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35화 (135/227)
  • < 제 44장 #3 >

    &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보랏빛 눈을 가진 여인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이질적이라 여겨지는 여인도, 자신에게는 그저 한 사람의 여인일 뿐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지혜로웠으며, 다정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사랑했다.

    그것이면 족한 것이었다.

    자신.

    눈을 깜박였다. 여인이 사라졌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사내가 보였다. 덩치가 어찌나 큰 지 앉아 있음에도 자신과 눈높이가 같았다.

    사내가 말했다. 타당한 말이었다. 야만적인 외양과 달리 그는 언제나 합리적이었다.

    달변은 아니었지만 강한 힘이 담긴 짧은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끝내 사내의 말에 따르지는 않았다.

    사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애당초 이리될 줄 알았다는 듯 한숨만 한 번 내쉬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 뒤를 지켜주었다.

    다시 몇 걸음을 걸었다. 주변이 일변했다. 저만치 먼 곳에 두 여인이 서 있었다. 나란히 서다 못해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끌어안고 있었지만 둘의 표정은 달랐다.

    붉은 가죽으로 눈을 가린 금발 여인은 자꾸 달라붙으려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귀찮다는 듯 성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여인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은 그런 금발 여인의 행동에 환히 웃었다. 더욱 더 격렬하게 친한 척을 해댔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눈꺼풀로 눈동자를 가리니 더 많은 것들이 떠올랐고, 다시 사라졌다.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붉은 피부의 사내와 물빛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붉은 사내의 머리에는 마치 황소 같은 뿔이 솟아 있었다.

    여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그가 말했다. 어디까지고 따라가겠다는, 늘 입에 담던 그 말이었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에게 했던 것과 같은 뜻이었다.

    들어줄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돌아섰다. 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 있었다. 그곳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상과 상이 겹쳤다. 시선과 시선이 혼재되었다. 용호는 방금까지 ‘자신’이었던 자를 계단 아래쪽에서 올려다보았다.

    “안녕.”

    “마몬.”

    부지불식간에 목소리가 나왔다. 계단 위의 남자- 탐욕의 왕 마몬은 싱긋 웃었다. 계속 서서 내려다보는 대신 계단 위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용호는 직감했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지금 저기 서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환상들과 같았다.

    마몬은 턱을 괴었다. 커다란 뿔 두 개가 왕관을 대신했다. 나머지 뿔들은 감춰져 있어 본래 몇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환상이었다.

    분명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몬의 눈에는 다양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애틋함과 다정함이라 해도 좋았다.

    “이곳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네가 내 후손 가운데서도 특별한 녀석이라는 것이겠지. 탐욕의 힘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이계 출신이기까지 한 특별한 녀석 말이야. 과연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에 너 같은 녀석이 태어났을지 궁금하구나. ‘연’을 얼마나 닮았는지도 궁금하고. 피가 너무 많이 섞여서 연의 모습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려나?”

    검정빛 머리칼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

    마몬은 턱에서 손을 떼었다. 표정에 아쉬움을 담았다.

    “애석하게도 지금의 네게는 아직 자격이 부족하구나. 모든 것을 전할 수는 없겠어. 하지만 자격을 갖출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구나.”

    무슨 말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물며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 자리에 못 박혔고, 마몬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팔을 벌렸다.

    “나의 아이야. 이 사실을 명심하거라. 나는 언제나 내 욕망에 충실했다. 그렇기에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남자의 말도, 구시온의 말도 듣지 않았다. 사랑했기에 스카자하의 바람을 거절했다. 굳이 마지막을 함께 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야, 새로운 탐욕의 왕아. 너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

    마몬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용호는 마몬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몬이 돌아섰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왕의 뒷모습만을 보인 채 나아갔다.

    그 등을 바라보던 용호는 고개를 좀 더 들었다. 계단 끝에 맞닿은 하늘을 우러렀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하늘.

    마계가 아니었다. 인계 역시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

    어둠이 빛을 사로잡았다. 용호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커헉!”

    한 번에 숨을 몰아쉬었다. 급히 뜬 눈에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리는 아버지가 보였다. 카타리나의 목소리 역시 들렸다.

    “가주 님!”

    가슴이 아렸다. 순간 균형이 무너진 용호는 급히 손을 뻗어 땅을 짚었다. 카타리나가 그런 용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상의가 벗겨져 있었다. 정확히는 찢겨져 나간 것이었다. 수십 조각으로 갈라진 금속판이 마치 문신처럼 왼쪽 가슴팍에 붙어 있었다. 짐승의 발톱에 당한 상처처럼 길게 이어진 그것은 옆구리에까지 닿았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했다. 막혀 있던 무언가가 뻥 뚫린 기분이었다.

