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3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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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콩닥콩닥]
[저는 없는 사람 취급해도 된답니다. 이해해 드릴게요.]
다음날 아침과 점심 사이.
열하고도 몇 시간 동안의 수면에서 겨우 깨어난 용호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루시아의 말을 들었다. 카타리나가 깨워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대로 몇 시간이고 더 깨어나지 못했을 터였다.
“죄송합니다. 곤히 주무시고 계신데…….”
“아니, 내가 이때쯤 깨워달라고 했으니까. 고마워.”
푸근하게 웃은 용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카타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이내 주변을 둘러보더니 뺨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좋지만 동시에 부끄러웠다. 카타리나 역시 꼬리를 발딱 세우며 귀를 붉혔다.
[와, 세상에.]
[정말 없는 사람 취급하실 거예요?]
[제가 다 보고 있다고요?]
용호는 한 귀로 흘리며 카타리나의 뺨을 꼬집었다. 만지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루시아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부들부들]
[칭얼칭얼]
[흐규흐규]
연달아 의성어를 늘어놓는 것을 보니 정말로 서운하거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용호에게 있어서는 분신이나 다름없는 루시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용호는 카타리나와 루시아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조금 더 놀려준 뒤 방을 나섰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예속 사역마들과 마몬 가의 수비대장인 리쿰을 한 자리에 모았다.
“다들 정말 수고했어.”
진심이었다. 한 자리에 모인 사역마들 가운데 멀쩡한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두가 정말 큰 고생을 했다.
용호는 거의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리쿰을 돌아보았다.
“리쿰, 전투에 참여한 사역마들에게는 모두 합당한 포상이 있을 거다. 살아남아 줘서 고맙다.”
마몬 가의 사역마들은 게임 속의 캐릭터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가진 진짜 사람들이었다. 비단 고마움의 표시를 떠나, 그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충성을 살 수는 없었다.
“던전 상회 운송 서비스팀에서 본 드래곤의 뼈 운송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신속 정확한 자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속 사역마들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가장 멀쩡한 축에 속하는 티그리우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지쳐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가장 멀쩡하다는 이유로 전투 후 뒤처리 대부분을 떠맡았기 때문이다.
용호는 그런 티그리우스를 마주하다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어째 티그리우스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나?”
티그리우스는 즉답하는 대신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이 또한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티그리우스가 말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본 드래곤의 뼈를 조금 얻고 싶습니다. 정말 조금이면 됩니다.”
금욕적이고 완전무결한 노신사인 그였지만, 동시에 마법사이기도 하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드래곤의 뼈였다. 무구의 재료로뿐만 아니라 마법 실험의 소재나 각종 강력한 마법의 촉매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번에 손에 넣은 본 드래곤의 뼈는 완전히 자란 성체의 것이었다. 마법사라면 탐을 내는 것이 당연했다.
제법 간절하기까지 한 시선에 용호는 시원하게 웃었다. 예속 사역마가 된 이래 티그리우스가 이렇게까지 욕망을 드러낸 일이 없으니 꼭 들어주고 싶었다.
“마음껏 써도 된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다소 무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뺨을 붉혔지만 티그리우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예속 사역마들도 다들 용호처럼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사투를 함께 한 그는 이미 마몬 가의 한 식구였다.
리쿰이 다시 말했다.
“전장의 뒤처리는 오늘 일몰 전에 끝이 날 것 같습니다.”
“장례식 진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일단은 간단하게 처리한 뒤 자유도시에 돌아가서 제대로 거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망자들의 보상금 문제도 있으니… 급히 처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장례식은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자유도시는 현재 용호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인재 풀이었다. 앞으로의 발전에서도 기반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 결코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본 드래곤에게 목숨을 잃은 미치광이 오로스를 떠올렸기 때문인지 오필리아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리쿰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나머지 보고를 이었다. 부상자들의 회복 상태와 남은 병력들의 피로도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해 보지. 오필리아, 부탁할게.”
용호가 지목하자 오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단하게나마 예를 표한 뒤 입술을 열었다.
“전투가 이제 막 끝난 지라 추측에 기반 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이 점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필리아의 정보력에도 한계라는 것이 존재했고, 당장에 오필리아 부터가 무척 지친 상태였다. 아무리 강인한 레드 데몬이라 해도 피를 토할 정도의 상처를 쉬이 회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모두를 안심시키듯 엷게나마 미소를 지은 뒤 설명을 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약 삼천 명으로 구성된 엠브리오 군 가운데 오백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이천 오백 가운데 부상이 심한 자들을 제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살아서 도망을 쳤습니다. 일선 지휘관들 역시 대부분 살아남은 터라 패잔병들이 모여 군사 활동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구심점이 될 엠브리오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 큰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어제 이야기가 된 것들이었다.
오필리아는 남부 공백지 전도의 북부와 동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투가 끝나고 이미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소문이 퍼지고 있을 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초토화된 서부보다는 북부가 문제입니다만, 일단 우리 남부와는 거리가 상당한데다가 동부 군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 인만큼 당장의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대로 동부 군에 흡수되거나, 동부 군을 격퇴한 뒤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에 들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쉬이 지날 수 없는 지형지물들이 산재해 있었다. 엠브리오가 서부를 빙 둘러서 남부를 친 것은 동부의 꼬리를 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북부에서 바로 남부를 공격하는 것이 지형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동부입니다. 이들은 세력을 거의 온전히 보존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가주 님과 우리 마몬 가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당장에 오필리아 자신만 하더라도 이제는 동부 군의 우두머리 가주와 싸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몬 가는 강했다. 이번 전투에서 그 사실을 증명해냈다.
엘리고스가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 카타리나 또한 입술을 살짝 깨물며 감정을 억눌렀다.
