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19화 (119/227)
  • < 제 39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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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팽하게 당긴 끈을 갑자기 끊은 것과 같았다.

    마장에 새로운 힘이 추가된 순간 용호는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새삼 온몸에 새겨진 고통을 하나하나 다시 느꼈다.

    아팠다. 그것도 무지하게 아팠다.

    뼈 이곳저곳이 부러진 것 같았다. 겨우 일격을 허용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만신창이였다.

    바포메트의 공격은 단순한 내려치기가 아니었다. 손바닥에 짓눌린 그 순간 바포메트의 왼손에서부터 일어난 검은 마력들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멍이 나다 못해 피부가 터졌고, 몸 여기저기에 자상이 나 피가 흘렀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용호는 숨을 몰아쉬며 버텼다. 오른 손에는 아몬 대신 카타리나의 손이 있었다.

    카타리나도 다치기는 매한가지였다. 용호의 뒤에 있었기에 검은 마력에 난도질당하지는 않았지만, 내려찍기에 의한 피해는 오히려 용호 이상으로 입고 말았다.

    용호는 카타리나를 보았다. 카타리나도 용호를 보았다. 둘 모두 브리가다에 마력을 너무 많이 쏟아 부어 손을 벌벌 떨 정도였지만 서로를 보고 웃었다. 약간은 바보 같은 미소들이었다.

    용호가 카타리나를 끌어안았다. 어쩌면 카타리나가 용호를 끌어안은 것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해 섰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죽음이 모든 것을 잠식했을 때 용호는 욕망했다.

    그 욕망은 단순한 육욕이 아니었다. 오직 색욕뿐이었다면 결코 바포메트의 죽음을 떨쳐내지 못했을 터였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아몬이 왜 번뇌라 표현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탐욕이었다.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전부 다 용호 자신의 것이었다.

    카타리나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절로 눈이 감겼다. 이대로 평생 있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숨결을 물론 은은한 체향까지도 모두 달콤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카이완의 얼굴도 떠올랐다. 정확히는 투기장에서 대결하기 직전에 보여주었던 미소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거의 반칙 수준의 미소였다. 싸우기 직전에 그런 미소를 보여주다니. 왠지 약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른 것은 카이완만이 아니었다. 구시온과 스카자하, 아몬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예속 사역마들과 마몬 가의 사역마들 역시 생각났다.

    용호는 어설프게 웃으며 눈을 떴다. 지쳤는지 카타리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용호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가볍게 손을 움직이기만 해도 그대로 스르륵 무너져 쓰러질 것 같았다.

    용호는 그런 카타리나의 허리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저도 모르게 카타리나의 머리에 입술을 맞춘 뒤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치기는 다들 마찬가지였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는 제각각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감동의 포옹 같은 것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기엔 둘 모두 너무 지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강건한 레드 데몬들이었다. 체력만이라면 이제 마몬 가 제일이라 해도 좋을 엘리고스가 천천히나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오필리아는 바포메트에게 당했던 일격이 꽤 컸는지 쉽사리 일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의식을 잃지 않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나마 엘리고스를 불렀다.

    용호는 결국 서있기를 포기했다. 남은 한 손으로도 마저 카타리나를 안으며 제자리에 앉았다. 앉으니 바로 또 눕고 싶었지만 간신히 그런 마음을 억눌렀다. 조금 더 고개를 돌리니 스컬이 보였다.

    스컬도 만신창이였다. 버그림이 개량해 준 전투망치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남은 것은 고작해야 자루뿐이었다.

    갑옷과 투구 역시 부서졌다. 마몬 가에 처음 왔을 때처럼 맨몸뚱이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크게 다친 것은 포라스와의 싸움 이후 처음이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금이 간 한쪽 팔로 상체를 지탱한 스컬은 몸을 떨었다. 턱과 머리를 특히 심하게 떨었다.

    “스컬?”

    바포메트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스컬이었다. 혹여나 너무 많은 힘을 몰아준 탓에 몸에 무리가 간 것은 아닐까?

