간의 결투가 아닌 군대를 동원한 전쟁임을 명심했다.
뿔 다섯 개짜리 가주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얼마든지 눈 먼 칼에 죽을 수 있었다.
‘변수를 줄인다. 내부의 힘만으로도 부족하다면 외부의 힘 역시 빌린다.’
마몬 가 외엔 남은 적이 없었다. 설사 이번 싸움으로 동부가 가진 재보 모두를 탕진한다 해도 승리하면 그만이었다. 남부 공백지 전체가 스트라바디 자신의 손에 들어올 터였다.
스트라바디는 깊은 고양감 속에 전장지도를 보았다. 마몬 가의 군대가 동부를 향해 진군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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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49장 - 압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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