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39화 (139/227)
  • < 제 46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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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3층은 도박장인 것 같네요.”

    오필리아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형인 상태였고, 덕분에 목소리가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입구 방에서 웬디고 수백 마리를 일소한 용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탐욕의 미궁 다른 층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3층 역시 천 년의 세월동안 차곡차곡 쌓인 던전 몬스터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사역마들의 진화 숙련치도 확보할 겸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던 용호는 오필리아의 시선을 좇아 주변을 보았다. 약간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여기가 도박장이라고?”

    3층은 1층이나 2층보다는 ‘실내’라는 느낌이 강했다. 처음 입구 방은 살라미가 비행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천장이 높고 드넓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니었다. 그냥 조금 큰 규모의 던전에 들어왔다는 느낌의 복도가 연이어졌다.

    현재 용호 일행이 멈춰선 곳은 집결지라 할 만한 공간이었다. 정사각형으로 네모진 방 한 가운데 우뚝 솟은 길이 있었고, 1미터 정도 낮은 곳의 바닥과는 폭이 넓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은 길 전체에 걸쳐 이어져 있었기에 평지 위에 피라미드형으로 쌓아올린 돌로 중앙 통로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돌로 된 바닥에 기다란 홈이 몇 개 나있긴 했지만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도박장이라기보다는 그냥 광장 같은 느낌이었다.

    오필리아가 설명했다.

    “전통적인 슬라임 경기장인 것 같습니다. 저 계단은 좌석 역할을 대신하는 거고, 바닥에 난 홈을 따라 슬라임들이 경주를 펼치는 거죠. 본래라면 홈을 따라 칸막이 같은 것들이 늘어져 있어야 하지만…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부서지고 망가진 것 같습니다. 주변에 파편 같은 것들은 제법 보이고요. 아마 저기서 돈을 걸고 배당금을 받았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니 또 제법 그럴싸하기는 했다. 머릿속으로 아버지 따라 가봤던 경마장을 떠올린 용호는 연이어 슬라임들이 열심히 레일을 따라 기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박력은 없지만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들어갔던 입구 방에서도 몇 가지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주사위랑 도박용 칩 같은 것들이요. 아마 그 방에서는 제 선술집처럼 작은 테이블을 여럿 두고 도박을 했을 겁니다.”

    “어… 하지만 2층은 탐욕의 미궁의 관문 아니었나? 문 바로 다음에 도박장을 둔다고?”

    “그만큼의 자신감일수도 있죠. 이곳은 다름 아닌 탐욕의 미궁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제 소견입니다만 아무래도 3층은 전체 하중을 지탱하기 위한 공간인 것 같습니다. 물리적이라기보다는 마법적인 하중이요. 그래서 방이나 길도 1층이나 2층보다는 좁고, 천장도 낮은 것 같습니다.”

    “겸사겸사 만든 공간이라 이거군.”

    “네, 아마 진짜 고급 도박장은 보다 심층에 제대로 만들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로 그 순간 천둥이 쳤다. 스컬이 전투 망치로 출구 쪽에 서 있던 외눈 거인의 머리를 후려치며 발생한 소리였다. 거의 육 미터에 육박하는 거인의 머리가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용호는 기를 쓰고 열심히 싸우는 살라미와 엘리고스를 쳐다보는 대신 오필리아에게 계속 물었다.

    “저기 말이야, 도박장이 혹시 던전의 필수 시설이기라도 한 건가?”

    경마장 비슷한 것을 이 정도 규모로 갖춰둔 공간이었다. 그런데 심층에 따로 고급 도박장을 또 만들어둔다는 말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필리아가 눈썹으로 팔八자를 그린 뒤 답했다.

    “이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여러모로 요긴한 공간입니다. 마몬 가의 가신으로서 강력히 주장하건데, 표면의 마몬 가에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술집이라도요. 가주 님께서 욕구에 충실하시듯이 사역마들도 자신들의 욕구에 충실합니다. 그들에게도 욕구를 해소할 놀이공간이 필요합니다.”

    “으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아직 어린 유리아나 세상만사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해 보이는 바둑이와 달리 오크들은 여러 가지 욕구들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런 사역마들의 욕구 해소장소로 자유도시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마몬 가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근무 마친 후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는 결코 아니었다.

    스켈레톤 같은 언데드 사역마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마몬 가였지만 자유도시와 란돌트 가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사역마들도 많이 늘었다. 던전의 주인으로서 사역마들의 복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가주들은 어떻게 하지? 그러니까 좀 더 규모가 큰 던전의 가주들 말이야.”

    남부 공백지, 그 중에서도 용호가 속한 남부의 가주들은 다들 세력이 약하다보니 던전도 그리 크지 않았다.

    용호가 참고하고자 하는 것은 남부 공백지 밖의 던전들, 그 중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는 가주들의 던전이었다.

