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15화 (115/227)

< 제 38장 - 전초전 >

제 38장 - 전초전

작금 마계를 지배하는 것은 여섯 명의 왕들이었다.

마계 북부에서 군림하는 오만의 왕.

북동부에서 오만의 왕과 대립하는 질시의 왕.

자신의 하렘에서 움직이지 않는 색욕의 왕.

동남부에서 기회를 엿보는 식탐의 왕.

서부에서 침묵하는 폭력의 왕.

현재 활동 중인 여섯 왕들 가운데서 유일한 여성인 격노의 왕.

마계 서부에 위치한 격노의 왕의 영토는 다른 왕들의 영토와 가장 많은 접경지를 가진 땅이기도 하였다.

일단 서남쪽으로는 폭력의 왕의 땅과 접했다. 동쪽으로는 다시 색욕의 왕뿐만 아니라 식탐의 왕과의 땅과도 접했고, 남쪽으로는 주인 없는 땅이라 불리는 남부 공백지와 좁게나마 접경지를 가졌다.

사이에 바다가 있어 직접 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북쪽으로는 오만의 왕의 영토가 자리했으니, 사실상 질시의 왕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왕 모두의 땅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셈이었다.

마계의 존재들이 갖고 있는 격노의 왕에 대한 이미지는 ‘전투광’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격노의 왕은 여섯 왕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다른 왕들 모두와 싸워본 전적이 있는 왕’이었다. - 여기서 다른 왕들이라 함은 '여섯 왕'을 의미했다. 격노의 왕도 은거해 움직이지 않는 나태의 왕이나, 존재하지도 않는 '탐욕의 왕'과는 싸울 수 없었으니 말이다. -

물론 역사 속에 기록된 왕들 간의 대결이 대개 그렇듯이, 정말로 서로의 목숨까지 취할 생각으로 붙은 ‘전면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 가볍게 몇 수를 나누는 정도에서 끝이었다.

왕들 간의 직접 대결은 너무나 큰 위험을 동반했다. 더욱이 왕들 개개인이 서로의 등을 노리는 상황이었다.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인 최강의 괴력 오로보스가 평한 것처럼, 왕들은 서로의 암습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면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격노의 왕이 전투광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왕들 모두와 대결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섯 왕 가운데서 가장 많은 전장에 선 자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그녀는 늘 선봉에 섰고, 굳이 왕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싸움터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격노의 왕의 군대는 ‘돌진밖에 모르는 멍청이들’이라는 비아냥을 삼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낮았다. 그 필두에 늘 격노의 왕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전투광.

적의 피로 목을 축이는 자.

싸움 밖에 모르는 미친년.

그것이 격노의 왕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그리고 세간의 평가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격노의 왕에 대한 평가들은 대부분 진실보다는 거짓에 가까웠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진짜로 싸우냐?! 미쳤어?! 진짜 세계대전이라도 벌이자는 거야?!”

터무니없이 거대한 침대 위에서 반라의 여인이 마치 어린애 마냥 팔 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악을 썼다.

그녀의 이름은 드리타라슈트라.

간다르바들의 수장인 간다르바왕인 동시에, 마계에 존재하는 팔부- 여덟 종족을 이끄는 격노의 왕이었다.

드리타라슈트라라는 발음하다 혀가 꼬일 것 같은 이름 대신 드리타라 혹은 지국천이라는 이름을 애용하는 그녀는 악을 쓰다 지쳤는지 가늘고 하얀 팔 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트렸다.

사람들은 ‘격노의 왕’이라 하면 험상궂기 그지없는 귀신같은 용모를 연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애당초 그녀의 종족인 간다르바는 팔부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검푸른 머리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늘고 긴 팔다리는 시원시원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눈만은 조금 달랐다. 무엇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는, 오색의 빛을 품은 눈동자는 아름답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바라보는 이에게 두려움을 이끌어내는 왕의 눈이었다.

간다르바답게 그녀의 몸에서는 무척이나 달콤한 향취가 났다. 엉덩이에 돋아난 말의 꼬리는 아무리 휘저어도 서로 엉키지 않았고, 모래폭풍 속에서도 윤기를 잃지 않았다.

격노의 왕은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정말로 격노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전투광이라는 세간의 평과 달리 그녀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싸움 자체는 좋아했지만 싸움으로 인한 결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은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법이었다.

수많은 고아와 과부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세상 그것들마저 남기지 않고 세상 모든 것들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격노의 왕이 항상 군대의 선봉에 서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게 가장 사망자를 줄이는 길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은 아군의 전투 기회를 앗아갔다. 그것은 곧 그들이 죽을 기회 역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적의 사망자 역시 최소화할 수 있었다. 같은 왕이 아닌 이상 세상 누가 격노의 왕과 정면대결을 펼치고 싶겠는가. 격노의 왕과 대면한 적들은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것을 택했다. 간혹 덤벼드는 놈들이 있어도 우두머리 정도만 박살내면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을 터였지만 격노의 왕은 평화주의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마계에서 서로 죽어라 싸워 무얼 한단 말인가.

