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37화 (137/227)
  • < 제 45장 #2 >

    &

    [번뇌의 힘이 사라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군.]

    [번뇌의 힘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

    용호는 투기장 한 가운데 고고히 서 있었다. 반대편에 적은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완전히 산산조각 난 상태로 바닥을 나뒹구는 13층의 플로어 마스터- 자이언트 워 골렘의 잔해뿐이었다.

    실로 폭발이란 말이 어울리는 마력의 순간 개방.

    더욱이 단순하지 않았다. 용호가 발산하는 마력은 늘 달랐다. 상대방이 보유한 마력의 색과 속성에 따라 그 상극을 꺼내들었다.

    용호 본인이 갖춘 속성은 불꽃과 한기, 번개 이렇게 세 가지 뿐이었지만 전투 시에 발하는 마력은 훨씬 더 다채로웠다. 카타리나의 어둠뿐만 아니라 엘리고스의 대지와 오필리아의 바람이 용호와 함께 했다.

    아몬은 흡족함을 감추지 않았다. 용호는 강해졌다. 창술 또한 이제는 일취월장해 제법 달인의 모양새를 내기 시작했다.

    [이전의 번뇌에는 음습함, 열등감, 분노 같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보다 순수한 욕망이다. 더 많이 갖고 싶다는 소망이,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려 있다. 실로 탐욕에 어울리는 탐심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어린 주인이여.]

    [욕망하라. 나는 욕망에 충실한 그대가 자랑스럽다.]

    분명히 칭찬은 칭찬인데 칭찬 같지가 않았다.

    ‘아, 제발…….’

    진지한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최고일 텐데.

    아몬을 붕붕 휘둘러 창을 팔찌로 바꾼 용호는 다급하게 손부채질을 했다. 얼굴에 열을 어느 정도 식힌 후에야 마몬의 마력과 투기장의 보상을 취했다.

    마몬의 마력은 맛있었다. 탐욕의 활용 능력 자체가 성장한 덕분인지 마력의 흡수 효율 역시 좋아졌다.

    ‘보상은 평범하게 좋군.’

    매직 캐스터들의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반지였다. 티그리우스에게 주면 좋을 것 같았다.

    대강의 정리를 마친 용호가 돌아서자 관중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타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용호의 얼굴에 절로 흐뭇함이 어렸다.

    “허허, 입 꼬리 실실 풀리는 것 좀 보게.”

    구시온이었다. 용호는 바로 대꾸하는 대신 브리가다로 카타리나의 검은 마력을 사용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용호가 단 한 번의 발 구르기로 이십여 미터 이상을 가로질렀다. 거의 비행에 가까운 도약이었다.

    원리는 단순했다. 용호가 지면을 박차는 순간 다리에서부터 돋아난 검은 마력들이 지면을 강하게 밀친 것이었다.

    정확히 카타리나 앞에 안착한 용호는 손을 쑥 뻗어 카타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시 한 번 검은 마력을 사용해 이번에는 구시온의 앞에 섰다.

    괴력을 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저런 부드러운 도약은 검은 마력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재주였다. 더욱이 용호는 자신의 마력이 아닌, 브리가다로 끌어낸 예속 사역마의 마력으로 방금과 같은 재주를 부렸다.

    “이야, 이젠 진짜 별 걸 다하는구먼. 갑자기 너무 강해진 거 같은데?”

    구시온이 껄껄 웃었다. 용호는 코웃음을 한 번 쳐준 뒤 카타리나를 품에서 풀어주었다. 구시온의 맞은편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작 좀 먹어라. 카이완 주려고 가져온 건데 네가 다 먹겠다.”

    “허허, 먹는 거 가지고 구박하기는. 그렇지 않아도 카이완 줄 한 마리는 남겨놨으니 걱정하지 마라. 누가 탐욕의 왕 아니랄까봐 인색하기는.”

    날 선 말이 오갔지만 둘 모두 장난이었다. 용호는 약간의 아쉬움이 섞인 눈으로 치킨이 든 상자를 쳐다보았다.

    카이완은 현재 투기장의 회복실에서 요양 중이었다. 엠브리오에게 당한 부상이 극심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 하지 마라. 너한테 된통 깨진 녀석들도 회복실만 다녀오면 쌩쌩해지니까. 다음에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적당히 답한 용호는 호흡을 골랐다.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카이완의 미소를 애써 지운 뒤 구시온을 마주했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몇 번이나 마주한 구시온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울며 애원하는 구시온의 얼굴 또한 보였다.

    뒤는 허상이었다. 인계에 남은 마몬의 유산으로부터 읽어낸 기억 속의 모습이었다.

