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34화 (134/227)
  • < 제 44장 #2 >

    &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용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따뜻한 남부 공백지와 달리 함박눈이 내리는 서울의 밤은 무척이나 추웠다.

    옷장에서 대충 패딩 하나와 소위 바람막이라 불리는 등산용 야상을 하나 챙긴 용호는 잠깐의 고민 끝에 패딩을 카타리나에게 넘겼다. 아무래도 패딩이 더 따뜻할 것 같아서였다.

    살짝 아쉽게도 카타리나는 엘리베이터를 그다지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상자 같은 건 마계에도 꽤 널려 있었으니 말이다.

    카타리나는 오히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에 관심을 보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부 공백지, 그 중에서도 남부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카타리나는 눈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다.

    파닥거리는 대신 움찔거리는 귓불을 쳐다보던 용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본래라면 카타리나의 귀가 이어져 있을 허공을 만져보았다. 역시나 말캉하니 카타리나의 귀가 만져졌다. 티그리우스의 마법은 카타리나의 귀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추는 역할만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카타리나가 흠칫하는 사이 용호는 반사적으로 손을 놀렸다. 마력을 읽어내려고 노력할 것도 없이 빳빳하게 선 꼬리가 손에 쏙 들어왔다.

    역시 지난 번에 느낀 게 맞았다. 중독될 것만 같은 위험한 감촉이었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용호는 허둥거리는 카타리나에게 꼬리를 허리에 감거나 패딩 안에 넣을 수 있느냐 물었다. 지금 상태면 지나가던 행인에게 꼬리가 부딪힐 위험도 있었다.

    짓궂은 장난은 삼가달라며 간만에 강하게 나가보려던 카타리나는 결국 어수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이런 면에서는 호구 기사다웠다.

    아파트 출입문을 지나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용호는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물들였다. 새카만 하늘과는 상반되는 색이었지만 극렬한 대립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밤은 하얀 눈을 부드럽게 감쌌고, 하얀 눈은 밤에 포근함을 선사했다.

    아파트 화단 등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풍경에 다채로움을 더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런 거 대체 왜 하냐고 혀를 끌끌 찼지만 오늘은 달랐다. 세상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훈훈하구나.’

    용호는 주머니에 손을 낀 채 왼팔을 살짝 들어 틈을 만들었다. 슬쩍 눈짓을 하니 카타리나는 입술을 움츠리다가 용호의 팔짱을 꼈다.

    아직 크리스마스 이전인지 곳곳에서 캐럴 송이 흘러나왔다. 거리에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길이 넓게 나있는 동네였지만 그래도 남부 공백지에 비해서는 모든 것이 오밀조밀했다. 카타리나는 호기심이 생길만도 하건만 주변을 마구 둘러보는 대신 용호에게 살짝 몸을 기댄 채 밤하늘의 눈만 올려다보았다.

    용호도 참 묘한 기분이었다. 옆에 카타리나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인계에 돌아왔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엠브리오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었는데 지금은 평화 속에 있었다.

    그런데 평화에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마몬 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카타리나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대신 스스로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날카로워진 감각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길가를 지나던 이들도 잠시 멈춰서서 이쪽을 돌아보았고, 심지어는 휴대폰 카메라를 몰래 들이미는 이들도 있었다.

    용호보다 더 날카로운 감각의 소유자인 카타리나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작은 목소리로 용호에게 속삭였다.

    “가주 님, 주변의 시선이 심상치 않습니다. 혹여 정체를 들긴 것은 아닐까요?”

    불안함보다는 날카로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호구 기사라고 놀리고는 있지만 그녀는 호위 기사였다. 용호 자신을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주변에 있는 이들을 모두 쓰러트릴 수도 있었다.

    용호는 그런 카타리나의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괜찮아. 그래서 쳐다보는 거 아니니까. 그냥 신경 꺼도 돼.”

    카타리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은 용호의 명에 따랐다. 용호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시선과, 그 시선에 담긴 여러 감정들을 즐기며 보무도 당당하게 나아갔다. 시선들 사이에 가끔씩 여자들도 섞여 있고, 카타리나보다는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즐거움의 하나였다.

    ‘그래, 내가 좀 멋있어졌지. 몸도 좋아졌고.’

