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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38화 (138/227)
  • < 제 46장 - 천칭 좌의 엘룬 >

    제 46장 - 천칭 좌의 엘룬

    반짝이는 인공태양 아래 기름진 옥토가 펼쳐져 있었다.

    생명이 나고 자라는 것은 자연의 순리.

    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생명들이 싹트고 자라 과실을 거두었다.

    바라만 봐도 훈훈한 기분이 드는 광경이었다. 황금빛으로 영근 밀들이 바람에 파도처럼 출렁거렸고, 알이 굵게 자란 옥수수들이 초록빛 잎사귀에 수줍게 감싸여 있었다.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단내가 퍼질 게 분명한 딸기와 포도도 저마다의 색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름다웠다. 생명의,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아주 약간의 이질감만 제외하면 말이다.

    “도련님,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생명의 정원의 주인이자, 마몬의 12 사역마들의 치유를 담당하는 불사의 마녀 스카자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명의 정원에 죽음이 가득했다.

    근 오십에 달하는 스켈레톤 솔져들이 저마다 농기구를 손에 들고 농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터라 아직 농사에 익숙하지 못한 녀석들이 많았지만, 언데드 특유의 꼼꼼함과 반복 행동으로 노련함을 대체했다.

    죽음의 영역에 속한 언데드들이 생명을 일구는 모습은 스카자하에게 본능적인 위화감을 불러왔다. 더욱이 저 오십이 전부가 아니었다. 1층에 존재하는 네 개의 원형 방 모두 비슷한 일이 진행 중이었다.

    어떤 방에서는 과일을 집중적으로 키웠고, 다시 어떤 방에서는 사탕수수나 카카오, 담배 같은 기호품들을 경작했다. 그중 가장 압권인 것은 대마나 양귀비 같은 약재를 키우는 방이었다.

    방문하는 이들의 심신을 치유하던 아름다운 정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거름 냄새가 진동하는 논밭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인계에서 귀환한 용호는 스켈레톤들의 숫자를 크게 늘렸다. 최하급 사역마라 할 수 있을 스켈레톤 일꾼은 굉장히 쌌다. 순수한 드래곤의 뼈보다 단가가 낮은 본 드래곤의 손가락 뼈 하나로도 수십 단위를 사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구매한 스켈레톤 일꾼의 숫자가 총 이백.

    스켈레톤 일꾼을 이 정도 규모로 사들이는 가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마몬 가에 처음 왔을 당시의 스컬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켈레톤 일꾼은 성능이 굉장히 나빴다.

    힘이 약한데다가 움직임까지 느렸다. 거의 쉼 없이 반복 작업이 가능하다는 강점이 있긴 했지만 업무 효율성 자체가 너무 낮은 터라 강점이라 보기도 애매했다. 학습능력 역시 기대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과연 단가가 싼 것인지도 의문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용호는 스켈레톤 일꾼들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평범한 가주들과는 달리 대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미안. 깜박 졸았네. 뭐라고?”

    푸른 액체에 전신을 파묻고 있던 용호가 반쯤 감긴 눈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눈 밑이 새카맸다.

    용호는 스켈레톤 일꾼들을 사들인 그날 전부 스켈레톤 솔져로 승급시켰다. 그야말로 엄청난 노가다였다. 하지만 덕분에 스켈레톤 일꾼 이백 마리 살 돈으로 스켈레톤 솔져 이백 마리를 얻는 이득을 취했다. 나중에 스켈레톤 워리어나 그 이상의 존재들로 승급시킬 것까지 고려한다면 실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소수정예도 좋지만 숫자 역시 필요했다. 엠브리오와의 싸움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낀 용호였다. 이제부터는 진화의 권능을 보다 공격적으로 운용할 생각이었다.

    스카자하는 결국 다시 한숨을 토했다. 피로에 찌든 용호를 타박하는 대신 위화감을 야기하고 있는 두 번째 요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인상을 구겼다.

    용아병.

    일반적인 스켈레톤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존재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밭을 매고 있었다. 숫자는 겨우 일곱에 불과했지만 저들 하나하나가 스켈레톤 나이트 대여섯 마리에 비견되었다. 스켈레톤 솔져로 환산하자면 수백 마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셈이었다.

    키는 근 2미터에 달하고, 생긴 것만 봐도 범상치 않은 것들이 궁상맞게 쪼그려 앉아 호미 질을 하는 광경은 실로 괴악했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용아병정도 되면 자아와 자긍심을 갖기 마련이었다. 언데드인 만큼 주인의 명령에 불응하지는 않을 터였지만, 그래도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눈앞의 용아병들은 너도나도 열심히 호미질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의 자긍심을 송두리째 박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가 마찬가지로 쪼그려 앉아 호미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컬스컬.”

