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25화 (125/227)
  • < 제 42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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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브리오의 군대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재앙을 목도하였다. 눈앞에서 붉은 괴물의 주먹에 동료의 머리가 박살나는 것을 목격한 자도,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고함을 지르던 자도, 앞뒤 가리지 않고 도망치려던 자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름다웠다.

    마계의 붉은 하늘 아래 작렬하는 녹염은 호화롭고 현란하며 신비로웠다.

    하지만 감탄할 수 없었다.

    불꽃이 살아있었다. 지상을 강타한 녹염의 태양이 수십, 수백 가닥의 불길로 변하였다. 하늘과 땅을 뒤덮어 온 세상을 녹색으로 물들였다.

    꽃잎처럼 흩날린 불꽃이 치명적인 죽음이 되어 엠브리오의 군대를 덮쳤다. 지상에 지옥도를 펼쳤다.

    불꽃에 휩싸인 자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토했다. 녹염의 태양이 지상을 강타한 순간 그 열기와 충격에 근 백에 가까운 인원들이 즉사했다. 나머지 살아남은 이들도 충격의 근원지를 중심으로 한 불꽃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용호는 하늘에서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기동하지 않았던 엠브리오의 본대와 우익 병력 모두를 휩쓸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이미 충분한 성과였다. 거의 이백 가까운 병력들을 전투 불능에 빠트렸고, 전장 전체에 극한 혼란을 야기했다.

    하지만 부족함을 느꼈다. 방금 공격은 그야말로 회심의 일격이었다. 이 공격을 위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만 했다.

    근 삼십 분 가량 마력을 집중시켰다. 비정상적으로 집중된 마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카이완이 마찬가지로 삼십여 분 동안 연속해서 왜곡의 권능을 사용했다. 대기 중에 존재하는 마력의 흐름을 교묘하게 비틀어 용호의 마력을 감춘 것이었다.

    여기에 티그리우스의 환영 마법이 더해졌다. 덕분에 용호는 새매의 마왕 로터스의 눈에도 들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미된 것은 스컬과 티그리우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가 함께한 요란한 돌격.

    엠브리오와 군단의 시선이 모두 돌격에 쏠려 있을 때 용호는 살라미의 등에 탄 채로 날아올랐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엠브리오의 이목을 속여야 했기에 살라미에 동승한 카이완이 죽어라 왜곡의 권능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가한 회심의 일격.

    용호는 아쉬움을 버렸다. 거친 숨을 몰아쉰 뒤 투기장에서 얻은 마력 포션을 마셨다. 카이완도 마찬가지였다. 근 삼십 여분 가량 동안 왜곡의 권능을 사용하느라 녹초가 된 그녀는 지상을 내려다보는 대신 마력 회복에 힘썼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적은 여전히 많았고, 엠브리오는 건재했다.

    “우오오오오오!”

    지상을 뒤덮은 불꽃 속에서 엘리고스가 포효했다. 문자 그대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탐욕의 불꽃은 용호의 소유물인 엘리고스를 결코 해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꽃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더 이상 남두무영권이라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남두파괴권이라 부르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엘리고스는 남두무영권의 정수마저 놓치지 않았다. 야수화로 인해 일깨워진 야성에 충실하면서도 그간 몸에 익혀온 기술들을 자유로이 구사했다.

    권의 폭풍.

    녹염 속에서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졌다.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사방천지에서 울펴퍼졌다.

    오필리아는 소리 없이 달렸다. 엘리고스가 폭풍이라면 그녀는 지상에 펼쳐진 번개였다. 빠르고 강렬했다. 더욱이 원과 근을 가리지 않았다. 허공을 차 일으킨 충격파로 대기를 갈랐고, 내려친 일격으로 지면을 부쉈다.