다만 격노의 왕은 평화주의자인 동시에 현실주의자였고, 그렇기에 마계에서 평화주의란 곧 헛된 망상이란 사실 역시 잘 알았다. 때문에 격노의 왕은 마음으로 바랄지언정 수하들에게 평화주의를 설파하지는 않았다.

“진짜 짜증나! 짜증난다고!”

격노의 왕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정말로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더 환장하게 만들었다.

진짜로 분노하면 ‘격노’가 깨어난다. 일곱 개의 대죄 가운데 하나인 그 힘이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격노의 왕은 전쟁만큼이나 ‘격노가 깨어난 상태의 자신’을 싫어했다.

그래서 격노의 왕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일전 폭력의 왕에게서 배운 숫자세기와 이계의 경전 외우기가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오늘 또 도움을 받았네요.’

격노의 힘이 발동했을 때의 자신을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폭력의 왕에게 짧게 감사한 격노의 왕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제법 차가워진 머리로 생각했다.

처음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이 서로의 휘하 던전들을 건드리기 시작할 때만 해도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 정도 드잡이질이야 연례 행사라 해도 좋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일이 진행되면 정말로, 실로 수백 년 만에 왕들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이 한적한 곳에서 서로 만나 죽자고 싸우다 둘 다 죽어버리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둘의 대립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상자를 낳을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싸움은 그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다.

다른 왕들이 움직일 터였다.

색욕의 왕에 대한 세간의 평은 색에 미친 자였다. 자신의 하렘에 틀어박혀서 주색잡기만 탐하는 한량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격노의 왕 자신의 평처럼 거짓에 가까웠다. 색욕의 왕을 실제로 마주한 적이 있는 격노의 왕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색욕의 왕은 무서운 자였다.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이 싸운다면, 그리하여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그는 자신의 하렘을 박차고 일어설 것이 분명했다.

식탐의 왕도 있었다. 그 무식하게 커다란 돼지는 언제나 대놓고 욕심을 드러냈다.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이 전면전을 벌일까봐 노심초사하는 자신과는 달리 둘이 대체 언제 싸우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더 웃긴 것은 이게 최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만의 왕과 질시의 왕 중 하나가 생각보다 쉽게 승리한다면, 그리하여 한 명의 왕에게 두 개의 죄악과 신기가 모이게 된다면.

거대한 전란의 불꽃이 마계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백성들인 간다르바는 물론이고 팔부 전체가, 나아가 마계의 모두가 세계대전이란 재앙 앞에 신음할 터였다.

‘오만의 왕 이 개새끼야! 적당히 하고 알아 처먹으란 말이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은 질시의 왕에게 가할 수 있는 압박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랬기에 격노의 왕은 오만의 왕에게 칼을 돌렸다. 해군을 북부에 집결시켜 오만의 왕의 배후를 압박했다.

이대로 네가 질시의 왕과 싸우면 내가 뒤를 칠거다. 그러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지어라.

하지만 과연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격노의 왕은 결국 다시 한숨을 토했다.

“남부도 시끄럽던데…….”

남부 공백지. 버려진 땅.

그곳에서도 전란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그곳에서의 싸움이 마계 전체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한 없이 0에 수렴했다.

하지만 왜일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격노의 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남부 공백지 따위에 쏟을 심력 따위 없었다. 지금은 북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때였다.

격노의 왕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넓은 방 한 면을 가득 채운 마계의 전도, 그중에서도 남부 끝에 위치한 마몬 가를 쳐다보았지만 아주 잠깐 뿐이었다.

탐욕의 왕의 시대는 끝난 지 오래였다. 더 이상 우려할 것이 아니었다.

격노의 왕의 오색 눈동자가 북쪽을 향했다. 넓은 방 안에 다시금 한숨 소리가 가늘게 퍼졌다.

&

단 한 번의 진화로 아몬의 힘을 완벽히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분명히 내딛은 한 걸음이었다.

격이 달라졌다.

용호는 그렇게 느꼈다. 아몬에게서 전해지는 힘에 전율했다.

물론 그만큼 많은 마력을 요구했다. 뿔이 다섯 개가 되어 용호 자신도 격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용호의 손 위에서 아몬은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 않았다. 불꽃의 창이라고 밖에 표현 못할 모습이었다.

생명의 정원 전체를 진감시키는 아몬의 힘에 카타리나가 깨어났다. 하지만 용호는 카타리나에게 시선을 분산할 수 없었다.

왼손에 낀 마장으로부터 두 가지 빛이 일었다.

불사의 마녀 스카자하를 상징하는 물색과 홍련의 마창 아몬을 상징하는 선홍이었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어둠이 아닌, 불타는 세상을 직시했다.

[나의 어린 주인이여.]

불타는 눈동자가 용호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몇 번이나 마주한 적이 있는 아몬의 심령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용호는 아몬을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건가? 투기장에 가지 않아도?”