    남들이 들었다가는 본인보다 주변이 민망할 말들을 속으로 삼킨 용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에 자리한 가게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목재로 외양을 꾸민 가게였다. 유리벽 안쪽에는 치킨과 맥주를 탐하는 이들이 한 가득이었다. 치킨집 안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방에서도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는데, 치킨집을 보니 무언가 왈칵하는 것이 있었다. 용호는 눈동자를 굴려 손님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이를 바라보았다.

    “가자.”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용호는 카타리나와의 팔짱을 풀고 성큼성큼 걸었다. 가게 문이 열리며 짤랑 종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짧게 말했다. 종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던 이는, 용호를 마주한 중년 사내는 순간 멈칫했다. 잠깐의 시간을 두고 나서야 다시 입술을 벌렸다.

    “아들아.”

    용호와 중년 사내- 용호의 아버지인 천기자는 동시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아버지!”

    용호가 다시 말하며 두 팔을 벌렸다. 감동의 포옹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천기자는 그런 용호를 꽉 끌어안았다. 등을 두어 번 두드린 뒤 다시 얼굴을 보았다. 웃으며 말했다.

    “마침 잘 왔다. 감동의 해후는 영업시간 끝나고 마저 나누자. 지금 배달 밀렸다. 대목이잖니.”

    빠르게 쏟아진 말에 용호는 눈을 껌벅였다. 저도 모르게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월드 파크 6단지에만 둘이다. 세부 주소는 종이가방에 붙여 놨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가게 밖. 그것도 치킨이 든 종이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나눠 쥔 상태였다.

    용호는 다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이쪽을 쳐다도 안 보고 있었다.

    “어… 가주 님?”

    아예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던 카타리나가 당혹스런 목소리를 흘렸다. 용호는 그런 카타리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 아니라 시원한 웃음이었다.

    “우리 아버지 맞네, 맞아.”

    “가주 님?”

    “우리 집에서는 이게 정상이야. 감동의 해후는 영업시간 이후에 나누는 게 맞지.”

    몇 달만의 귀환인데 지금처럼 대하는 것이 섭섭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안심이 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건재하셨다. 자신의 부재도 잘 받아들이신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보면 게시판에 학사경고장이랑 신체검사 통지서도 일부러 붙여두신 건가?’

    자기가 돌아오자마자 보여주신 다음에 놀리시려고?

    이번에도 아버지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용호는 즐겁게 배달용 오토바이 위에 올랐다. 더욱이 오늘은 혼자도 아니었다. 등 뒤에 자리한 카타리나가 자연스럽게 용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강석아! 치킨 왔다. 가서 받……]

    스피커폰 너머로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호는 간만에 다루는 카드 단말기를 조작하며 현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카타리나는 그런 용호의 등 뒤에서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자 제법 잘생기고 건장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겨울이었지만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만 삼천 원이었…….”

    문을 열자마자 친근하게 말하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든 청년- 스피커폰의 목소리대로라면 강석이란 이름을 가졌을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멍한 얼굴로 용호의 어깨 너머에 자리한 카타리나를 쳐다보았다.

    용호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용호는 강석의 손에 들린 카드를 받아든 뒤 능숙하게 카드 단말기를 조작했다. 여전히 약간은 멍한 눈으로 카타리나를 쳐다보고 있는 강석에게 카드와 치킨이 든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맛있게 드세요.”

    “어, 예. 안녕히 가세요.”

    그래도 마지막에 가서는 제정신을 차렸는지 강석도 웃으며 인사했다. 뭔가 아쉽다는 듯 카타리나를 다시 쳐다보았지만 이내 문을 닫았다.

    “너한테 반했나본데?”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며 용호가 작게 말하자 카타리나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나약한 인간인데… 범상치 않은 느낌입니다. 어쩌면 굉장한 잠재력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화를 거듭한 결과 상당한 눈썰미를 갖추게 된 카타리나였다. 그런 카타리나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뭔가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도 좀 더 제대로 볼 걸 그랬나? 마력이라든가.’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그래봐야 치킨 시켜먹는 20대 청년이었다. 용호 자신처럼 마왕의 피를 이은 것도 아닐 터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용호는 다시 오토바이 위에 올랐다. 길 건너에 자리한 방송국의 커다란 옥외 모니터에서 뉴스 기사가 흘러나왔다.

    [최근들어 온라인 게임 플레이 도중 혼수상태에 빠지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특정 게임이 아닌 여러 게임에서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한 상황입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온라인 게임이 가진 중독성 등 각종 해악을 그 원인으로 삼고 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전혜림 기자와 연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혜림 기자?]

