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32화 (132/227)

< 제 43장 #4 >

“엠브리오는 내게 탐욕의 왕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숨기라 했어. 여섯 왕 중에서 특히 식탐의 왕을 조심하라고 했고. 여기서부터 역으로 추측을 해봤어.”

용호는 남부 공백지 전도 위에 몇 개인가 되는 작은 공깃돌들을 올려놓았다. 각각 용호 자신과 엠브리오, 식탐의 왕과 검은 마수를 가리켰다.

“엠브리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식탐의 왕이다. 그리고 검은 마수는 식탐의 왕이 엠브리오를 돕기 위해 혹은 감시하기 위해 붙여놓은 수하이다.”

“감시… 말씀입니까?”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다면 엠브리오가 검은 마수를 죽인 것이 설명이 되지 않아. 그래서 나는… 엠브리오와 식탐의 왕의 관계가 수하와 주인이라기보다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었을까 해.”

티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탐의 왕이 남부 공백지를 탐냈다고 가정한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주님 말씀처럼 엠브리오가 식탐의 왕을 이용하려 했다면 속으로는 역심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 역시 있을 것입니다.”

식탐의 왕이 직접 나서는 대신 엠브리오라는 대리자를 이용하려 한 것 역시 설명할 수 있었다.

“남부 공백지가 버려진 땅이 된 이유는 척박한 환경 때문만이 아닙니다. 여섯 왕들이 왕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남부 공백지를- 저 위대한 탐욕의 왕 마몬의 발생지를 손에 넣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리자를 이용한다. 대리자가 통일한 남부 공백지를 배후에서 지배한다.

“그렇다면… 가주님께서는 엠브리오가 마지막 순간에 식탐의 왕을 배신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감시자를 죽여 가주님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식탐의 왕에 대한 경고까지 남겼고요.”

티그리우스의 가정에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침묵하던 카타리나가 미간을 좁히며 작게 물었다.

“엠브리오는 식탐의 왕이 그렇게 싫었던 걸까요?”

지금까지의 추측대로라면 엠브리오는 자신을 죽인 용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대신 식탐의 왕을 훼방 놓는데 마지막 생명을 불태운 셈이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어쩌면 가주님께 자신을 투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단순한 죽기 직전의 변덕일수도 있고요.”

오필리아의 말에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용호 스스로도 검토해본 가능성이었다.

“애당초 가정이 너무 많아. 엠브리오의 속내는 정보가 좀 더 모이기 전까지는 속단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보다는 식탐의 왕에 대해 좀 더 주목하고 싶어.”

“일단은 엠브리오의 말마따나 탐욕의 힘은 계속 숨기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곱 번째 왕이, 그것도 탐욕의 왕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다른 왕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티그리우스도 말을 보탰다.

“저 역시 오필리아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서서 봐도 식탐의 왕이 역시 문제가 될 여지가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그의 땅은 남부 공백지 북동부와 맞닿아 있습니다. 더욱이 그가 정말 엠브리오의 배후였다면 다른 왕들과는 정보량 자체가 다를 겁니다.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입니다만, 가주님께서 엠브리오와 본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움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왕들의 경계 때문에 직접 움직이지는 못하더라도 수하들을 보내 공작활동을 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의 확장보다는 남부에서 힘을 기르는 쪽을 선택할 생각이야. 북부와 동부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거지.”

급할 것이 없었다. 지금 용호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확장이 아니었다.

마몬 가의 던전- 탐욕의 미궁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는 예속 사역마들은 용호의 의도를 이해했다.

탐욕의 미궁을 공략해 탐욕의 신기를 완성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엘리고스는 다른 무엇보다 투기장을 떠올렸다. 용호가 투기장을 제압해 구시온을 비롯한 투기장의 사역마 모두를 손에 넣는다면 설사 식탐의 왕이 상대라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원조 예속 사역마라 할 수 있을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스컬, 오필리아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자 티그리우스는 묘한 소외감을 느꼈지만 일단은 침묵했다. 오늘 그러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용호에게 직접 들을 날이 올 거라 믿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용호는 마지막 화제를 꺼내들었다.

“오필리아, 마계 북부의 정보를 모아줘.”

“마계 북부 말씀이십니까? 오만의 왕의 영역인?”

남부 공백지가 마계 남쪽 끝이라면 오만의 왕의 영역은 북쪽 끝이었다. 서로가 세계의 끝이라 할 수 있으니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하지만 용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했을 때 시트리는 던전 상회의 긴급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어. 그리고 내게 ‘지금이 아니면 집에 다녀올 틈이 없을 거다’라는 말을 했고.”

“설마…….”

“단순히 남부 공백지의 일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난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의 싸움이 예상 이상으로 커졌을 가능성이 있어.”

남부 공백지는커녕 남부 밖으로도 나가본 적이 없는 용호였다. 하지만 그런 용호도 여섯 왕들 중 두 왕의 싸움이 마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이 맞붙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무겁군요.”

티그리우스가 침음을 흘렸다.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마계 전체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모두가 심각한 가운데 카타리나가 다시 입술을 움츠렸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주 님, 인계에 다녀오실 생각이신가요?”

