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27화 (127/227)
  • < 제 42장 #4 >

    &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붉은 브레스 웨폰이 하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녹염을 두른 거창이 본 드래곤을 꿰뚫었다.

    하늘을 뒤흔드는 굉음. 마치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은 요란함과 현란함.

    살라미가 불꽃의 잔영을 남겼다. 텅텅 빈 본 드래곤의 뼈 사이로 빠져나와 다시 한 번 새로운 궤적을 그렸다.

    하늘에서 본 드래곤의 뼈가 쏟아져 내렸다. 본 드래곤을 언데드로서 존재하게 하는 죽음의 힘이 스카자하의 생명의 힘에 모조리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함성을 지르며 본 드래곤의 싸움을 지켜보던 자들은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몸길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괴수가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당황한 것은 엠브리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완의 목을 움켜쥔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카이완의 목을 부러트릴 수 있는 상황임에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이완이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만신창이였다. 용호가 본 드래곤과 사투를 벌이던 그때 지상에서도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 스스로가 말했듯 방어가 특기임에도 불구하고 카이완은 엠브리오에게 철저할 정도로 유린당했다.

    엠브리오는 용호와 비슷하면서 달랐다. 압도적인 마력으로 카이완을 찍어 누른 것만은 동일했지만, 그 섬세함과 정교함에서 차이가 났다.

    정말로 손도 쓰지 못했다. 엠브리오는 카이완의 공격뿐만 아니라 모든 움직임을 읽어냈다. 심지어는 왜곡의 권능조차도 미리 읽고 대처할 정도였다.

    카이완의 입술을 따라 피가 흘렀다. 공격을 허용한 것은 단 두 번에 그쳤지만 그 두 번이 컸다. 오른쪽 어깨는 박살이나 움직이지 않았고, 일장을 허락한 복부는 그 색이 끔찍하게 변해 있었다. 급히 왜곡의 권능으로 충격을 차단했지만 아주 약간 스며든 힘만으로도 내장이 진탕이 되었다.

    하지만 카이완은 투지를 잃지 않았다. 아직 왼팔과 두 다리가 남아 있으니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너와, 나랑은… 달라.”

    목이 붙잡힌 채 말했다. 쥐어짜낸 목소리에 붉은 날개의 잔영을 쫓던 엠브리오가 눈동자를 굴렸다.

    카이완은 반쯤 감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독스런 눈으로 엠브리오를 보았다. 싸움의 시간은 짧았지만 카이완은 간파했다. 엠브리오의 마력은 카이완 자신에게 익숙했다.

    “위대한 마몬의… 피가… 흐른 건, 우리… 모두, 같지. 하지만, 그것… 뿐이야.”

    엠브리오에게는 마몬의 피가 흘렀다.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은 마계에서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방계일수도 있었고, 마몬도 인식하지 못한 핏줄일지 몰랐다.

    엠브리오의 눈은 냉정했다. 하지만 카이완은 차가움 속에 숨긴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앞으로의 싸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렇기에 용호의 승산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만 했다. 카이완은 엠브리오를 격앙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지독한 미소를 머금었다. 용호 앞에서는 결코 지어보이지 않은, 마몬 가를 경멸하고 모욕하던 이들에게나 보이던 표독스러움을 전면에 내세웠다. 독사 같은 입술에 빈정거림을 담았다.

    “무릎 꿇고… 경배, 하라… 돌아오신… 탐욕의 왕을… 맞이, 하라.”

    카이완 입장에서는 그리 큰 효과를 기대하지 않고 입에 담은 말이었다. 연이어 엠브리오를 모욕해 그의 냉정을 깨트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카이완의 의도와는 달리 처음 입에 담은 말부터가 엠브리오의 역린을 건드렸다.

    엠브리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더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엠브리오는 다시 하늘을 돌아보았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엠브리오 뿐만 아니라 전장에 있는 모두가 그러했다.

