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0장 - 완공 >
제 40장 - 완공
천천히 눈을 떴다. 기분 좋은 깊은 잠에서 깰 때처럼,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의식을 회복했다.
일단 차가웠다. 익숙한 부드러움이 전신을 통해 느껴졌다.
‘스카자하.’
정확히는 스카자하가 다루는 푸른 액체.
꽤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눈꼽 때문에 눈이 아팠지만 역시나 팔 다리를 제대로 가눌 수는 없었다. 푸른 액체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포기하고 정면을 보았다. 기분 좋은 미소가 반겨주었다.
“닦아줄게.”
얼음 옥좌 위에 앉아있던 스카자하가 가볍게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푸른 액체 가운데 일부가 촉수처럼 솟아올라 용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서비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푸른 액체의 촉수 가운데 하나가 용호의 입 근처에서 멈추더니 맑고 차가운 물을 뿜어냈다.
어째 마시기 찝찝했지만 살짝 달고 시원했다. 스카자하가 턱을 괴며 말했다.
“근처에 있는 맑은 물을 끌어다가 주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푸른 액체라든가, 우리 도련님의 배설물을 정화했다거나 한 거 아니니까.”
“어… 진짜지?”
용호의 물음에 스카자하는 까르르 웃었다. 어쩐지 모르게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라 불안했다.
용호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카자하의 옥좌를 중심으로 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한 예속 사역마들이 보였다.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푸른 액체에 뒤덮여 있었다.
“다들 회복 중이야. 그 유쾌한 스켈레톤만 빼고.”
스카자하의 말에 용호가 다시 허우적거렸다. 스카자하는 가볍게 손을 놀려 용호가 들어가 있는 푸른 액체를 아예 반바퀴 회전시켰다. 스카자하의 작은 궁 입구에는 갑옷을 벗어 맨몸뚱이가 된 스컬이 아무렇게나 나자빠져 있었다.
“몇 번 다른 자세를 취하게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저게 제일 편한 모양이야. 땅바닥을 뒹구는 거.”
스컬다운 이야기였다. 용호가 스카자하에게 물었다.
“스컬은 회복이 불가능 한 거야? 혹시 부상이 그 정도로 심하다든가?”
“아니, 부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아. 다만 분야가 다르다고 할까? 이 궁에서 이뤄지는 치료는 내 생명력을 나눠주는 것으로 이뤄지거든. 그런데 스컬은 언데드니까. 내가 생명력을 나눠주면 오히려 몸이 부서지고 파괴될 거야.”
대충 이해가 갔다. 게임에서 언데드 계열에게 힐 마법을 걸면 체력이 회복되기는커녕 데미지를 입는 것과 비슷한 이치 같았다.
용호는 다소 초조한 눈으로 스컬을 보았다. 진화나 승급 외에는 스컬을 치료할 방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스카자하가 다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좀 특별한 스켈레톤인지 자연적으로 복구가 되던데? 마력만 충분히 제공하면 금방 일어설 거야. 실제로도 꽤 회복이 되었고.”
“뭐?”
스컬에게 자연 복구 기능 같은 것이 있었단 말인가?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스카자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몰랐어? 설마 부상을 입은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라든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합체 진화나 승급을 할 때 새로 생긴 능력인 걸까?
스컬은 현재 일반적인 언데드 몬스터의 계보를 벗어나 있었다. 어쩌면 매직 나이트가 되면서 생긴 능력일지도 몰랐다. 매직 나이트가 된 이후에는 그다지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없었으니 용호 자신이 자연 복구 기능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타당했다.
‘하지만.’
왜일까.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여전히 평소처럼 바닥을 뒹구는 스컬이었지만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정확히는 바포메트와 싸우기 이전과 말이다.
“스컬?”
“스컬스컬.”
용호가 부르자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일어서지는 않았다. 스카자하가 첨언했다.
“아직 일어서는 건 무리일 거야. 온 몸의 관절이 다 망가졌더라고. 상체는 어제 회복되었으니… 지금 회복 속도면 내일 정도면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희망적인 이야기였지만 용호는 안도할 수 없었다. ‘어제’ 다 회복되었다는 것은 최소 하루 이상 용호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며칠이나 지났지?”
