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42화 (142/227)
  • < 제 47장 #2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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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백지 북부와 서부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이라뇨? 가주 님이 엠브리오를 격파한 것 외에 다른 소문 말인가요?”

    오필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구슬 너머의 티그리우스가 즉답했다.

    [소문 자체는 가주 님과 엠브리오에 관한 것이 맞소. 다만 그 소문의 내용에 문제가 있소.]

    [가주 님과 엠브리오의 싸움 내용에 대해 서로 상반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의 진실 그대로이고, 다른 하나는 상당히 축소된 소문입니다. 특히 본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갈립니다.]

    티그리우스가 이상하다고 한 것은 후자일 것이 분명했다.

    [엠브리오가 동원한 것은 본 드래곤이 아니다. 그저 조금 거대한 와이번에 불과하다.]

    핵심을 꿰뚫는 말이었다. 티그리우스가 계속 말했다.

    [동원한 병력이나 싸움의 양상 역시 진실과 많이 다릅니다. 축소된 소문의 내용만을 믿는다면 이번 마몬 가의 승리는 ‘기적’이 아니라 ‘전술 여부에 따라 충분히 극복 가능한 전투’가 됩니다.]

    [일단 아군의 숫자가 몇 배로 부풀려졌습니다. 싸움의 양상 역시 가주 님께서 열세이긴 하나 싸워볼만한 숫자의 병력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 방심한 엠브리오를 요행히 격퇴함으로써 승리했다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용호가 기습을 가해 승리했다는 사실만은 똑같았다. 하지만 똑같은 승리라 할지라도 그 방식이 다른 만큼 용호와 마몬 가의 저력이 다르게 평가될 수 있었다.

    특히 본 드래곤을 거대한 와이번으로 바꾼 부분이 그러했다.

    겨우 수십 기의 병력으로 엠브리오의 군세를 파고들어 승리를 거머쥐었다면 그만큼 용호 측의 단위 전투력이 우수하다는 뜻이었다.

    단신으로 수백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장군 하나와 수백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일천의 병력을 무찌르는 장군이 존재한다면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일까?

    다른 곳은 몰라도 초인이 실재하는 마계라면 전자일수밖에 없었다.

    “소문의 출처는?”

    [자신들 역시 그날 전투의 생존자라 주장하는 무리들이라고 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풍문이다 보니 구체적인 출처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티그리우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유언비어라는 것이 본래 그런 법이었다. 한 번 나돌기 시작한 유언비어는 제어하기도, 그 근원을 파헤치기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용호는 누구의 입에서 처음 이 소문이 나왔는가 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생각했다.

    왜 이런 소문이 도는가.

    이런 소문이 돔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것은 누구인가.

    오필리아가 입술을 열었다.

    “어느 쪽의 소문이 보다 진실로 여겨지고 있죠? 역시 후자 쪽인가요?”

    [그렇소. 오히려 진실 쪽이 매도를 당하고 있소. 엠브리오의 패잔병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변명하기 위해 적을 부풀렸다는 식으로 말이오.]

    예상대로였다. 오필리아가 말했다.

    “본래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걸 더 믿게 되는 법이긴 합니다. 가주 님과 엠브리오의 싸움은 남부 공백지의 싸움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컸습니다. 때문에 직접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모두 거짓이다. 과장된 이야기다.’라는 쪽이 보다 솔깃한 게 당연합니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었다. 하지만 일반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러한 점들을 고려한다 해도 지금의 상황은 이상합니다. 이런 거짓 소문이 자리를 잡기에는 그 날의 생존자가 너무 많습니다. 한두 명이 어설프게 떠드는 정도로는 지금처럼 거짓 소문이 진실을 뒤엎기 쉽지 않을 겁니다.”

    “조직적인 조작이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소문의 배후. 조직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

    당장 떠오른 것은 역시나 왕들이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들이 마계의 버려진 땅인 남부 공백지에 이 정도의 공을 들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용호는 그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엠브리오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마몬 가의 저력을 보다 낮게 보는 소문이 돌아서 왕들이 볼 이득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필리아도, 티그리우스도 침묵했다. 그들 역시 용호와 같은 것을 의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주인님, 던전 미어 캣들의 보고입니다.]

    [던전 입구 쪽으로 소속 불명의 늑대 무리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루시아의 보고였다. 용호는 즉각 말했다.

    “티그리우스, 병력을 수습해서 남부로 돌아오도록 해라. 몇 시간 내로 다시 연락하겠다.”

    [가주 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티그리우스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용호는 통신용 구슬을 챙긴 뒤 오필리아와 함께 도박장을 나섰다. 루시아를 통해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또한 불러들였다.

    늑대의 무리.