    오필리아가 생긋 웃었다.

    “던전 밖에 아예 거대한 영지를 만드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마을 같은 것을 말하는 거지?”

    “예, 더욱이 영지의 역할은 단순히 욕구 해소의 장소에 그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던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역마들을 부릴 수 있는 원동력이죠. 탐욕의 미궁 정도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던전에 수천, 수만 명이 거주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당장에 자유도시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수백을 넘어 수천에 달하는 군사들을 부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다수의 인원이 머물 수 있는 공간 확보가 필수였다.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물었던 것인데 생각보다 그 깊이가 깊었던 터라 용호는 일단 생각을 갈무리했다. 영지 건설 계획은 3층을 점령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용호와 오필리아가 담소를 나누는 사이 슬라임 경기장의 던전 몬스터들도 거의 다 일소가 되었다. 용호는 호위기사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전투에 나서기보다는 용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묘한 얼굴로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호의 시선을 눈치 챈 카타리나는 잠시 허둥거리다 답했다.

    “어쩐지 이상하면서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다른 누구도 아닌 엘룬 님이 도박장의 담당자라고 생각하니까요.”

    천칭 좌의 엘룬.

    스카자하의 말을 빌리자면 성실하고 고지식한 12 사역마의 상식인.

    용호도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러 기억 속에서 살펴본 엘룬의 모습은 확실히 도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매사에 엄격하고 진지하며 근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말처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박장의 공정함이라 이건가.”

    엘룬이라면 믿을 수 있다. 저울눈을 속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카타리나는 자기가 생각한 게 바로 그거라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짝 발칙한 생각일수도 있지만… 어쩌면 진정한 기만을 위한 고단수의 계책일수도 있습니다. 도박장이란 곳은 결국엔 손님이 아니라 도박장이 승리하는 장소니까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유도시에서 가장 큰 도박장을 운영하는 선술집 여주인의 말이었다. 카타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용호는 가산(?)을 탕진한 채 바닥에 엎드려 우는 유리아와 바둑이를 떠올렸다. - 어쩐지 모르게 그 옆에서 살라미 역시 울고 있었다. -

    마몬 가의 던전 내에 도박장을 설치하는 일은 역시 재고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무튼 계속 가자고.”

    어느새 출구 정리가 끝나 있었다. 용호는 씩씩하게 불꽃 섞인 콧김을 내뿜는 살라미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층은 오필리아의 예상대로 도박장이 맞았다.

    간소화된 투기장과 룰렛이 설치된 방, 휴게실 등을 몇 개나 지나친 용호는 굳게 봉인된 방문 앞에 섰다. 스카자하의 공간인 생명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3층 도박장은 굳이 12 사역마를 거치지 않아도 4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구조였다. 봉인된 방 앞에는 4층으로 내려가는 커다란 계단이 놓여 있었다.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이자, 마몬의 호위기사였던 엘룬은 이미 죽었다. 하지만 스카자하는 엘룬이라면 분명 안배를 남겨두었을 거라 했다.

    때문에 용호는 이번에도 스컬 부대와 살라미에게 물러날 것을 명했다. 방안에 들어가는 것은 용호 자신과 예속 사역마들로 제한했다.

    용호가 명령했다. 스컬과 엘리고스가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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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안은 넓고 고요했다.

    이렇다 할 조명 장치를 던질 필요도 없이, 문을 연 순간 천장에서 은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달빛과도 같았다.

    용호는 앞장서려는 스컬을 제지한 뒤 허공에서 아몬을 뽑아들었다. 탐욕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발동했다. 용호로부터 일어난 색색의 연기 일부가 예속 사역마들을 휘감았고, 나머지 전부는 방 깊은 곳을 향해 뻗어나갔다.

    용호가 첫 걸음을 내딛었다. 방안의 어둠과 천장의 빛이 용호에게 반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어둠이 걷혀갔다. 천장의 빛은 마치 용호를 인도하듯 한발 앞선 곳을 더욱 밝게 비췄다.

    함정 같은 것은 없었다. 카타리나를 필두로 예속 사역마들이 하나둘 용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 중앙에 도달했을 때였다. 활짝 열어둔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한 발 앞서 쏟아지던 빛은 더더욱 강해졌고, 그 반대급부라도 되듯 사방에서 쏟아지던 빛들은 약해졌다. 마치 달빛이 강해지면 오히려 약해지는 별빛들 같았다.

    부드러운 황금빛이 하나 되었다. 덩어리를 이루었고, 그것은 곧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흐릿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황금빛 머리칼과 붉은 안대.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천칭 좌.

    밤을 베는 엘룬.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빛에서 일어선 그녀는 부드러운 숨을 토했다. 모든 것이 용호의 기억 속 모습과 일치했다.