“삼일. 정확히는 62시간 정도?”
“그, 그렇게나 오래 지났다고?”
“바포메트와 싸웠으니까. 육체보다는 정신적으로 소모가 커. 더욱이… 엄청나게 뽑아 썼잖아? 감당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무리한 힘을. 덕분에 나도 보다시피 완전 지쳤어.”
스카자하가 푸근하게 웃으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러고보니 평소보다 안색이 창백했다. 옥좌에서 일어서지 않는 것도 어쩌면 기운이 없어 그런 것일지 몰랐다.
용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바포메트의 죽음을 상쇄시킨 스카자하의 생명은 신기에 저장된 힘 정도가 아니었다. 스카자하 본인에게서 힘을 끌어낸 것이었다. 마치 브리가다를 통해 예속 사역마의 힘을 취하는 것처럼 말이다.
연이어 이해가 갔다. 어떻게 바포메트를 쓰러트릴 수 있었는지, 왜 스카자하와 구시온이 바포메트에게 도전해 보라고 했는지.
용호 자신의 고전 여부는 둘째 치고, 바포메트의 육신은 분명 약해져 있었다. 구시온이나 스카자하 같은 용호가 지금까지 마주한 12 사역마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포메트는 강했다. 죽음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스카자하의 생명으로 바포메트의 죽음을 상쇄시켰기에 이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설사 용호 자신이 탐욕의 힘으로 죽음을 떨쳐냈다 하더라도 결국엔 패했을 터였다.
“신기로… 날 인정한 12 사역마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건가?”
“그러기 위한 신기니까. 하지만 예속 사역마들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자유롭게는 할 수 없어. 완전한 인정을 받은 게 아니니까. 힘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힘이 필요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싸움에서 우리 도련님은 그걸 해냈고, 내 힘을 그야말로 강탈해 갔어. 덕분에 이렇게 지쳤고 말이야.”
아마도 번뇌 폭발로 증폭시킨 탐욕의 마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용호가 연달아 물었다.
“그럼 바포메트의 힘은?”
“마찬가지야. 바포메트의 힘을 쓸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는 불가능해. 내 힘을 썼을 때처럼 대가도 필요하고. 도련님은 그 녀석을 쓰러트렸지만… 아직 바포메트의 ‘죽음’을 완벽히 통제할 정도의 힘을 갖춘 것은 아니니까.”
거기서 일단 말을 끊은 스카자하는 숨을 크게 골랐다. 턱을 괸 채 용호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언젠가는 모두 도련님의 힘이 될 거니까. 내가 보증할게.”
신기하게도 스카자하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용호는 푸른 액체에 머리를 기댔다. 새삼 몸의 힘을 뺀 뒤 예속 사역마들, 특히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절로 푸근해졌다. 스카자하가 까르르 웃었다.
“어쩜 좋아. 이제는 완전히 티가 다 나네.”
용호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태연하게 스카자하에게 시선을 돌린 뒤 말했다.
“아몬에게 3층은 엘룬의 층이라고 들었어.”
“맞아. 그리고 그 애 성격상 아마 안배를 처절할 정도로 해두었을 게 분명해. 어떤 의미로는 바포메트 때보다 힘들지도 몰라. 그러니까 3층은 좀 더 힘을 기른 다음에 도전하는 걸 추천할게.”
스카자하는 돌연 눈을 꽉 감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용호를 감싸고 있던 푸른 액체가 다시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스카자하로부터 일어난 마법의 힘이 용호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도련님의 회복은 끝났어. 예속 사역마들은 앞으로 한나절 정도는 더 회복을 취해야 하니까 먼저 올라가봐. 루시아가 보고할 일들이 많은 것 같아.”
자그마치 삼일이었다. 용호도 지상의 일이 궁금했다.
“고마워, 스카자하.”
“우리 도련님인걸. 언제든지 의지해도 좋아.”
스카자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작게나마 마주 손을 흔들어준 용호는 서둘러 스카자하의 궁을 나섰다. 그러자 지금까지 겨우겨우 참고 있었다는 듯 바로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집사 준과 란돌트 가의 가주 티그리우스에게서 각각 보고가 있습니다.]