    용호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탐욕이 느껴졌다. 탐욕이 새로운 무언가를 먹어치웠다. 이전에는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속성력.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지만 결국 자기화할 수 없었던 것들.

    탐욕이 아가레스의 번개를 다시 일깨웠다. 랜드 웜의 속성이었던 대지 역시 번개를 따라 깨어났다.

    연이어 빛과 어둠을 느꼈다. 칠대속성이라 불리는 대지, 불꽃, 바람, 물, 번개, 빛, 어둠이 모두 탐욕 안에서 저마다의 빛을 발했다.

    강약은 존재했다. 하지만 모두가 용호의 힘이 되었다. 심지어는 칠대속성이 아닌 다른 것들 역시 이제는 용호의 속성력이라 할 수 있었다.

    용호는 다시 눈을 떴다. 보다 강해진 탐욕을 갈무리했다.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을 한 카타리나와 아버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 거냐? 아프진 않고?”

    “네.”

    마몬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기억의 전승과 탐욕의 강화. 그중 기억의 전승은 불완전했다. 하지만 탐욕의 강화만은 제대로 이루어졌다.

    ‘정확히는… 탐욕을 다루는 법을 배운 느낌이야.’

    오랜 시간 탐욕의 힘을 다루었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노하우. 그것을 한 번에 얻은 것 같았다. 탐욕과 용호 자신의 의지가 하나 되었다는 일체감까지 들었다.

    카타리나를 조심스럽게 밀어낸 용호는 다시 앉은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천기자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우리 집에 마왕의 피가 흐르긴 흐르는 모양이구나.”

    “요괴 피도 흘러요.”

    용호가 불쑥 말했다. 전승된 기억 가운데 하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우리 선조. 그러니까 마몬이랑 결혼해서 우리 조상님들을 낳은 분.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반인반요였어요. 구미호요. 이름은 연이었고요.”

    구미호가 뭔지 모르는 카타리나는 당혹스런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잠시 멍해있던 천기자는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파격적이지만 뭔가 딱히 놀랍지는 않은 출생의 비밀이군.”

    천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었고, 그렇게 태어난 것 역시 엄청나게 먼 조상이었으니까.

    용호 역시도 꽤나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의 후손이나 마왕과 반요의 후손이나 그게 그거 같았다. 어차피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인간의 피가 섞여도 참으로 많이 섞인 천씨 가문이었다.

    천 년의 세월동안 대를 이어 물려받은 유산은 이제 용호의 가슴에 있었다. 더욱이 어떻게 제거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벽에 붙은 시계를 슬쩍 돌아본 천기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서려는 용호와 카타리나에게 말했다.

    “밤이 깊었구나. 오늘은 이만 자라. 네 방에 자리 깔아 놨다.”

    “아버지?”

    천기자는 용호를 지나 안방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방까지 직접 안내할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 용호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타리나 역시 두 사람을 따라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이후 이어진 천기자의 행보가 조금 남달랐다.

    천기자는 용호의 방으로 향하는 대신 현관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거실 소파에 올려두었던 외투를 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가서 한 잔 걸치고 오마. 아마 내일 아침 늦게나 들어올 것 같다.”

    “에?”

    이게 지금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용호 자신이 몇 달 만에 돌아왔는데 나가신다? 아니, 그보다 이 시간에 누굴 만나 술을 드신다?

    어리둥절해하는 용호의 모습에 천기자는 끌끌끌 혀를 찼다. 그저 눈만 한 번 찡긋한 뒤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마치 바람과 같은 퇴장이었다.

    용호는 바로 따라 나가기 앞서 아버지의 마지막 눈인사를 떠올렸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있었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 용호는 급히 돌아섰다. 마찬가지로 허둥거리는 카타리나를 챙기는 대신 자신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방바닥 한 가운데.

    베개는 두 개인데 이불은 하나였다.

    문화가 달라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용호와 카타리나는 얼굴을 붉혔다. 다시 한 번 동시에 마른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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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둡고 조용했다.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약간이지만 가쁜 숨을 토했다. 용호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았다.

    사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나란히 누운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가주 자리에 오르고 며칠 동안은 늘 이렇게 바닥에서 카타리나와 함께 자지 않았던가.

    ‘달라! 어떻게 같아!’

    그랬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절대로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없었다.

    엘리고스가 없었다. 루시아도 없었다. 지금 당장 저 문을 열고 나타나 훼방 놓을 오필리아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아몬조차도 평소와 달리 반응이 없었다. 마치 잠이라도 든 것 같았다.

