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7장 - 생명의 정원 >
제 37장 - 생명의 정원
탐욕의 인도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란히 늘어선 빛의 상자들을 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가장 왼쪽.
그곳에 욕망을 이루어줄 것이 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용호는 깨달았다.
탐욕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정말로 경지가 높아진 것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용호가 곧 탐욕 그 자체라 해도 좋았다.
용호의 손길이 닿자 빛의 상자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반짝이는 빛 사이로 고풍스런 양피지 한 장이 나타났다.
“매직 스크롤?”
용호가 눈을 깜박이며 양피지를 잡은 순간이었다.
“이야! 작은 나리! 무지막지하구만! 아주 가차 없어! 가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큰 소리와 더불어 거대한 존재감이 엄습해왔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한 것은 역시나 구시온이었다.
관중석에서 투기장 사이의 거리를 도약 한 번으로 뛰어넘은 그의 품에는 카타리나가 안겨 있었다. 워낙에 덩치가 큰 구시온이다보니 그렇잖아도 가냘픈 카타리나가 마치 아기처럼 보였다.
“직접 오기는 힘들어 보여서 배달해 왔다.”
구시온은 껄껄 웃으며 카타리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머리 위에서 큰 소리가 울린 탓인지, 아니면 정말 지친 탓인지 카타리나는 비틀거렸고, 용호는 얼른 손을 뻗어 그런 카타리나를 부축했다. 한 손으로나마 허리를 끌어안았다.
“카타리나, 괜찮아?”
품에 살짝 안으며 조심스럽게 묻자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가운데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습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네 번째 뿔이 돋아난 여파인지 열병이라도 난 것 마냥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하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전에도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일이고, 무엇보다 카타리나의 두 눈에 커다란 성취감과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용호도 결국엔 마주 웃고 말았다.
“고마워. 덕분에 이겼어.”
그리 말하며 카타리나의 허리를 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타리나는 표정을 감추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 꼬리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당장에 파닥거리는 귀와 꼬리도 통제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저기 말이야. 훈훈하기는 한데... 일단은, 다들 보고 있거든?”
구시온이 말하며 관중석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전대의 가주들을 비롯한 투기장의 사역마들의 시선이 묘하게 따가웠다.
헛기침을 터트려 무안을 달랜 용호는 카타리나를 품에서 살짝 내려놓았다. 억지로 일어서려는 카타리나를 달래 바닥에 앉게 한 뒤 구시온을 마주했다. 빛의 상자에서 나온 스크롤을 내밀었다.
“이건 뭐지? 소환장?”
제일 윗부분에 제목처럼 떡하니 자리한 단어였다.
구시온이 팔짱을 끼며 답했다.
“이름 그대로 소환장이다. 투기장의 사역마를 소환할 수 있지.”
순간 용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딱 기대했던 반응 그대로였기에 구시온은 음흉하게 웃었다.
“단, 몇 가지 제한이 있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반사적으로 소환장 본문을 읽어 내리던 용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구시온은 낄낄 거리며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하나. 일단 영구적이지 않다. 소환장 본문을 제대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소환 가능한 기간은 최대 3일이다.”
구시온의 손가락 하나가 접혔다. 손가락 세 개는 ‘3일’이란 소환 기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둘. 소환 대상은 네가 지금까지 격파한 플로어 마스터들로 제한된다. 투기장의 주인인 이 몸은 제외라 이 말씀이지.”
“큿.”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정도로 아까운 이야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구시온을 소환할 수 있다면 단 3일이라 해도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터인데.
용호의 아쉬움은 곧 구시온의 즐거움이 되었다. 잔뜩 콧대가 높아진 얼굴로 우쭐거렸다.
“끌끌끌. 그래도 실망하긴 이르다. 그렇게 소환된 플로어 마스터는 보정 없이 진정한 전력을 다할 수 있다. 이게 세 번째지.”
구시온의 손가락이 모두 접혔다.
용호의 머릿속에 순간 번쩍이는 것이 있었다.
“구시온, 카이완이 20층까지 올라갔었다고 했지?”
“그래.”
“10층은 특별하다고 했으니… 혹시 11층이 10층보다 약한가?”
“설마.”
구시온은 느긋하게 답하며 용호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영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작은 나리’였다. 방금 대화만으로 세 번째 조항의 의미를 간파했음이 분명했다.
카이완은 20층까지 올라갔었다.