    걱정 섞인 부름에 스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눈구멍 안에 피어있어야 할 귀화가 너무나 작았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용호는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다. 위화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느낌은 용호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브리가다를 통해 스컬의 감정이 전해졌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잠잠한 수면 아래에서 격류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그렇게 밖에 표현 못할 감정이었다.

    “스컬.”

    다시 한 번 불렀다. 저도 모르게 섞은 간절함에 스컬이 반응했다. 표정 없는 해골이었지만 용호는 스컬이 힘겹게나마 미소를 지으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았다.

    “스컬…컬…….”

    느리고 낮게 말한 스컬은 억지로 버티는 대신 바닥에 쓰러졌다. 용호의 부름이 무언가 도움이 되었는지 불안함은 많이 사라졌다. 오필리아나 카타리나처럼 편히 쉬는 것으로도 보였다.

    용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스컬에게 느껴진 위화감이 무척이나 불안했지만 일단은 가라앉았고, 무언가 큰 이상 징후가 있는 것도 아닌 터라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별 일 아니기를 바랐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카타리나를 고쳐 안았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는 유혹을 어렵사리 이겨낸 뒤 공동 안의 마력을 살펴보았다.

    죽음의 기운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똑같은 검은 마력이었지만 카타리나의 것과는 달랐다.

    카타리나의 검은 마력은 포용하고 보듬는 밤을 닮았다. 반면 바포메트의 검은 마력은 차갑고 두려운 절망과 같았다.

    바포메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 마력이 소용돌이 쳤다. 한 번 회전할 때마다 사방으로 어둠이 흩뿌려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허리 너머에서 오른 손으로 왼팔의 마장을 어루만져 보았다.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생겨난 바포메트의 보석이 머릿속에 명확히 떠올랐다.

    스카자하의 생명과 상반되는 죽음의 힘.

    용호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졸도를 각오하고 오른팔을 길게 뻗었다. 스르륵 미끄러지는 카타리나를 안는 대신 그대로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 한 뒤 허공을 움켜쥐었다.

    홍련의 불꽃에 이어 녹염이 피어올랐다. 용호 자신의 남은 마력 전부는 물론이고 엘리고스와 오필리아, 스컬, 심지어는 이미 기절했다고 해도 좋을 카타리나의 마력까지 긁어모아 모조리 아몬에게 쏟아부었다.

    [나의 어린 주인이여.]

    효과는 있었다. 투기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몬과 대화할 수 있었다.

    용호는 신화 시대의 무기를 연상시키는 아몬의 진신- 불타는 창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포메트는 완전히 죽은 건가?”

    이런저런 대화를 길게 나눌 여력이 없었다. 요점만 추린 물음에 아몬이 응답했다.

    [바포메트는 죽음의 화신. 이계의 인간들이 갖고 있던 ‘죽음’이라는 개념을 세상에 구현해낸 것.]

    [주인이 사라진 이래 천 년의 세월동안 마모되고 마모되었던 육신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개념을 담을 그릇이 사라졌으니, 개념은 흩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소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바포메트의 정수는 미완성된 신기에 남았다. 그 안에는 바포메트의 힘인 ‘죽음’만이 아니라 약간의 의식 또한 남아있다.]

    [하지만 나의 어린 주인이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결코 너를 해하지 못 할 것이고, 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해할 수 없다.

    바포메트에게 그럴 의지 또한 없다.

    용호는 한숨을 길게 토했다. 아몬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의 어린 주인이여. 잘 해냈다.]

    [탐욕의 힘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허나 단순한 육욕만으로는 탐욕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것은 탐욕의 왕의 힘이라기보다는 색욕의 왕의 힘에 가까울 터이니 말이다.]

    [분명 육욕의 힘이 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기에, 보다 순수한 원초의 욕망 역시 포함되었기에 어린 주인은 바포메트의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

    [소망하고, 갈망하라. 그대의 진정한 바람을 욕망에 투영하라.]

    정말이지. 언제나 민망한 소리를 참 진지하게도 잘했다.

    용호는 굳이 답하는 대신 괜히 카타리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뺨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아몬을 쥐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이제 슬슬 한계였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서 그런지 꽤 진지하게 카타리나의 뺨을 만지고 싶었다.