[언제나는 힘들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린 주인이 나의 힘을 개방했을 때라면 제한적으로나마 가능하다.]

용호는 어설프게 웃었다. 아몬이 그야말로 무식하게 용호 자신의 마력을 먹어치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갑작스런 진화 덕분에 아몬 스스로도 강대한 마력을 발산했고, 스카자하 역시 알게 모르게 마력을 나눠주고 있어 이렇게 담소를 나눌 수 있었지만 다음에는 아닐 터였다. 담소를 나누기는커녕 전투에만 집중해도 과연 몇 분이나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강대한 힘이라는 뜻이었다.

마몬이 발했던 힘에 한 걸음 다가선 것만은 분명했다.

[스카자하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탐욕의 미궁을 정복하고 마몬의 12 사역마들을 굴복시켜라. 그리하면 탐욕의 왕의 신기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린 주인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몬의 목소리는 엄격하면서도 진지했지만 동시에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스카자하와는 그 종류가 다른 다정함이었다.

어쩐지 쑥스러워진 용호는 약간은 딴청을 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스카자하가 물병좌고 바포메트가 염소좌면… 설마 황도 12궁인 거야?”

황도 12궁은 태양의 궤도를 분할하는 열 두 개의 별자리들을 의미했다. 설마 마계에도 인계와 똑같은 황도 12궁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 나의 주인이신 마몬께서는 황도 12궁이 이계의 지식이라 하셨다.]

[아마도 어린 주인 그대의 고향에서부터 유래한 지식일 터이다.]

마계에 황도 12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몬이 황도 12궁을 모티브 삼아 12 사역마의 이명을 지은 것만은 분명했다.

애당초 용호 자신부터가 마몬이 인계에 남긴 자손들의 후예였다. 마몬이 인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 그럼 아몬 네 별자리는 뭔데? 구시온이랑 엘룬은?”

[구시온은 황소좌. 엘룬은 천칭좌이다.]

[내게는 따로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다. 주인께서는 내게는 딱히 어울리는 자리가 없으니 번외의 존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나는 12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다소 이질적인 존재이고 말이다.]

“잠깐, 그럼 애당초 황도 12궁이 꽉 안 찬다는 이야기잖아?”

[그렇다. 더욱이 이미 죽은 이들도 있으니 빈자리는 적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작은 바람이지만… 어린 주인 그대가 새로운 예속 사역마들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구세대와 신세대를 엮어 새로운 12 사역마를 완성하는 것이다.]

평소의 아몬답지 않게 약간은 흥분한 어조였다.

용호가 기분 좋게 웃었다. 머릿속에 절로 황도 12궁 각각의 이름과 예속 사역마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카타리나는 어떤 자리에 들어가야 할까?

처녀좌? 양좌?

용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몬이 가볍게 웃었다.

[어린 주인의 호위기사라면 천칭좌가 어울릴 것이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엘룬의 후계자이니 말이다.]

‘여러 가지 의미’라는 단어가 묘하게 신경 쓰이는 용호였지만 일단은 웃어넘겼다. 연이어 아몬이 말했다.

[더불어… 지나친 참견일지 모르겠지만 일전 손에 넣은 소원권의 사용은 다소 뒤로 미뤘으면 한다.]

[적어도 바포메트나 서부의 무리들과 싸운 이후로 말이다.]

용호가 눈을 껌벅였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원권’이라니. 그렇게 구체화시켰다는 말인가.

용호가 당황하는 가운데 아몬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호위 기사와 카이완의 소원권을 생각할 때마다 어린 주인의 욕망이 문자 그대로 폭주하고 있다.]

[탐욕의 힘을 생각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야말로 막강한 힘의 촉매이다.]

[아예 소원권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용을 너무 미룬다면, 오히려 촉매로 쓸 수 없을 것이다. 보다 순수하게 욕망을 투영하라.]

[망상 섞인 육욕이 아닌, 어린 주인 그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아몬은 더 없이 진지했고, 그랬기에 용호는 더욱 더 민망했다. 마치 꽁꽁 숨겨둔 비밀 폴더를 부모님께 들킨 기분이었다.

그런 이야기 좀 진지하게 하지 말라고 부르짖고 싶은 용호였지만 차마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더욱이 마지막 말만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아몬이 다시 웃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말했다.

[나의 어린 주인이여.]

[나는 믿고 있다.]

[언제가, 반드시 그 날이 올 것이다. 그대를 어린 주인이 아닌 주인이라 부를 그 날이 말이다.]

아몬은 언제나와 같았다. 진하게 묻어나는 감정을 마주한 용호는 멋쩍게 웃었다. 스카자하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가슴을 펴고 답했다.

“그리 멀지 않을 거야.”

[기대하겠다.]

홍련의 불꽃 속에서 녹염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녹염은 이내 세상 전체를 집어삼켰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떠 현실을 마주했다.

&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렀다.

용호가 아몬과 마주한 그 때.

공백지 서부와 동부는 각기 다른 움직임을 개시했다.

< 제 38장 - 전초전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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