    “카타…….”

    “가주…….”

    거의 동시에 목소리가 나왔고, 또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극한 긴장 속에 용호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먼저 말해.”

    “가주 님 먼저…….”

    그런데 이번에도 동시에였다. 목소리가 허공에서 섞이지 못하고 뭉개져 흩어졌다.

    속된 말처럼 환장할 것 같은 상황 속에 용호는 눈을 꽉 감았다. 용기를 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그런데 그 때였다. 손끝에 닿는 것이 있었다. 오늘은 물론이고 그간 몇 번이나 잡아본 적이 있는 카타리나의 손이었다. 하지만 각별했다. 그저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마치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먼저 움직인 것인지, 아니면 카타리나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손과 손이 맞닿았다. 자연스럽게 깍지가 껴졌다.

    “지난번 소원… 지, 지금도 유효하죠?”

    용호가 눈을 떴을 때 카타리나가 말했다. 떠듬거리긴 했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용호는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누운 카타리나가 귀를 축 늘어트린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용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타리나는 용호와 맞잡지 않은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용호에게 얼굴을 가까이하였다.

    이번에도 카타리나는 눈을 감았다. 숨결이 닿았고, 연이어 입술이 닿았다. 수줍은 입맞춤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혀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처음 맛보는 타액은 너무나 달콤했다.

    ‘너, 너무 잘한다?’

    용호는 당황했다. 카타리나의 키스는 분명 서툴렀다. 하지만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이번이 처음인 터라 잘하고 못하고를 분간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용호는 확신했다. 잘했다. 그것도 매우. 엄청나게. 카타리나가 반은 서큐버스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끊어졌던 호흡이 다시 이어졌다. 입술에 달뜬 숨이 닿았다.

    살며시 눈을 뜬 용호는 저도 모르게 재차 침을 삼켰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는 카타리나의 눈을 보았다. 움츠러든 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자연스럽게 그 뺨을 어루만졌다. 뜨거웠다. 용호는 웃었고, 카타리나는 입술을 살짝 움츠렸다. 축 늘어졌던 귀가 긴장이라도 했는지 뻣뻣하게 섰다.

    용호는 뺨에 이어 귀를 만졌다.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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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기자는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왔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는 아들놈이 거실 소파에 무척이나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이의 얼굴이 저러할까.

    사나이의 미소를 지어보이는 아들에게 어젯밤처럼 눈을 찡긋해준 천기자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용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가게는요?”

    “오늘은 임시 휴일이다. 네 녀석 내일 돌아간다고 나한테 말했던 거 잊었냐?”

    어제는 이미 영업 중이었고, 가게에 손님들도 계셨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아침잠이 많은 카타리나가 오늘은 유독 더 늦게 일어났다.

    살짝 어색한 가운데 용호는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항상 두 사람만 자리하던 부엌 식탁에 모처럼 세 사람이 자리했다. 마치 옛날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시 꿈 같은 하루가 지났다.

    마계에 가져갈 짐들을 한 가득 싼 용호는 스크롤을 찢어 새로운 뒤틀림을 만들어냈다. 마몬 가에 신호를 보내자 뒤틀림으로부터 커다란 공간의 문이 형성되었다.

    “또 올게요.”

    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는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마계에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천기자는 그런 용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끝내 함께 가자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 아들에게서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들아. 늘 그랬듯이 네 선택을 존중한다. 그러니 잘해라.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고. 알았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순간 용호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눈치 채고 계셨다. 용호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이고 마계가 결코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말이다.

    역시 아버지를 속일 수는 없었다. 눈빛만으로 용호 자신의 모든 것을 간파하는 분이셨다.

    아버지시니까.

    부모님이시니까.

    천기자는 용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품에 안는 대신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거리를 벌렸다.

    “이제 그만 가라.”

    “네, 아버지.”

    용호는 웃었다. 카타리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엔 인삿말 만들기를 포기했다. 천기자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천기자도 웃었다. 얼른 가라는 듯 손짓으로 새 쫓는 시늉을 했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손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목례한 뒤 공간의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천기자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간의 문이 닫히고, 마침내 뒤틀림까지 완전히 소멸한 뒤에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겨우 돌아섰다.

    ‘우리 집안엔 마왕의 피가 흐른다.’

    이 말을 한지 겨우 4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천기자는 용호의 방을 나섰다. 참으로 오랜만에 푸른 안광을 일으켜 보았고, 어설프게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가게 문을 열어야 할 시간이었다.

    제 44장 - 마몬의 유산 끝, 제 45장 - 준비로 이어집니다.

    < 제 44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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