    두 레드 데몬의 역할은 엠브리오의 본대를 박살내는 것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용호의 녹염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들이 일천 여 병력 사이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스컬 부대는 우익을 관통했다. 상대적으로 녹염의 피해를 덜 본 우익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랜스 차징에 대한 내성이 강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스컬 부대를 등에 태운 칠흑의 거마들은 기병 특유의 충격력과 돌진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익의 경보병들을 단숨에 짓밟고 지났다.

    랜스 차징으로 보병 분대를 관통하는 것은 정석이었다. 발을 멈추는 순간 기병은 더 이상 기병이 아니게 되었다.

    때문에 스컬 부대는 우익을 꿰뚫었다. 비스듬히 사선 방향으로 달려 안정적으로 빠져나갔다.

    단 한 기를 제외한 모두가 말이다.

    “스컬컬!”

    스컬은 우익을 꿰뚫지 않았다. 스컬 부대에게 우회 후 재돌진을 명한 직후 홀로 말머리를 돌렸다. 녹염의 태양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직 앞만 보며 돌진해온 자에게 마주 말을 달렸다.

    부케팔로스가 뜨겁고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스컬 또한 호쾌하게 포효하며 번개가 어린 클레이모어를 움켜쥐었다.

    데스 나이트.

    언데드 몬스터의 여러 정점 가운데 하나!

    데스나이트의 손에는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츠바이 핸더가 들려 있었다. 칠흑의 갑주를 걸친 놈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사기邪氣를 방출했다.

    압도적이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그 사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데스나이트의 진로 근방에 있던 엠브리오의 군대가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일반적인 언데드 몬스터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애당초 격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스컬은 물러서지 않았다. 부케팔로스와 함께 데스나이트를 노려보았다. 보랏빛 안광을 더욱 크게 불태웠다.

    데스나이트의 사기.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해도 좋을 격차.

    상관없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스컬의 손에서부터 클레이모어가 울부짖었다!

    “스컬컬!”

    브리가다가 빛을 발했다. 탐욕의 마력뿐만 아니라 다른 힘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죽음.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학살의 악마 바포메트의 힘.

    번개에 죽음이 더해졌다. 데스나이트의 사기조차 찢어발길 막강한 힘이 스컬의 클레이모어에 깃들었다.

    데스나이트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놈은 스컬이 방출한 힘에 오히려 미소지었다. 생전에 위대한 전사였던 그는 광소하며 츠바이 핸더를 휘둘렀다.

    압축된 순간.

    정지했다고 해도 좋을 그 찰나.

    죽음에서 돌아온 두 전사가 서로를 보았다.

    격렬히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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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브리오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녹염의 태양이 지상을 강타한 그 때 다섯 개의 뿔을 모두 개방했다. 어설프게 힘을 숨길 때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방출된 거대한 마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방벽이 되었다. 수십 가닥으로 갈라져 쏟아지는 녹염의 파도를 가볍게 막아냈다.

    엠브리오는 본질을 보았다. 사방에서 죽음이 일어서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녹염의 태양을 분석했다.

    강했다.

    설사 저것이 전력이었다 할지라도 그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엠브리오는 지금까지 마몬 가의 가주에 대해 예상했던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터무니없이 대범한 행동을 하며 전장을 느꼈다.

    미쳐 날뛰고 있는 레드 데몬이 둘.

    역시 강했다. 하나하나가 서부 가주 연합 가운데서도 최강이었던 플라우로스에 비할 수 있었다.

    마몬 가의 것으로 보이는 언데드 몬스터가 데스나이트에 맞서고 있었다. 제법 팽팽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강함이었다.

    플라우로스 급의 강자가 벌써 셋. 여기에 그보다 훨씬 강할 마몬 가의 가주가 하나.

    하지만 과연 이것으로 전부인 것일까?

    엠브리오는 눈을 떴다. 다시 한 번 강력한 마력을 발산해 주변의 녹염을 잠재웠다. 하늘에서부터 춤추듯 내려오는 두 여인을 보았다.