    방송 소리가 멀어졌다.

    용호는 그 이후에도 일곱 번의 배달을 더했고, 밤 열 한 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서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평소보다 일찍 가게 문을 닫은 덕분이었다.

    안방 바닥에 자리를 잡은 천기자는 용호와 카타리나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비교적 차분하게 용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용호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그대로 말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전투에 관한 부분을 거의 전부다 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마몬 가의 첫 상태를 상당히 미화시켰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천기자는 무거운 숨을 한 번 토한 뒤 용호와 카타리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아주 작게 말했다.

    “씁. 내가 갔어야 하는데.”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들렸다. 그랬기에 용호는 웃었다. 역시나 아버지다운 대응이었다.

    그리고 이 대응 자체가 농담이었는지 천기자도 키득 웃었다.

    “아무튼 네 녀석이 내 오랜 숙원을 대신 풀어줬구나. 마왕이 된 거 축하한다. 음, 축하해도 되는 거 맞지? 거기 마계에 용사나 뭐… 그런 놈들은 없을 거라 믿는다.”

    오랜 숙원이란 부분에서 용호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역시나 집안의 비밀을 알았을 때 망상을 펼친 것은 용호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용호는 새삼 자세를 바로하고 천기자를 보았다. 가타부타 말할 것 없이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이름 : 천기자 (남)]

    [종족 : 인간]

    [속성 : -]

    [개체 천성]

    [영리함 / 엉뚱함 / 엉큼함]

    [개체 적성]

    [지력 / 체력]

    역시나 부전자전이었다. 엉큼함에서 한 번 웃은 용호는 이내 복잡미묘한 한숨을 흘렸다. 바닥에 가까운 능력치 때문이 아니었다. 진화 숙련치를 모으지 않아도 단번에 진화가 가능한 현 상태 때문이었다.

    ‘스켈레톤 일꾼과 동급이시란 건가.’

    사실상 그냥 인간에 가까운 아버지시니까. 하지만 안구에 습기가 차는 일이기는 했다.

    용호가 진화의 권능으로 진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용호 자신과 일정 이상의 관계성을 가진 자들만이었다. 그랬기에 일단 사역마로 삼아야 진화를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천기자는 경우가 달랐다. 그는 용호의 아버지였다. 사역마로 삼는 과정이 없어도 얼마든지 진화가 가능했다.

    “아버지. 눈 감고 가만히 계셔보세요. 제가 좋은 거 해드릴게요.”

    “안광이 아주 강렬하구나. 정전났을 때 손전등이 없어도 되겠어. 나랑은 달라.”

    “저야 진짜 마왕이니까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용호가 다가서자 천기자는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용호는 그런 천기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오옷?”

    체력 특화를 택하니 기대했던 결과가 눈앞에 만들어졌다. 엘리고스가 그랬던 것처럼 눈에 확 띌 정도로 회춘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했다. 눈가의 잔주름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체구도 보다 당당하게 변했다.

    ‘그래도 뿔은 안 생기시네.’

    잠시 고블린들을 생각한 용호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생각이 더 진행되면 안 될 것 같았다.

    용호야 어찌되었든 천기자는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팔 근육을 만지며 감탄했다. 이 모든 광경이 그저 즐겁다는 듯 푸근하게 웃고 있는 카타리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용호에게 말했다.

    “아들아, 나도 네게 줄 것이 있다. 언젠가 네게 물려주려고 했던 집안의 가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것 같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천기자는 장롱 안쪽에 자리한 소형 금고를 열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함을 꺼내 용호에게 내밀었다.

    “우리 집안의 가보다. 전해지는 이야기대로라면 우리 집안의 흐르는 마왕의 피의 근원이신 그 분의 물건이라고 한다.”

    말대로라면 천 년이 넘은 물건이란 소리였다.

    “신비한 물건이다. 그저 평범한 골동품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지난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우리 집안은 이 물건을 여러 번 잃어버렸었다. 하지만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다시 우리 집안의 손에 돌아왔다고 한다.”

    천기자가 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검고 동그란 금속판이 들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표정이 달라졌다. 용호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금속판을 이루고 있는 것.

    신의 금속 브리가다가 용호의 마력에 반응했다. 스스로 환한 빛을 발하였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간직해온 기억의 파편을 공개하였다.

    &

    < 제 44장 #2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