    그래서 용호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3층. 3층을 지배하는 12 사역마는 누구지?”

    아몬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약간의 틈을 두었다. 사람이었다면 한숨을 쉬거나 쓰게 웃었을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천칭 좌, 밤을 베는 엘룬.]

    [그녀가 탐욕의 미궁 3층의 주인이다.]

    대답을 마친 아몬은 스스로 불길을 거두었다. 다시 팔찌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밤을 베는… 엘룬.’

    탐욕의 왕 마몬의 호위기사. 그의 연인.

    용호는 카타리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운 감촉에 스르륵 눈이 감겼지만 그래도 마지막 힘을 끌어내 소리쳤다. 복도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을 살라미와 부케팔로스, 스컬 부대를 불렀다.

    3층으로의 길이 열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은 1층의 스카자하에게 돌아가 체력과 마력을 회복해야 했다.

    등 뒤에서 살라미가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용호는 비로소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 카타리나의 뺨을 어루만지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

    길었던 전투의 끝이 다가왔다.

    서부 가주 연합의 장인 플라우로스는 허무하게 웃었다. 눈앞에서 그의 강력한 동맹이었던 베른 가의 세자로가 문자 그대로 핏물이 되어 흩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서부 가주 연합은 엠브리오에게 패했다.

    그리고 그 패배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섯 개의 뿔.

    엠브리오의 머리에 우뚝 솟은 그 강맹함의 증거들.

    북부와 서부의 가주들을 먹어치운 결과 새로이 돋아난 뿔들이 아니었다. 비록 자신의 뿔은 네 개 초입에 불과했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마력을 연마한 그는 알 수 있었다.

    엠브리오는 처음부터 다섯 개의 뿔을 가지고 있었다. 북부와 서부의 가주들 대부분은 그와 꽤나 큰 힘의 격차가 있었으니, 아마 정수 흡수를 통해 손에 넣은 힘은 얼마 되지도 않을 터였다.

    북부의 가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당연했다.

    일인군단이나 다름없는 위용을 보인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섯 왕의 휘하 내에서라면 다섯 개의 뿔을 가진 자가 꽤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남부 공백지에서는 아니었다. 단언컨대 엠브리오는 남부 공백지 내에서라면 유일무이한 최강자라 할 수 있었다.

    엠브리오가 세자로의 정수를 흡수했다. 뿔 네 개 초입이었던 터라 엠브리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엠브리오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플라우로스는 허망함만이 어려 있던 미소에 비릿함을 더했다.

    플라우로스가 이 패배를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으로 이해한 것은 엠브리오의 뿔 때문만이 아니었다.

    플라우로스는 엠브리오의 뒤에 누가 서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랬기에 포기했고, 그랬기에 비웃었다.

    “네놈은 왕이 될 수 없다, 엠브리오. 넌 결국 왕의 그림자만을 쫓다가 비참히 쓰러질 것이다.”

    엠브리오를 후원하는 왕이 누구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가 되었든 엠브리오의 야심을 좌시하지는 않을 터였다.

    엠브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플라우로스에게 다가섰다.

    플라우로스는 그렇기에 다시 웃었다. 비참하게 삶을 구걸하는 대신 최후의 비웃음으로 엠브리오의 정신에 상처를 입혔다.

    “너도 알고 있구나, 엠브리오. 네가 결코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플라우로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산채로 심장이 파괴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엠브리오는 플라우로스의 정수를 취했다. 서쪽에서 제일가는 힘을 가진 가주답게 제법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너는 왕이 될 수 없다.’

    저주였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늑대의 무리에게 플라우로스의 시신을 먹어치우라 명하는 것으로 불쾌함을 떨쳐냈다.

    전장의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죽음과 비명과 신음이 사방에서 진동했다.

    엠브리오는 그것들 모두를 등지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향하는 곳은 남쪽.

    위대한 왕이 태어난 땅이었다.

    제 39장 - 번뇌폭발 끝, 제 40장 - 완공으로 이어집니다.

    < 제 39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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