    드래곤 본 나이트.

    일반적인 용아병들과는 격 자체가 다른 존재.

    거대했다. 단순히 거대한 것을 넘어 장엄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외양이었다.

    색은 순백 그 자체였다. 드래곤의 뼈 가운데서도 가장 단단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소재로 했기에 날렵하면서도 강건했다.

    항마력 역시 뛰어났다. 여간한 마법은 우습게 무시할 것이 분명했다. 인간형이나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두상부분에서 타오르는 보랏빛 불꽃은 경이와 공포를 동시에 야기했다.

    그런 존재.

    스켈레톤 워리어 계열의 정점이라 할 수 있을 데스나이트와도 정면에서 맞설 수 있을 위대한 전사.

    “스컬컬.”

    햇살이 참 따뜻하니 바닥을 뒹굴기 좋은 날씨로구나- 대충 그런 느낌을 주는 말을 느긋이 늘어놓고는 다시 호미질에 열중했다.

    “정말 너무해.”

    스카자하는 작게 중얼거렸다. 스컬이 지금의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용호는 스컬에게 정말로 많은 투자를 했다.

    스컬과 합체 진화를 할 용아병을 만드는 과정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일단 본 드래곤의 이빨 가운데서도 가장 양질의 이빨을 골라 소재로 삼았다.

    다른 용아병들처럼 단순히 용아병 소환의 스크롤을 사용해 소환하지 않고 한 가지 과정을 더 거쳤다. 티그리우스의 합체 마법이었다.

    란돌트 가에서 불려온 티그리우스는 용아병 소환의 스크롤과 스켈레톤 메이지 소환의 스크롤을 동시에 사용했다. 합체의 권능으로 두 마법을 합성시켰다.

    물론 쉽지 않았다. 스스로가 사용한 마법도 아니고, 스크롤에 담겨 있는 마법이었다. 더욱이 예속 사역마가 되면서 권능 그 자체는 약화된 티그리우스였다.

    그래도 티그리우스는 끝내 성공했다. 비록 용아병 소환의 스크롤과 스켈레톤 메이지 소환의 스크롤이 각각 두 장씩 낭비되었지만 이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스켈레톤 메이지의 힘을 가진 용아병.

    이번에는 오필리아가 나섰다. 만약의 사태를 막기 위해 정신 마법으로 용아병의 자아를 약화시켰다. 살다 살다 해골한테 키스하는 건 처음이라고 오필리아가 투덜거렸지만 이 역시도 그 성과에 비한다면 무척이나 싼 대가였다. - 어디까지나 용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

    마지막으로 용호가 실행한 합체 진화.

    흡족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스컬은 이제 용아병을 능가하는 육체적 강함과 여간한 전투 마법사들을 능가하는 마법 실력을 손에 넣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숫자가 적은 것이 다소 흠이긴 했지만, 전투에 활용하기에는 충분했다.

    공격력도 강하고 방어력도 높고 여간한 마법은 그냥 무시하지만 정작 본인은 공격 마법을 구사하는- 그야말로 사기적인 전천후 마법 전사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소박하게 호미질을 했다. 아무리 강대한 존재로 거듭났다 해도 스컬은 스컬이었으니 말이다.

    쯔쯔 혀를 찬 스카자하는 다시 용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안 그래도 무리해놓고 밤은 또 왜 그렇게 샌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요 며칠 동안 제대로 잔 적이 없지?”

    스카자하의 추궁에 용호가 움찔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루시아가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정말이지!]

    [스카자하 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동네방네 다 소문내야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죠.]

    [소근소근.]

    [속닥속닥.]

    “어머나, 망측하기도 해라!”

    스카자하가 양 손을 뺨에 올리며 꺄 비명을 질렀다. 용호가 버럭 소리쳤다.

    “속닥속닥말고는 아무 것도 안 들었잖아! 그리고 일 했다고! 일!”

    [정말요?]

    [정.말.로 일만 하셨어요?]

    [귀엽고 예쁘고 가엾고 불쌍한 루시아랑 연결 끊어놓고 몇날 며칠 밤새도록 일만 하셨단 말이에요?]

    [네?]

    [정.말.로?]

    요 며칠 섭섭한 게 많았는지 무지막지한 압박감이었다. 용호는 푸른 액체 속에 몸을 묻으며 헛기침을 토했다.

    “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이 자리에 오필리아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용호 자신의 맞은편에서 푸른 액체에 감싸인 채 잠들어 있었다. 아마 깨어있었다면 참으로 다이나믹한 모습을 보여줬을 터였다.

    스카자하는 까르르 웃었다. 잔뜩 삐친 루시아를 좋은 말로 달랜 뒤 용호에게 말했다.