    하늘에는 더 이상 본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았다. 살라미의 날개가 그리는 불꽃의 잔영은 아름답긴 했지만 전장의 모두로부터 시선을 이끌어낼 정도의 힘이 어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늘을 보았다. 마력에 민감한 자일수록 더욱 큰 압박감을 느꼈다.

    엠브리오는 입술을 벌렸다. 카이완은 가느다랗게 웃었다.

    본 드래곤의 마력이 흩어지지 않았다. 죽음의 기운에 오염되었기에 산 자는 흡수조차 할 수 없는 그 정수가 이제는 너무나 작게 보이는 녹염 속에서 타올랐다. 마몬 가의 가주가, 저 불꽃의 마왕이 본 드래곤의 정수를 집어삼켰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독을 삼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붕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통에 찬 비명도 없었다.

    거대한 마력의 발산.

    주변 일대를 진감시키는 강렬한 마력의 소용돌이.

    “탐욕의… 죄.”

    엠브리오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 순간 카이완이 왜곡의 권능을 목 주변에 둘러 엠브리오의 손을 튕겨냈다.

    카이완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엠브리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가 자신들의 왕을 찬양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지면을 박찼다. 성장하는 자신들의 마력을 느꼈다.

    그리고.

    녹염의 태양이 다시금 떠올랐다. 흡수한 본 드래곤의 마력을 거의 그대로 발산함으로써 마력 집중에 필요한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시킨 용호가 지상을 보았다.

    우뚝 솟은 다섯 개의 뿔이 요동쳤다. 살라미가 불꽃의 날개로 다시금 지상을 향했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엠브리오의 군대는 동요했다.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고자 했다.

    카이완은 미소 지었다. 엠브리오는 그녀를 방패로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몬 가 가주의 녹염은 경악스럽게도 피아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엠브리오는 재앙을 정면에서 맞이하기로 하였다. 다섯 개의 뿔을 곧이 세우며 마력을 발산했다. 권능을 발동시켰다!

    콰앙!

    용호가 아몬을 휘둘렀다. 녹염의 태양이 다시 한 번 지상을 강타했다. 엠브리오의 본대를 휩쓸었고, 다시 한 번 지상에 지옥도를 재현시켰다.

    용호는 잠시나마 눈을 감았다. 브리가다를 통해 전해지는 마력을 느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예속 사역마들의 상황을 인지했다.

    스컬은 여전히 데스나이트와 사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는 녹염 속에서 엠브리오의 본대를 박살냈다. 티그리우스는 스컬 대신 스컬부대를 지휘하며 엠브리오의 우익을 와해시켰다.

    용호는 다시 눈을 떴다. 카타리나가 용호의 허리에서 손을 풀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엠브리오와의 싸움에는 끼어들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오로스를 따라 출전한 자유도시의 병력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었다.

    살라미의 등을 밟고 일어선 용호가 카타리나를 보았다. 카타리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파닥이며 힘차게 웃었다.

    용호가 살라미의 등을 박찼다. 카타리나 역시 검은 마력의 날개를 펼치며 비상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엠브리오!”

    용호가 소리치며 지상에 내려섰다. 사방천지를 불태우던 녹염의 불꽃이 절로 갈라져 용호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녹염이 폭발했다. 강대한 마력이 녹염을 부쉈다.

    용호는 의식을 집중했다. 대기 중의 마력을 읽었다.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궤적을 예측했다!

    콰강!

    아몬과 이름 모를 거창이 격돌했다. 용호와 엠브리오는 각자의 무기 너머로 서로를 보았다. 대기 중에 서로의 마력이 맞부딪혀 폭발했다.

    서로가 서로를 밀쳐냈다. 격돌의 순간만큼이나 빠르게 서로간의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똑같은 전술을 취했다. 주변에 발산하는 마력의 농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용호와 엠브리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상대는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력의 농도를 높였다. 상대가 마력의 흐름으로 말미암아 공격의 궤적을 읽어내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함이었다.