    마몬은 아직 자격이 되지 않는다며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구시온과 스카자하 같은 마몬의 12 사역마들 역시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만 할 뿐, 용호 자신에게 마몬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단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조각난 파편들을 모아 불완전하게나마 하나의 그림을 만들 수 있었다.

    마몬은 마지막을 12 사역마와 함께 하지 않았다.

    마몬이 죽게 된 사건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최후까지 함께 하고 싶다며 울며 애원하던 구시온.

    죽어가는 엘룬을 끌어안은 채 하늘을 우러렀던 시트리.

    용호 자신에게 언제나 예속 사역마와 함께 싸울 것을 당부한 스카자하.

    그리고 그들 모두를 뒤로 한 채 홀로 나아갔던 마몬.

    마몬은 홀로 죽었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이 그를 죽인 것일까.

    어째서 그의 죽음이 역사에 남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째서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자신에게 진실을 숨기는 것일까.

    마몬이 말한 자격이란 무엇인 것일까.

    ‘구시온은 말하고 싶어 해.’

    느낄 수 있었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몬이나 스카자하, 시트리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속내는 분명 달랐다.

    구시온은 참고 있었다.

    반면 아몬과 스카자하는 아예 말하고 싶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는 언제나 내 욕망에 충실했다. 때문에 나는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몬이 남긴 말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만족했음을 드러내는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달랐다. 마치 마몬과 용호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

    너의 길을 가라. 너의 욕망대로 행동하라.

    마몬 자신에게 얽매이지 마라.

    “작은 나리?”

    용호는 눈을 깜박였다. 기억 속의 구시온 대신 현실의 구시온이 걱정스런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엠브리오란 놈이랑 싸우다 다친 곳이 도졌다거나.”

    “아니, 그냥. 조금 피곤해서.”

    “하기야. 3개 층을 한 번에 돌파했으니. 10층 이후에도 이렇게 무식하게 팍팍 치고 올라간 놈은 거의 없었다. 카이완도 몇 번이나 지고, 지고, 또 지는데도 끈덕지게 도전하며 올라간 경우지.”

    카이완이 패한 20층까지는 앞으로 일곱 개 층이 남았다. 지금까지의 난이도 상승폭을 고려하면 19층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이 미치는 것이 있어 용호는 운을 뗐다. 무슨 일이냐는 듯 관심을 표하는 구시온에게 물었다.

    “19층까지 가는 길에 또 소환권 주는 층은 없나?”

    “10층 이후니까 확정은 아니지만 나올 가능성 정도는 있다. 뭐… 나오기만 하면 네 녀석이 뽑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건 왜? 카이완 불러서 뭐 할 일이라도 있나?”

    노골적인 지목이었지만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시온의 말마따나 소환권을 손에 넣으면 카이완을 소환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카이완이어야만 했다. 19층까지 가는 사이에 다른 전대 가주가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카이완 외에 다른 후보를 생각할 수 없었다.

    용호의 진지한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구시온은 바로 옆에 자리한 홍련의 불길- 아몬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몬, 작은 나리의 번뇌력인지 뭔지가 강해지고 있다든가?”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육욕이 아닌 탐욕이다.]

    [물론 육욕이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

    용호가 손을 크게 휘둘러 아몬의 말을 끊었다. 어쩐지 모르게 등 뒤에서 카타리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농담 하나 안 하던 양반이 왜 꼭 이럴 때 곤란한 농담을 한단 말인가.

    아몬의 작은 웃음소리에 한숨을 내쉰 용호는 구시온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카이완에게 치킨은 잘 전해줘. 안부도 전해주고.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용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시온이 그런 용호를 손수 배웅했다.

    &

    “과연. 이래서 내 허락이 필요하다고 했던 거군.”

    투기장을 나오자 정말로 늦은 시간이 되었지만 용호는 마왕의 방으로 향하는 대신 버그림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버그림이 정말로 목이 빠져라 용호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버그림의 작업대 위에는 거의 카타리나만한 크기의 뼈가 통째로 올라가 있었다. 본 드래곤의 갈비 뼈 가운데 일부였다.

    드래곤의 뼈는 분명 굉장한 소재였다. 단단하고 가벼운데다가 강력한 마법적 기운까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엔 금속이 아닌 뼈였다.

    가공이 자유롭지 못했다. 금속처럼 녹였다가 굳혀서 다시 모양을 만든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드래곤의 뼈를 가공하는 방법은 오직 ‘가는 것’ 하나뿐이었다.

