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0장 #2 >
&
던전 상회 가상공간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각 가주들은 던전 상회에서 제공한 클라이언트를 통해 네트워크에 접속, 공간을 초월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었다.
용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상공간에서 보고 듣고 만진 모든 것들은 오감이 아닌 의식을 통해 직접 전달되기에 기실 육신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지만, 용호를 비롯한 모든 가주들은 현실과 동일한 육신을 가상공간 내에서 보유했다. 가상공간이라는 거대한 정신마법의 덩어리 내에서 자의식을 지키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위화감을 줄이기 위한 장치였다.
이제는 익숙했다. 이번이 몇 번째 접속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용호는 익숙함 대신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눈을 떴을 때 시야에 가득 찬 것은 온통 새하얀 공간이 아니었다.
새카만 어둠 사이로 빛이 있었다. 망망대해에 자리한 군도처럼 점점이 이어진 빛 무더기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작금의 상황 자체는 제법 익숙했다. 마력을 통해 카이완이나 마몬, 스카자하의 기억을 엿보았을 때 보았던 광경과 흡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이런 것들이 보이는 것일까. 가상공간에 접속하는 와중에 뭔가 사고가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용호 자신에게 내재한 마몬이나 12 사역마의 마력으로부터 기억이 재생된 것일까?
용호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빛 무더기 가운데 하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용호는 빛 사이에 선 자들에게 집중했다.
구시온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그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부짖었다.
스카자하가 그런 구시온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상황을 짐작할 수 없었다. 생명의 정원에서 보았던 스카자하의 기억처럼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둠 속에 구시온과 스카자하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스카자하도 울고 있었다. 언제나 생긋생긋 기분 좋게 웃고 있던 그녀가 아이처럼 엉망진창인 얼굴로 우는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울부짖는 구시온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구시온과 스카자하가 멀어졌다. 새로운 빛 무더기가 용호에게 다가왔다.
시트리였다.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그녀가 아니었다. 서럽게 울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의 품에는 엘룬이 피투성이인 상태로 안겨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금의 기억이 대체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엘룬이 힘겹게 입술을 벌렸다. 시트리가 황망히 고개를 숙였고, 엘룬은 천천히나마 입술을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용호는 직감했다. 엘룬의 마지막이었다.
시트리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엘룬은 그런 시트리에게 작은 미소를 그려주었다. 피투성이인 손으로나마 시트리의 뺨을 어루만져주려 했지만 무리였다. 팔은 이내 다시 축 늘어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지독한 침묵이었다. 시트리는 떨리는 손으로 엘룬의 뺨을 어루만졌다. 차갑게 식기 시작한 그녀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그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소리 없이 흐느끼던 시트리는 엘룬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하늘을 우러렀다.
그녀의 시선이 가 닿은 곳.
용호는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붉고 붉은 마계의 하늘 대신 새로운 빛 무더기를 마주했다.
그곳에 펼쳐져 있는 것.
익숙한 등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기억이 끊어졌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제 불찰이네요.”
목소리가 들렸다.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른 그 순간 마치 책장을 넘기듯 어둠이 순백으로 물들었다. 던전 상회 가상공간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용호는 돌아섰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에는 시트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처연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방금 보았던 광경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시트리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트리는 울지 않았다. 처연한 미소조차 지우고 힘차게 웃었다. 눈짓으로 용호의 왼팔을 가리켰다.
“그렇군요. 신기의 제작에 돌입하셨군요. 예상보다 빠르긴 하지만 예상했어야 했는데… 정말로 제 불찰이에요.”
용호와 시트리의 등 뒤로 하얀 의자가 솟아올랐다. 시트리는 자리를 권했다.