    엠브리오가 진각을 밟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두 마왕의 싸움에 끼어드는 자들이 있었다. 괴성과 함께 엘리고스의 주먹이 벼락처럼 쏟아져 내렸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용호와 엠브리오는 서로를 너무나 의식하였고, 그렇기에 다른 곳을 보지 못했다. 엠브리오가 급히 상체를 뒤틀었지만 엘리고스의 주먹이 엠브리오의 왼팔을 스쳤다. 그것만으로도 왼팔이 뜯겨져 나갔다.

    엘리고스가 미소 지었다. 뜯겨져 나간 엠브리오의 왼팔이 허공을 맴돌았다. 엘리고스의 주먹이 그대로 바닥을 부쉈다.

    그리고 엠브리오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엘리고스의 품에 파고들며 ‘왼손’을 내뻗었다. 마력을 그대로 상대방의 육신 내부에 쏟아 붓는 침투경을 펼쳤다.

    굉음과 함께 엘리고스의 커다란 육신이 위로 약간 솟구쳐 올랐다. 이내 피를 왈칵 쏟으며 쓰러졌다. 엠브리오는 상체를 흔들었다. 엘리고스의 공격을 맞이했을 때와 같았다. 쏜살같이 파고든 오필리아의 날카롭고 낮은 돌려차기가 엠브리오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칼날 같은 발차기가 마치 짐승의 이빨처럼 작용해 엠브리오의 왼쪽 다리를 끊었다.

    하지만 엠브리오는 한 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왼발로 땅을 강하게 딛으며 팔을 쭉 뻗었다. 당혹으로 인해 순간 움직임이 멎은 오필리아의 복부에 침투경을 꽂아넣었다.

    쾅!

    용호가 진각을 밟았다. 마치 랜스 차징을 하듯 아몬을 똑바로 세우고 돌진했다.

    오필리아가 피와 내장 조각을 토하며 쓰러졌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엠브리오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용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늑대의 마왕.

    그것은 그저 별명에 불과했다. 엠브리오가 가진 진정한 마왕으로서의 이름이 아니었다.

    엠브리오의 권능은 재생. 그것도 불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초고속재생 능력.

    권능 발현 이후 엠브리오가 몸을 뒤튼 것은 회피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의 공격의 여파로 몸이 흔들리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공격을 당한 직후에 바로 역공을 취하고자 미리 상대의 몸에 파고드는 동작을 취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같았다. 그렇기에 엠브리오는 용호의 공격에 똑바로 달려들었다.

    용호는 그런 엠브리오가 아닌 허공을 찔렀다. 거센 녹염의 파도를 일으켜 엠브리오를 뒤덮었다.

    오필리아의 의념이 전해졌다. 때문에 용호는 자신이 본 것을 확신했다. 엠브리오의 재생 능력은 눈속임 같은 것이 아닌 진짜였다.

    츠파하-!

    녹염의 파도를 엠브리오가 뛰어넘었다. 초고온의 열기에 온몸이 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불꽃을 꿰뚫고 지났을 때는 이미 상처가 재생된 상황이었다. 몸에 두른 강력한 마장 덕분에 애당초 치명적인 부상도 입지 않았다.

    엠브리오가 오른손에 쥔 거창이 허공을 찢었다. 카이완과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모든 움직임이 오로지 공격에만 최적화되어 있었다. 방어 자체를 도외시한 극단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만큼 더 빠르고 강력했다. 가까스로 지면을 박차 몸을 뒤로 빼낸 용호는 아몬을 짧게 쥐었다. 바로 자신을 추적하고자 재차 진각을 밟는 엠브리오를 향해 아몬을 내뻗었다.

    이번에도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엠브리오는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허락했다. 아몬이 엠브리오의 배를 꿰뚫었다. 엠브리오는 고통에 찬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용호는 급히 손에서 아몬을 놓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거창을 버린 엠브리오의 오른 손바닥이 용호에게 닿았다.

    침투경.

    엠브리오의 강대한 마력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어나갔다.

    < 제 42장 #4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