무너지기 직전의 마몬 가를 지켰던 두 예속 사역마들에게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꿈만 같았다.
“생존자가 많은 만큼 소문은 구체적으로 널리 퍼질 겁니다. 동부의 가주들도 머리가 있다면 경거망동하지 못하겠죠.”
북부를 먹어치운 뒤 엠브리오와의 일전을 생각하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엠브리오도, 마몬 가도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이번 전투의 경과를 듣고 나면 오히려 겁을 먹고 움츠러들 가능성이 높았다.
“동부 군의 선택지는 간단히 생각한다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이대로 북부를 치거나 동부로 돌아가 힘을 보존하는 것이죠.”
“북부를 치겠군.”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일어난 군대였고, 용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힘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엠브리오와의 전투로 마몬 가의 힘이 크게 쇠한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동부는 싫어도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남부에 자리한 마몬 가에게 자신들의 본거지인 동부를 빼앗길 위험이 있었으니 말이다.
용호의 예상에 오필리아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동부가 북부를 친다면 그들이 우릴 이용해 어부지리를 하려 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면 되니까요.”
어느 쪽이든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마몬 가에게는 그만큼의 힘이 존재했다.
살짝 흘러내린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낸 엘리고스가 오필리아에게 물었다.
“서부로의 확장 가능성은 어떻소?”
“불행인지 다행인지 초토화 된 서부에는 우리가 취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그나마 마지막 도시에 어느 정도 물자가 남아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엠브리오가 죽은 것이 알려지면 바로 약탈의 대상이 될 거예요. 서부는 아비규환이 되겠죠. 어쩌면 조만간 서부에서 남부로 유민들이 밀려올지도 몰라요.”
엘리고스에게 다정하게 답한 오필리아는 용호를 돌아보았다. 용호 역시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필리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리쿰이 다시 말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확장을 위해서는 일단 상처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던전과 영지를 정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병이 필요합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마몬 가의 동원 가능한 병력 수가 크게 감소했습니다. 일단은 힘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이번에도 정론이었기에 받아들였다.
용호는 잠시 시간을 가진 뒤 모두의 시선을 자신에게 모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전투 후의 뒤처리나, 앞으로의 일에 대한 예측이 아니었다. 용호는 시선을 살짝 멀리하며 말을 이었다.
“엠브리오는 분명 강한 자였어. 북부와 서부를 불과 몇 달 만에 통일한 효웅이었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제 전투에서 동원한 병력들은 너무 과했다는 느낌이야. 특히 본 드래곤은 말이야.”
“엠브리오에게 배후가 있을 거란 말씀이신지요.”
티그리우스가 물었다. 날카로운 지적에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배후가 존재한다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겁니다. 데스 나이트는 둘째치더라도 본 드래곤은 정말 이야기가 다릅니다.”
적어도 남부 공백지 내에 본 드래곤을 소유할 수 있는 가주는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것이 최상위 사역마들이었다.
더욱이 이번에 쓰러트린 본 드래곤에는 던전 상회의 표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던전 상회에서 비밀리에 만든 본 드래곤이거나, 던전 상회의 도움 없이 개인이나 집단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본 드래곤이란 이야기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그 스케일이 너무나 컸다. 남부 공백지가 아니라 마계 전체로 영역을 넓혀도 이 같은 일이 가능한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부터 조금 가정을 해보려고 해. 사실상 소설을 쓴다고 해도 좋아. 그 점을 감안하고 들어줘.”
티그리우스 뿐만 아니라 오필리아까지도 조금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차례 목소리를 가다듬은 용호가 말을 이었다.
“엠브리오의 죽기 전 마지막 행동은 이상했어. 녀석은 최후의 힘으로 날 공격하는 대신 오히려 날 지키는 쪽을 택했어.”
“지켰…다니요?”
오필리아의 물음이었다. 어제는 듣지 못한 이야기였기에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땅을 뚫고 나온 검은 마수가 날 기습하려고 했어. 너무 지쳐있었던 데다가 엠브리오에게 집중하느라 눈치 채지 못했는데, 엠브리오가 녀석을 죽였어. 마치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굉장한 마법을 사용해서 말이야.”
용호는 엠브리오는 물론이고 검은 마수의 정수 역시 취하지 못했다. 엠브리오가 사용한 마지막 마법이 둘 모두의 정수를 완벽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마법을 급조해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오직 검은 마수를 쓰러트릴 용도로 준비한 마법일 수도 있었다. 그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법을 자신과 싸우는 와중에는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녀석은 내게 이상한 유언을 남겼어. ‘탐욕을 숨겨라. 여섯 왕들, 특히 식탐의 왕을 경계하라’.”
용호는 말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리쿰과 티그리우스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 설마?!”
엠브리오가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 유언에 내포된 어떤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 리쿰. 나는 탐욕의 죄를 가진 탐욕의 왕이다.”
용호는 인정했다. 경악 그 자체라 해도 좋을 표정을 짓고 있는 티그리우스를 돌아보며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것이 홍련의 마창 아몬이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몇 번이나 본 광경이었지만 리쿰과 티그리우스에게는 너무나 새로운 광경이었다.
그랬다. 불꽃의 마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용호가 보여준 능력 또한 아티팩트 같은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돌아온 탐욕의 왕.
그의 곁을 지키는 홍련의 마창 아몬.
마계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들.
티그리우스는 혼란 속에 평온을 느꼈다.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호가 그간 보여준 기적과 같은 행보. 그는 결코 애송이 마왕 따위가 아니었다. 마침내 돌아온 남부의 진정한 왕이었다.
다시 아몬을 갈무리한 용호는 리쿰과 티그리우스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제 43장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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