    “부끄러워 할 것 없어. 자연스런 일이고, 너는 탐욕의 왕이니까.”

    스카자하는 푸른 물빛이 감도는 눈을 들어 약간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다시 한 번 입술을 벌렸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 여자를 갖고 싶다. 강해지고 싶다. 던전을 키우고 싶다. 사역마들을 진화시키고 싶다- 모두 ‘욕심’이니까. 그리고 욕심에는 귀천이란 게 없는 법이야. 그 모두가 소망이자 바람이니까. 진심으로 바라는 것들이니까.”

    허공을 맴돌던 스카자하의 시선이 다시 용호에게 향했다. 마치 어머니처럼 당부했다.

    “탐욕 그 자체는 나쁘지 않아. 탐욕이야말로 우리 삶은 물론 발전의 원동력이니까. 그러니 얼마든지 욕망해. 소망하고 또 소망하는 거야. 부끄러워하지 말고. 네 강한 바람은 곧 네 힘이 되어줄 거야.”

    아름답고 찬란한 미소였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본 용호는 스카자하가 어째서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용호는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

    “스카자하는 ‘생명’이고 바포메트는 ‘죽음’이었잖아? 나머지 12 사역마들의 힘도 그런 식인 건가? 땅이나 불, 바람 같은 속성이 아니라… ‘개념’같은?”

    스카자하가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우리 도련님이 제법 날카로운데? 맞아. 우리들 12 사역마들은 대체로 의지와 감정을 가진 생명들의 지적활동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개념’들을 힘으로 삼고 있어.”

    “그럼 구시온은?”

    반사적인 물음이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이었다. 구시온에게 어울리는 ‘개념’이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카자하는 손을 내저었다.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 봐. 우리 자기는 딱 자기한테 어울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 그래도 ‘귀여움’ 같은 건 아니야. 결정적 오답은 피한 셈이네?”

    “아니, 그건 애당초 후보에도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응? 왜? 우리 자기가 둘만 있을 때 얼마나 귀여운데. 남들한테 자랑하고 싶을 정도인걸?”

    스카자하가 뺨을 발갛게 붉히며 말했고, 용호는 상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둘만 있을 때 귀여운 구시온이라니 그야말로 두렵기 짝이 없었다.

    “엘룬의 힘은 뭐지?”

    단순히 화제를 돌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당장 오늘부터 탐욕의 미궁 3층 공략을 개시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항이었다.

    “엘룬에게 가장 어울리는 힘이야. 하지만 동시에 참 모호한 힘이기도 하지. 손에 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강약이 심하게 다를 거야. 하지만- 나는 우리 도련님이라면 누구 못잖게 엘룬의 힘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속 시원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용호는 푸른 액체에서 빠져나온 뒤 스컬과 용아병들을 불러 모았다. 루시아에게도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를 호출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대략 30분 여.

    마침내 출발할 준비를 다 갖춘 용호는 생명의 정원을 나섰다. 탐욕의 미궁 3층- 밤을 베는 엘룬의 영역으로 향했다.

    &

    드래곤 피어.

    환상의 수맥을 올곧이 이어받은 저 위대한 일자왕一者王의 후예들이 타고난 여러 권능 가운데 하나.

    그것은 압도의 권능이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공포를 야기하는 것. 본능적인 두려움에 빠져들게 하는 것.

    드래곤 본 나이트로 거듭난 스컬은 드래곤 피어와 유사한 힘을 발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언데드들이 산자들에게 유도하는 죽음의 공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었다.

    스컬이 앞장서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길이 열릴 지경이었다. 3층 입구 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원숭이를 닮은 던전 몬스터- 웬디고들은 감히 일행에게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며 노성을 토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컬을 등에 태운 부케팔로스가 우쭐함을 드러내듯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부케팔로스 역시 데스나이트와의 혈전 이후 ‘나이트메어 뱅가드’로 승급한 터라 그 위용이 실로 볼만했다.

    부케팔로스는 뒤를 한 번 슥 돌아보더니 콧김을 세게 내뿜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별 의미 없는 동작 같았지만 살라미에게는 아니었다. 분하다는 듯이 머리를 부들부들 떤 살라미는 용호에게 연신 눈짓을 보냈다.

    용호는 그런 살라미의 바람을 이해했다. 그랬기에 순순히 살라미의 등 뒤에서 내린 뒤 가볍게 손을 들었다. 부케팔로스에게 자극받은 살라미처럼, 스컬의 위용에 묘하게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는 엘리고스를 한 차례 돌아본 뒤 간결하게 명령했다.

    “정리해.”

    웬디고 무리는 수백 마리에 달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

    “아무래도 3층은 도박장인 것 같네요.”

    < 제 46장 - 천칭 좌의 엘룬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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