    뼈를 갈아 칼을 만들면 자연 버려지는 부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버려진 부분을 전부 다 활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마법 촉매로도 가치가 있는 드래곤의 뼈였으니 아주 버려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구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래저래 낭비가 심한 재료였다.

    그래서 버그림은 용호를 기다린 것이었다. 구체적인 주문을 받고 사용할 수 있는 뼈의 양을 허락받아야만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버그림의 두 눈에는 욕망이 번뜩였다. 마력 진화를 갈망하던 당시와 거의 같은 눈이었다.

    ‘엄청나게 재미있는 장난감이 손에 들어온 거랑 비슷한 건가?’

    알 수 없었다. 용호는 그저 키득 웃은 뒤 버그림에게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상위 스켈레톤이라 할 수 있을 ‘용아병’들을 만든다는 것 외에는 아직 본 드래곤의 뼈를 어떻게 활용할 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선 것은 아니었던 터라, 커다란 송곳니 하나와 자잘한 뼈 몇 개만을 제공하기로 했다. 예속 사역마들이 쓸 무기와 방어구를 만드는 데는 이 정도로도 충분할 터였다.

    버그림은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보아하니 어느 정도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복도에 나온 카타리나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버그림은 언제 봐도 늘 열정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게. 처음하고는 완전히 다르지?”

    카타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마몬 가에 왔을 때만 해도 완전히 죽은 눈을 하고 있던 버그림이었다.

    그리고 달라진 것은 버그림만이 아니었다. 마몬 가의 사역마들 모두가 달라졌다.

    “엘리고스 집사장도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만감이 섞인 카타리나의 목소리였다. 용호는 키득 웃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던 마몬 가의 첫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던전 상회에서 처음 산 사역마인 존과 론도 이제는 단순한 고블린이 아니었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그 능력까지도 일반적인 고블린을 초월한 지 오래였다. 지금이라면 오우거와 싸워도 이길 가능성이 높았다.

    용호는 카타리나와 함께 마왕의 방으로 향하며 소소한 담소를 나누었다. 밤이 깊었기 때문인지 사역마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왕의 방에 도달했을 때였다.

    [주인님, 밤이 깊었습니다.]

    [이제 그만 쉬셔야죠.]

    은근하기 짝이 없는 루시아의 목소리였다.

    용호는 눈을 가늘게 떴고, 루시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이번에야말로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 어어어?]

    [여, 연결이 흐려지고 있-?]

    [주인님?!]

    [언제 이런 능력-]

    [연결- 끊으- 시면- 미워- 할 거예-]

    뚝뚝 끊어지던 루시아의 목소리가 종국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홀가분한 얼굴이 된 용호는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카타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내일도 바쁠 테니까. 이제 그만 쉬어야지.”

    사실이었다. 내일은 용아병 소환은 물론이고 스컬을 비롯한 사역마들의 진화 역시 진행할 예정이었다. 아마 오늘 이상으로 많은 마력을 사용하게 될 터였다.

    카타리나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마왕의 방 입구 쪽에 붙어 있는 자신의 방을 한 차례 돌아보더니 이내 평소와는 조금 다른 미소를 머금었다. 새삼 어색한 표정이 된 용호에게 살갑게 말했다.

    “네, 가주 님.”

    카타리나가 용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자연스럽게 마왕의 방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

    평화를 되찾은 남부와 달리 북부는 불타고 있었다.

    엠브리오의 죽음이 야기한 혼란이었다.

    동부 군은 북부 군을 사납게 몰아쳤다. 북부 군 사이에는 결사적인 항쟁을 펼치는 이도 있었고, 너무나 손쉽게 동부 군에 무릎을 꿇는 자도 있었다.

    무너지고 불타는 것들 가운데는 엠브리오의 던전도 있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던전이었다. 때문에 북부 군 가운데서도 지금 불타고 있는 던전이 엠브리오의 던전이란 사실을 아는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늑대 한 마리가 불타는 던전을 나섰다. 주인이 떠나기 전 남겼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무리를 이끌던 우두머리는 죽었다.

    하지만 우두머리가 죽는다 하여 무리까지 함께 죽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우두머리가 나타난다면 무리는 얼마든지 그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엠브리오의 모든 유산.

    그것들을 지닌 늑대는 홀연히 북부를 떠났다. 이제는 유명을 달리한 주인을 따라나섰던 무리와 합류하기 위해 남부로 향하였다.

    주인이 죽기 직전에 지목한 새로운 우두머리.

    주인이 왕이라 인정한 자.

    달빛이 흐렸다. 늑대가 어둔 밤을 달렸다.

    제 45장 - 준비 끝, 제 46장 - 천칭 좌의 엘룬으로 이어집니다.

    < 제 45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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