    생각나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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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새끼까지 쳐서 제법 대가족이 된 던전 미어 캣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던전 입구로부터 삼십여 미터 정도 거리를 둔 곳에 자리한 늑대 무리 때문이었다.

    늑대 무리는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늑대보다 훨씬 더 큰 그것들은 침묵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마몬 가의 던전 입구를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던전 입구가 열린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늑대의 마왕 엠브리오. 그가 그렇게 불린 이유는 언제 어디서고 늑대 무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용호는 엠브리오의 늑대 무리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엠브리오가 용호와 사투를 벌이던 순간조차 그러했다.

    엠브리오의 곁을 떠나있던 늑대들.

    그날 그 장소에 왜 늑대들은 없었던 걸까. 엠브리오의 명을 받고 미리 전장을 떠나 있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용호가 침묵하니 예속 사역마들 또한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카타리나가 홀로 검은 마력의 칼날을 일으켜 전투 태세를 갖춘 것이 전부였다.

    움직임을 보인 것은 늑대 무리가 먼저였다. 하나의 덩어리였던 무리가 둘로 갈렸다. 열린 틈 사이로 회색 늑대 한 마리가 발걸음을 내딛었다.

    특히나 더 거대한 녀석이었다. 머리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거의 사람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

    놈은 천천히,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하듯 머리를 살짝 숙인 채 용호에게 다가섰다.

    용호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용호와 놈 사이의 거리가 영이 되었다. 용호 바로 앞에 선 놈은 머리를 크게 들어 털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를 드러냈다. 검은 띠 끝에 붉은 보석이 달려 있었다.

    [정보 저장 보석.]

    [기억이나 이미지를 삽입할 수 있는 저장 매체입니다.]

    입구 바로 앞이었기에 루시아가 말했다. 용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늑대의 목걸이를 풀었다. 보석을 손에 쥐고 마력을 주입해 보았다.

    보석에서 빛이 발사되었다. 마치 빔 프로젝터 같았다. 빛은 허공에서 뭉쳤고, 탐욕의 미궁 3층에서 보았던 엘룬처럼 반투명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용호는 물론이고 예속 사역마 모두가 예상했던 이의 모습이었다.

    [나는 엠브리오다.]

    [지금 이 영상이 누군가의 손에서 재생되고 있다면, 난 이미 죽은 것이겠지.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를 죽인 자일 것이야.]

    엘룬과는 경우가 달랐다. 단순히 저장해둔 영상을 재생하는 것에 불과했다. 용호는 인계에서 마주했던 마몬을 떠올렸다.

    [나를 죽인 자. 내가 무리의 새로운 우두머리로 인정한 자.]

    [그대에게 굳이 이 자료를 남기는 것은 나의 지나친 간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날 죽인 자가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자라면 이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자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담담한 엠브리오의 목소리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엠브리오는 이 영상이 실제로 쓰일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굳이 이 영상을 제작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늑대 무리의 새로운 수장에 대한 준비 차원에서였다. 문자 그대로 만약을 대비한 것이었다.

    그는 한 차례 숨을 크게 고른 뒤 말했다.

    [나는, 식탐의 왕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세력을 지원해주고, 나는 그 세력을 이용해 남부 공백지를 통일한다는 단순 명료한 거래였다.]

    일전에 했던 가설이 맞았다.

    오필리아는 돌연 던전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던전 미어 캣들을 노려보았다. 새끼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두려워할 때 눈치 빠른 부모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새끼들을 챙긴 뒤 굴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무 것도 안 들린다는 듯 귀를 막고 달리는 녀석도 있었다.

    엠브리오의 말이 이어졌다.

    [식탐의 왕은 나를 허수아비로 내세운 뒤 남부 공백지를 지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남부 공백지를 통일한 힘으로 새로운 왕이 되고자 했다.]

    마지막에 약간은 자조적인 미소가 섞였다. 그만큼 무모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된 바람인만큼 마지막에 가서는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거래였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했다고 해도 좋다.]

    [식탐의 왕이 번거롭게 나라는 존재를 이용한 이유는 다른 왕들에 있다. 나를 죽인 자- 그대 역시 알고 있겠지만 여섯 왕들은 현재 상호 견제를 통한 평화를 구가하고 있다. 말인즉 어느 누군가가 정도 이상으로 강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서로 힘과 세력이 비슷한 자가 셋도 아니고 여섯이나 있었다. 내실이야 어찌되었든 겉만 보면 그러했고, 마계는 상호견제에 의한 평화를 백 년도 넘게 누려왔다.

    [내가 남부 공백지를 통일하지 못하고 죽었다면, 이는 식탐의 왕 역시 실패했다는 뜻이다. 당장은 새로운 허수아비를 세우지 못하겠지. 갑작스런 강자가 바로 연달아 나타나는 것은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아마 다시 몇 년은 남부 공백지를 그대로 내버려둘 것이다.]