    가녀린 외모에도 불구하고 결코 연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잘 벼린 태도와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꼿꼿함. 결코 굽히지 않는 굳은 의지.

    그녀가 입술을 벌렸다.

    “마침내 돌아온 탐욕의 왕이여.”

    용호는 알 수 있었다. 이전의 어떤 가주도 엘룬을 마주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녀는 탐욕에 반응해 눈을 뜬 것이었다.

    엘룬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대가 마주하고 있는 나는 과거의 잔영이다. 허나 우려치 마라. 나는 분명 밤을 베는 엘룬일지니. 그대의 앞에 선 나는 진정한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다.”

    마몬이 죽던 날 엘룬 역시 죽었다.

    더욱이 엘룬은 마몬보다도 한 발 앞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엘룬의 사념체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탐욕의 미궁을 나서기 직전에 남겨둔 일종의 분신이었다.

    하지만 엘룬의 말 그대로였다. 단순한 사념체로 분류할 수 없었다. 용호는 기억 속의 엘룬 본인을 마주한 느낌을 받았다. 예속 사역마들 역시 스카자하나 구시온을 마주했을 때 이상으로 전설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특히나 카타리나는 호위기사인 동시에 연인이라는 특수성을 엘룬과 공유하기 때문인지 다른 예속 사역마들보다 한층 더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거의 경건한 눈빛으로 엘룬을 바라보았다.

    “딱딱한 인사는 이 정도면 되겠지. 얼굴을 보다 자세히 보여줄 수 있겠니?”

    엘룬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저 날카롭기만 한 검이 아니었다. 마몬의 모든 것을 사랑한 그녀는 자연히 마몬의 후손인 용호 역시 사랑했다. 마치 어머니와 같은 다정함으로 용호를 마주하고자 했다.

    용호는 다시 두어 걸음을 내딛어 엘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안대를 써 눈을 가리고 있지만 엘룬은 심안의 소유자였다. 보통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들까지도 얼마든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엘룬이 용호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모습이었다.

    “그 사람을 닮았구나.”

    그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묻는 것은 불필요했다. 손을 거둔 엘룬은 오히려 한 걸음을 물러섰다. 다시 한 번 용호를 전체적으로 살핀 뒤 밝게 말했다.

    “아주 매력적이야. 몇 대나 지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피가 아주 강하게 발현한 게 분명해. 그리고 인큐버스의 피도 아주 진하게 이어받은 것 같구나. 분명 이름 높고 강력한 인큐버스 가문의 피겠지.”

    “에?”

    용호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엘룬은 살포시 웃었다.

    “너무 놀라지 마렴. 이 정도를 알아보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니까.”

    “아니…….”

    용호는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이상했지만 어쩌면 엘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이나 확신에 찬 엘룬의 목소리였다.

    “탐욕의 왕의 자리에 오른 지도 시간이 꽤 흘렀구나. 관록이 느껴지는 걸? 보기보단 나이도 많을 것 같구나. 그리고…….”

    “저기, 저기요.”

    아무래도 아니었다. 용호는 급히 손을 내저은 뒤 빠르게 말했다.

    “일단 전 인계 출신이고요, 윗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버지도 그냥 보통 인간거든요? 가주 자리에 오른 지는 반년 정도 밖에 안 지났고요.”

    “어응?”

    엘룬이 기묘한 목소리를 토했다. 어쩐지 모르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즉위한 지 그것 밖에 안 됐다고? 거기다 이, 인큐버스 혼혈이 아냐?”

    눈에 띄게 당황한 엘룬이 급히 용호의 하반신 쪽을 보았다. 당황과는 별도로 뺨을 붉혔다.

    용호는 민망함 속에 얼른 손으로 하반신을 가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왜 이 광경이 익숙한지도 이해했다.

    ‘설마 허당도 전통인 거냐!’

    오필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엘리고스는 호구기사- 아니, 카타리나를 곁눈질 했고, 스컬은 대놓고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격한 부끄러움을 표했다. 자기가 망신을 당한 것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경건함이고 신비함이고 몽땅 다 날아간 가운데 엘룬이 뒤늦게나마 다시 냉정한 여검사를 연기했다.

    그리고 그 모습조차도 너무나 익숙했기에 분위기는 더더욱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

    더는 견디지 못한 카타리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마치 이에 호응하듯 엘룬도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닮은꼴인 두 호위기사가 평정을 되찾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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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C:181662}

    현재 시점의 마몬 가 식구들의 등신대 비교입니다.

    왼쪽부터 오필리아, 엘리고스, 카타리나, 천용호, 카이완, 스컬입니다.

    이하는 세 명씩 나눠서 배치한 버전입니다.

    {@PIC:181664}

    {@PIC:181665}

    < 제 46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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