“짧게. 향수병은 둘째 치고, 필요한 일이니까.”

공간의 문은 이미 완성되었다. 더욱이 비단 시트리의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로 지금 밖에는 기회가 없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북부와 동부, 식탐의 왕 때문에라도 자리를 비우지 못할 터였다.

용호가 엘리고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얼마나 자주 다녀와야 하는 거지?”

“가주님은 현재 처음 마몬 가의 가주 자리에 오르셨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신 상태입니다. 아마 이번에 다녀오시면 최소 수백 년 이상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용호는 이미 반인반마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강대한 존재였다. 굳이 따지면 카타리나처럼 ‘혼성마’라 불러야 할 터였다.

버그림이나 일전 던전 상회 경매장에서 보았던 이계의 용사 아스란의 경우엔 이계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정기적으로 고향에 다녀올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용호와 달리 마계에 넘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마력에 익숙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역시 후딱 다녀와야겠네.”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이틀에서 삼일 정도.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안심도 시켜드린 뒤에는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용호는 돌연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신의 등 뒤에 시립한 카타리나의 표정 때문이었다.

“왜? 아쉬워?”

이제야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네’라고 답할 수도 없었다. 카타리나가 대답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자 용호는 카타리나의 손을 잡았다.

“아쉬워하지 않아도 돼. 너도 같이 갈 거니까.”

카타리나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고, 이미 관련된 대화를 진즉에 나눈 바 있는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문 밖, 어쩐지 모르게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살라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끌끌끌 혀를 찼다.

&

[예속 사역마면 아무나 됩니다. 카타리나 말고 오필리아나 엘리고스나 티그리우스나, 하다못해 스컬은 어떠신가요?]

[위장이란 면에서 생각하면 티그리우스가 제일 좋을 것 같아요!]

밤이 깊은 시간.

서둘러 마몬 가에 돌아온 용호에게 루시아가 다급하게 제의했다.

용호의 귀성길에는 예속 사역마 하나가 동행할 필요가 있었다. 용호의 호위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귀환마법을 보조하기 위함이었다.

인계의 존재인 용호는 인계 쪽의 표지판이었다. 용호가 있기에 보다 안정적으로 인계로 통하는 공간의 문 좌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역 또한 필요했다. 마계의 존재, 그것도 용호와 긴밀하게 연결된 인물이 동행하면 마계로 이어지는 공간의 문을 용호 혼자 넘어갔을 때보다 훨씬 더 쉽고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카타리나를 선택했다. 더욱이 그녀는 용호 자신의 호위기사가 아니던가. 어느 모로 보아도 적격이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인님?]

[주인님님?]

[진짜 못 됐어! 인계로 넘어가시면 제가 감시- 아니, 지켜드릴 수 없다고요!]

대체 무엇으로부터 감시- 아니, 지킨다는 것일까.

용호는 이번에도 상큼하게 무시했다. 통신기를 들어 란돌트 가에 남아 있는 오필리아와 교신했다.

(다녀오시는 사이에 마몬 가의 힘을 최대한 회복해두겠습니다.)

(여기 일은 걱정 마시고 몸 건강히, 즐겁게 다녀오세요.)

짧은 문장 밖에 전할 수 없는 교신기였던 터라 용호 역시 짧게 답했다.

“부탁할게. 믿고 있어.”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 가주 님의 믿음에 부응코자 노력하겠습니다.)

오필리아와의 교신이 끊겼다. 용호는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사역마들을 돌아보았다.

“가주 님, 잘 다녀오세요.”

어느새 마몬 가 사역마들의 귀염둥이가 된 유리아가 모두를 대표해 예를 표했다.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자세를 낮추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용호는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물 사올게. 치킨이라고 알아?”

“치킨?”

“그래, 기대해도 좋아. 엄청나게 맛있는 거야. 세계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지. 가져올 수 있으면 콜라도 가져올게.”

뭔가 거창한 설명에 유리아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옆에 있던 바둑이는 먹을 거란 소리에 침을 질질 흘려댔다. 진화를 거듭한 결과 제법 듬직한 모습이 되었지만 여전히 단순한 녀석이었다.

마지막으로 살라미와 시선을 교환한 용호는 공간의 문 앞에 섰다.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정장을 차려입은 카타리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아버님께 안부도 전해주시고요!]

용호도 이번에는 무시하지 않았다. 루시아에게 인사한 뒤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갈까?”

“호위기사 카타리나. 목숨을 걸고 가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말은 비장한데 귀랑 꼬리가 파닥거렸다.

과연 아버지는 이 호위기사, 아니 호구기사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루시아가 공간의 문을 가동시켰다. 마몬 가 던전의 일일 마력 생산량 거의 전체가 공간의 문에 투입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요 며칠 축적해둔 마력의 절반가량이 소진되었다.

공간의 문의 텅 빈 원형 틀 안쪽에서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마치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푸른 마력의 판이 형성되었다.

저 너머에 인계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아주 가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다녀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용호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카타리나와 함께 공간의 문에 몸을 던졌다.

제 43장 - 귀성 끝, 제 44장 - 마몬의 유산으로 이어집니다.

< 제 43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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