    카이완은 화려했다. 그녀는 수십 미터 길이로 늘어난 사복검으로 세상에 상처를 냈다. 잿빛 머리칼 아래 피어난 검붉은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카타리나는 날카로웠다. 그녀 자체가 검은 마력의 칼날이라고 해도 좋았다. 대기를 가르며 지상에 착지했고, 그 직후 검은 마력의 칼날을 사방에 흩뿌려 걸리는 모든 것을 베어냈다. 자신의 왕이 설 곳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 그런 두 여인 사이로 착지하는 자. 다섯 개의 뿔을 숨김없이 드러낸 채 홍련의 창을 움켜쥔 자.

    아직은 거리가 멀었다. 사이에는 백이 넘는 병력들이 자리했다.

    하지만 엠브리오는 용호의 눈을 보았다. 용호 역시 엠브리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엠브리오는 깨달았다. 마몬 가의 가주가 얼마나 강한지, 그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지금의 전력을 만들었는지 같은 게 아니었다.

    엠브리오가 깨달은 것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의 싸움이 남부 공백지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아직 동부가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밟고 지나갈 계단에 불과했다.

    마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저 탐욕의 왕이 태어난 땅. 그 땅에서 다시 일어설 자는 누구인가. 위대한 왕의 계보를 이을 자는 누구인가!

    엠브리오가 명령했다. 그리고 그 명령은 하늘에 닿았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다. 이 싸움에 전력을 다한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이다.

    이번에는 용호가 고개를 들었다. 엠브리오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이끌려 하늘을 보았다.

    카타리나가 신음했다. 카이완이 입을 크게 벌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용호가 녹염의 태양을 만들어내던 그 순간에도 더 높은 곳에서 지상을 주시하고 있던 존재.

    거대한 날개가 하늘을 뒤덮었다.

    죽음이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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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광이 오로스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엠브리오의 군대는 자유도시 병력의 근 두 배에 달했다. 더욱이 절망스럽게도 양뿐만 아니라 질에서도 밀렸다.

    엠브리오의 군대는 남부 공백지 내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경험해본 부대였다. 싸움에 이골이 난 것은 자유도시의 부랑아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싸움의 성격이 달랐다.

    꽉 짜인 밀집 대형이 자유도시의 자유분방한 대형을 압박했다. 이런 종류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자유도시의 부랑아들은 결국 적을 죽이기 위한 싸움 대신 살아남기 위한 발악을 택해야 했다.

    그래서 오로스는 최전방에 나섰다. 뒷짐 지고 지휘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오로스 자신이 맡은 임무는 적을 붙들어 두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냉정한 지휘자가 아니라 최전방에서 적의 골통을 부술 미치광이 트롤이었다.

    몽둥이로 오크의 골통을 부쉈다. 겁도 없이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발로 짓밟아 죽인 뒤 마약을 삼켰다. 트롤 특유의 재생력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몸의 온갖 기능들을 강화하였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마구 죽어나갔다. 오로스는 희번득 거리는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약 기운 때문에 차오른 숨을 거칠게 토하며 고함을 질렀다.

    바로 그 때 녹염의 태양이 지상을 강타했다. 그 강렬한 충격은 일순간이지만 모든 싸움을 멎게 하였다.

    란돌트 가의 던전을 두들기던 오크 워리어 키자무의 중갑 보병들은 멍한 얼굴로 본대 쪽을 바라보았다. 한창 자유도시의 병력들을 학살하던 새매의 마왕 로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스는 웃었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의심했지만, 이제는 진정으로 믿을 수 있었다.

    이길 수 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믿었을 때.

    하늘이 열렸다. 녹염의 태양보다 더 강렬한 존재감이 모두의 시선을 하늘로 이끌었다.

    난생 처음 보는 것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오로스는 뒷걸음질 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수백 미터가 넘는 거리가 있었지만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오로스 자신을 노려보며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안 돼.”

    누군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본 드래곤이 자유도시의 병력들 위로 강하했다.

    죽음에 농락당했음에도 불구하고도 잊지 않은 저 위대한 일자왕一者王의 권능을-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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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42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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