“짐작하시겠지만, 방금 보신 것들은 제 기억이에요. 사랑하는 고객님의 마장에 깃들어 있는 12 사역마들의 마력과 그 사람… 탐욕의 왕의 마력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가 만들어놓은 추억의 저장고를 자극한 것이고요. 일종의 동조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용호는 입술을 벌렸지만 무어라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것들이라면 많았다. 방금 본 기억들은 대체 무엇인지, 어째서 엘룬이 시트리의 품안에서 죽었는지, 대체 마몬이 죽은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하지만 묻지 못했다. 정확히는 묻지 않았다.
시트리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모든 질문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트리는 손바닥을 위로 해서 양손을 가볍게 들었다.
“이 공간은 제 전용 공간이니까요. 일반적인 가상공간 접속이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아니면 제가 진즉에 뭔가 대비책을 세워두거나 했다면요. 그러니까 제 불찰이에요. 고객님의 잘못은 조금도 없답니다. 제 기억을 엿보셨다고 화를 낼 생각도 없고요.”
말을 마친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약간은 장난치듯 말했다.
“이제는 마몬 가 전담 아니라고 잡아 뗄 수도 없게 생겼네요.”
마지막에는 혀를 살짝 내밀며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에도 보기 힘든 애교였다.
시트리는 아름다웠다. 처음 보여준 애교는 가슴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용호는 흐느끼던 시트리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애교 속에 감춰둔 감정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자, 그럼 공적인 업무로 돌아갈까요?”
시트리의 의자가 용호에게 다가왔다. 작은 테이블 하나가 들어가면 딱 좋을 것 같은 거리였다.
용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억지로 머릿속을 비운 뒤 다시 시트리를 마주했다.
“구입하고 싶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용호는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시트리의 눈앞에 빛의 문자로 구성된 서류가 만들어졌다.
란돌트 가를 요새화 하는데 필요한 마지막 재료들.
시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놀려 용호에게 금액을 제시했다. 티그리우스가 보고서에 계산해둔 금액과 거의 일치했다.
허공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거래는 모두 끝났다. 란돌트 가 요새화에 남은 예산을 모두 끌어다 썼기에 오로스가 보내줄 아비게일 가의 자산이 없으면 추가로 뭔가를 구매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용호는 일어서지 못했다. 어느새 무릎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시트리가 가만히 용호의 손을 붙잡았다.
“다급하시군요. 사랑하는 고객님.”
용호는 숨기지 않았다. 놀랄 만치 부드러운 시트리의 손길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기억을 엿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엠브리오가 서부 가주 연합을 격파했습니다. 아마도 남부로 진군해 오겠죠.”
지금까지의 적들과는 달랐다.
포라스나 융케라스는 물론이고 아가레스나 티그리우스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시트리는 용호의 눈을 보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요?”
용호는 당황했다. 시트리는 그런 용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얼굴을 가까이 하며 물었다.
“무엇이, 두려우신 거죠?”
마몬의 12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바포메트에게도 과감하게 도전한 용호였다.
그런데 유독 엠브리오를 두려워한다? 그가 북부와 서부를 모두 점령한 강력한 마왕이기에?
용호가 평소보다 더 다급함을 느끼는 이유.
그건 엠브리오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아무 것도 없는 마몬 가로 포라스에 맞서야 할 때조차 도망이란 선택지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던 용호였다.
용호가 불안해하는 것.
투기장의 플로어 마스터들이나 12 사역마들과의 싸움과 이번 엠브리오와의 싸움의 차이점. 아가레스와의 싸움을 경험한 용호가 느낀 불안.
용호 스스로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그것을 시트리는 간파했다. 그렇기에 꽉 쥐고 있던 용호의 손을 놓아주었다.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정말이지, 지금 위로 받고 싶은 건 나인데. 그래도 사랑하는 고객님이니까 특별히 서비스 하도록 하죠.”
시트리는 손을 거두었다. 용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사랑하는 고객님. 고객님에게 ‘마몬 가’는 무엇인가요?”
유구한 역사나 전통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위대한 탐욕의 왕의 후예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도 아니었다.
용호에게 있어 마몬 가는 무엇인가.