고블린 레인저 가운데 홍일점인 준은 얼마 전부터 엘리고스 밑에서 집사 일을 배우고 있었다. 요 며칠 엘리고스가 부재했으니 아마 집사장 역할을 대행했을 터였다.
생명의 정원 입구에서 뒹굴거리던 살라미가 용호를 알아보고 얼른 다가왔다. 용호는 그런 살라미의 등 위에 올라타며 루시아의 보고를 들었다.
[준의 보고는 사역마들의 현황, 금광 채굴량, 자유도시에서 전달해온 이번 달 치 세금, 아비게일 가의 던전 장악 등에 관한 것입니다.]
거의 랩을 하듯 빠르게 말한 루시아는 빛으로 된 문장과 숫자 몇 개를 용호에게 보여주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간략화 된 보고서였다.
용호는 루시아가 서두르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렇기에 빠르게 눈으로 한 번 훑어본 뒤 바로 다음 보고를 요구했다.
[휘하 마왕 티그리우스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서부 가주 연합과 엠브리오의 싸움이 끝났습니다.]
[엠브리오가 승리했습니다. 엠브리오는 현재 병력을 추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티그리우스가 이 정보를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시간 전입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더욱이 저 보고는 ‘실시간’이라 하기 힘들었다. 아마 싸움 자체는 12시간 전보다 훨씬 더 전에 끝이 났을 터였다.
이틀 어쩌면 삼일.
서부 가주 연합을 박살낸 엠브리오는 어찌할 것인가. 그 말머리를 바로 남부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잠시 병력을 쉬게 할 것인가.
[휘하 마왕 티그리우스가 란돌트 가 요새화의 마무리를 위한 자재를 요청했습니다.]
[시급을 다투는 상황인 만큼 서둘러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언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살라미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생명의 정원 중앙 홀에 도착한 뒤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올랐다.
“루시아, 서부 가주 연합과 엠브리오의 마지막 결전 장소에서 란돌트 가 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지?”
[서부 깊은 곳에서 싸웠기 때문에 평균적인 행군 속도로 계산하면 적어도 오일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병력을 출발시켰어도 시간 여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엠브리오가 바로 병력을 출발시켰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해도 좋았다.
티그리우스는 과연 철저한 성격이었다. 루시아는 ‘엠브리오가 승리했다’라는 함축적인 소식뿐만 아니라 티그리우스가 따로 조사해서 보낸 보고서의 문장들을 용호에게 보여주었다.
대강의 전투 경과. 양측이 동원한 병력. 다른 곳에 위치한 엠브리오 군의 움직임.
엠브리오는 바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전투 후의 정리 작업이 필요했다. 단 하루라도 병력을 쉬게 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엠브리오가 최대한 빠르게 남부로 말머리를 돌린다 하더라도 며칠 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살라미가 마몬 가 복도를 달렸다. 며칠 만에 나타난 가주를 맞이한 사역마들이 저마다 예를 표했지만 일일이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용호는 마왕의 방문을 박차며 명령했다.
“버그림에게 스컬에게 줄 무기를 준비시키라고 해. 티그리우스에게는 지금 바로 구매해서 그쪽으로 배달시키겠다고 전하고. 오로스에게는… 병력을 준비시켜두라고 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오필리아와 미리 정해두었던 병력이라면 알아들을 거야.”
[던전 상회의 일을 마치신 뒤에는 바로 란돌트 가로 향하실 건가요?]
용호가 살라미의 등에서 내렸다. 바둑이와 함께 마왕의 방을 청소하고 있던 유리아가 꾸벅 인사를 하자 가볍게 손을 들어 답한 뒤 옥좌에 앉았다.
“아니, 하루… 최대 이틀 정도 더 머문 후에 출발한다.”
며칠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용호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루시아였지만 구태여 토를 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버그림과 티그리우스, 오로스에게 주인님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루시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용호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눈을 감았다.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했다.
&
“다급하시군요. 사랑하는 고객님.”
< 제 40장 - 완공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