    [하지만 날 죽인 자가 그저 평범한 남부 공백지의 가주가 아니라면, 식탐의 왕은 움직일 것이다. 그것도 보다 본격적으로.]

    [남부 공백지가 아닌, 오직 날 죽인 그대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남부 공백지 전체보다 더 큰 가치가 용호에게 있었으니까.

    오필리아가 입술을 벌렸다. 부지불식간에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였군요. 그래서 소문을 축소한 거예요. 다른 왕들이 가주 님의 비범함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혼자만 먹어야 하니까.

    보물을 독차지해야 하니까.

    [군사를 크게 일으킬 가능성은 낮다. 그는 은밀하게 움직이겠지. 어쩌면 본인 스스로가 그대의 던전을 방문할지도 모른다. 식탐의 왕이 그대를 취했다는 사실 자체를 다른 왕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것이 식탐의 왕의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몫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몸소 진흙탕에 뛰어들 준비가 된 자였다.

    북부와 서부에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식탐의 왕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엠브리오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감정을 추스르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끝에 이야기를 재개했다.

    [시간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내 생각대로 평범하지 않은 자라면, 저 위대한 마몬 이래 마계에서 자취를 감춘 탐욕의 죄를 가진 자라면.]

    자조와 오만이 뒤섞였다. 엠브리오 자신이 다른 곳도 아닌 남부 공백지에서, 죄악을 가진 왕도 아닌 자에게 죽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결국 자신에게는 탐욕이 없다는 사실이 그를 자조하게 만들었다.

    엠브리오는 아주 작게 웃었다. 용호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미소였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지만, 나는 아마 그냥 죽지 않았을 것이다. 식탐의 왕이 붙여놓은 감시자 놈을 길동무로 삼았겠지.]

    [그 일이 약간의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어쩌면 감시자의 죽음 때문에 식탐의 왕은 그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약간의 시간이 더 생길 것이다.]

    [적어도 내가 죽고 나서 서너 달. 조금 더 길어진다면 반년까지도. 운이 좋다면 몇 년이 될 수도 있겠지.]

    엠브리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영상은 그가 죽기 직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과거의 일이었다.

    엠브리오는 마음 한 구석에나마 패배를 생각해두었다. 결국 왕이 되지 못하는 미래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끝내 가슴 안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조차 내뱉지 않은 말이었다. 만의 하나 자신이 죽었을 경우를 대비해 남기는 영상에 엠브리오 자신의 과거나 왕이 되고 싶은 이유 같은 것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엠브리오. 왕이 되고자 했던 이는 평정을 되찾았다. 자신의 전인에게 말했다.

    [이 보석 안에, 내가 식탐의 왕에 대해 아는 모든 것들을 담아두었다. 내가 언제고 그와 맞서게 될 날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니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식탐의 왕이 딱히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는 야심에 걸맞는 교활함과 과감성의 소유자였다.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과 쉽게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까지 갖추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적인 군주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식탐의 왕보다는 자신을 쓰러트린 자의 편을 들고 싶었다.

    자신을 쓰러트린 자는,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었던 자일 테니까. 설사 죄악이 없더라도 남부 공백지를 기반으로 삼아 왕을 꿈꿀 자일 터니까.

    [실제로 쓰일 가능성이 있는지조차 의문인 영상인데... 너무 빠져들고 말았군. 솔직히 너무 나가고 말았어. 날 죽인 자가 죄악의 소유자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야. 어쩌면 눈 먼 칼에 맞아 죽을지도 도 모르지. 남부 공백지의 현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고 말이야.]

    [하지만 이왕 내딛은 걸음이다. 설사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이 영상은 내가 무리의 수장으로 인정할 자를 위한 것이니.]

    엠브리오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스스로가 말했듯이 너무 빠져들었기에, 그만큼 탐욕의 왕을 갈망했기에 진심을 담았다.

    [나를 쓰러트린 그대가 진정 탐욕의 왕이라면, 내가 갈망했던 이라면.]

    엠브리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새로운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대비하라. 식탐의 왕이 그대를 찾아갈 것이다.]

    엠브리오의 모습이 허공에 흩어졌다. 엘리고스는 긴장으로 마른 침을 삼켰고, 카타리나는 입술을 움츠렸다. 오필리아는 눈을 꽉 감았다.

    식탐의 왕.

    현존하는 여섯 왕 가운데 하나.

    그가 오고 있었다.

    제 47장 - 엠브리오의 유산 끝, 제 48장 - Yours로 이어집니다.

    < 제 47장 #2 (수정)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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