용호는 눈을 깜박였다. 오래지 않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어째서 엠브리오와의 싸움을 바포메트와의 싸움보다 두려워하고 꺼려하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미 억지로 끌려온 장소 따위가 아니었다.
소중한 집이었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뿐만 아니라, 참으로 많은 사역마들과 함께 하는 곳이었다.
엠브리오는 바포메트나 플로어 마스터들과 달랐다. 용호 자신뿐만 아니라 마몬 가의 모두를 파괴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자고로 탐욕의 왕은 욕심쟁이인 법이니까. 전부 다 끌어안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예요. 마몬도, 그 사람도 엄청난 욕심쟁이였으니까.”
시트리가 활짝 웃었다. 그녀는 엘룬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용호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서비스는 여기까지. 다음에 다시 만나 뵐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시트리가 물러섰다. 장난스런 손짓과 함께 순백이 용호의 정신을 뒤덮었다.
&
용호는 눈을 떴다. 청소 중이던 유리아와 바둑이도 돌아갔는지 마왕의 방은 고요했다.
용호는 일단 숨을 크게 골랐다. 손가락을 놀려 루시아가 제출했던 보고서들을 다시 허공에 펼쳐놓았다.
그중에 하나.
보았지만 일부러 미뤄두었던 것.
공간의 문이 완성되었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엠브리오와의 싸움을 코앞에 둔 이 때에.
용호는 씩 웃었다. 손을 놀려 보고서를 제거했다.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도 보고 싶었고,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치킨이나 콜라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공간의 문 공사를 재개했을 때 이미 결심했던 일이었다.
다녀오는 것은 마몬 가를, 용호 자신의 집을 지켜낸 뒤.
엠브리오와의 싸움 이후.
“루시아.”
[네, 주인님.]
“스카자하에게 예속 사역마들의 회복을 조금만 더 서둘러 달라고 전해 줘. 오늘 내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마음을 정했다.
그러니 이제는 멈춰서고 돌아서는 대신 똑바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용호는 옥좌에서 일어섰다. 손수 스컬에게 줄 장비를 챙기기 위해 버그림의 작업실로 향했다.
&
구시온은 시트리의 기억 속 모습과는 달랐다.
용호를 마주한 그는 호탕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스카자하의 말이 맞았어. 정말이지 작은 나리 같은 가주는 처음이군.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투기장을 지켰지만… 이런 적은 정말 처음이야.”
저만치 관중석에 자리한 마몬 가의 전대 가주들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구시온의 옆에 선 카이완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다. 기가 찬다는 듯 어설프게 웃다가 용호에게 턱짓하며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충분해.”
즉답한 용호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용호의 등 뒤에는 카타리나뿐만 아니라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 전원이 서 있었다.
이제까지 투기장을 찾았던 가주들 가운데서 예속 사역마 모두를 데리고 온 자는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가주가 아닌 자가 투기장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했기에, 마몬의 유산을 손에 넣은 예속 사역마가 혹시라도 가주 자신보다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설사 예속 사역마라 해도 투기장이라는 기회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비밀을 아는 자가 늘어나는 것을 우려해서 등등.
개중 용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투기장의 위험성.
하지만 브리가다로 서로의 힘을 공유한다면, 예속 사역마들이 용호 자신의 통제에 따라 도전할 층을 자제할 수 있다면 그 위험성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었다.
‘나갈 때는, 모두가 승급한 이후다.’
지키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북부는 물론이고 동부까지도 감히 마몬 가를 넘보지 못하게 하리라.
엠브리오와의 싸움이 초읽기에 들어간 지금.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호와 예속 사역마들은 반드시 해낼 생각이었다.
예속 사역마들이 하나씩 앞으로 나섰다.
각자의 도전을 시작했다.
제 40장 - 완공 끝, 제 41장 - 마몬 가의 검으로 이어집니다.
< 제 40장 #2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