그말인즉 적어도 카이완이 19층의 플로어 마스터보다는 강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 카이완이 19층이 아닌 10층의 플로어 마스터를 하고 있다?
11층의 플로어 마스터가 10층의 플로어 마스터보다 더 강한 투기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용호는 싸움 직전에 말한 카이완의 ‘전력을 다한다’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카이완이 말한 전력은 ‘10층’에서의 전력이었군.
“정답.”
카이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전력을 다하였다. 다만 그 전력이 제한되었을 뿐이었다.
용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깨를 늘어트리며 물었다.
“설마 지금까지의 플로어 마스터들도 다 그랬던 건가?”
“그런 녀석도 있고, 아닌 녀석도 있다. 예를 들어 네가 1층에서 싸운 강철 소 타우린 녀석은 그게 진정한 최대 전력이 맞다. 하지만 9층에서 패한 불쌍한 칼라이는 다르지. 진짜 칼라이는 훨씬 더 강하다.”
결국 배정된 층이 낮으면 낮을수록 본래 가진 힘을 다 발휘할 수 없다는 뜻과 상동했다.
생각해보면 썩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투기장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역마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개개인의 전력이 딱딱 각 층의 난이도에 맞춰 서열화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어려웠으니 말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제약되는 거지?”
“마력이나 신체능력 전반… 뭐 그 외에도 이것저것. 전부 나열하기는 아무래도 어렵군. 개인차도 있으니 말이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린 구시온은 손을 크게 내저었다. 화제를 전환하듯 눈짓으로 용호의 손에 들린 소환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10층을 통과했어도 그걸 손에 넣은 녀석은 드물다. 분명 유용하게 쓸 곳이 있을 거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서부와의 싸움이 기정사실로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이보다 더 유용한 보상도 드물 터였다.
“과연. 특별 보상이라 생색낼 만도 하군.”
“생색은 무슨. 그리고 보상이라면 몇 개 더 남았잖아? 나 참. 카이완 저 아이가 그렇게 맑게 웃는 건 처음 봤다.”
턱짓으로 실신한 카이완을 가리킨 구시온이 다시 킥킥거렸다.
순간 구시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던 용호는 이내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소원.’
분명히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용호 자신이 졌을 때의 경우가 정해지지 않은 터라 제대로 내기가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어찌되었든 약속은 약속이었다.
‘이기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게.’
카이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었다. 더욱이 떠오른 것은 카이완의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용호의 눈동자가 절로 오른쪽 아래로 향했다. 다소곳이 앉아 쉬고 있던 카타리나는 용호의 시선에 움찔하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빳빳하게 선 꼬리와 달리 살짝 늘어진 귀가 붉었다.
소원이라니. 더욱이 무엇이든 들어준다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남중, 남고, 공대라는 기적의 테크를 탄 스무 살 피 끓는 청춘이었다. 설사 성인군자가 지금 용호 자신의 머릿속을 엿본다 해도 차마 손가락질을 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다른 의미로 감탄하는 이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욕망… 아니, 번뇌력이다.]
[실로 굉장하군. 여러 가지 의미로 굉장하다. 어린 주인이여. 카이완과의 전투에서 이 정도 번뇌력을 발했다면… 굳이 진화를 하지 않았어도 승리했을지 모르겠군.]
아몬의 근엄한 목소리가 망상을 깨부쉈다. 그제야 구시온의 능글맞은 시선을 눈치 챈 용호는 연신 헛기침을 했다. 필사적인 손 부채질로 얼굴의 열기를 빼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라?”
순간 다리가 풀렸다. 휘청거릴 여지도 없이 용호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주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타리나가 깜짝 놀라 급히 용호를 돌아보았다. 구시온이 그런 카타리나를 달래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할 거 없다. 그냥 지친 것 뿐이니까. 너도 봤겠지만 카이완한테 엉망으로 당했잖냐.”
진화 과정에서 외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그렇다고 누적된 데미지마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구시온은 연이어 용호에게 말했다.
“스카자하에게라도 가봐. 충분한 치료가 필요할 거다.”
투기장에서의 부상은 진짜 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은 투기장에서 입은 부상을 ‘진짜’라 여겼다.
때문에 간과할 수 없었다. 투기장에서 면피할 수 있는 것은 신체 훼손과 죽음뿐이었다. 부상으로 인한 피로와 고통, 후유증은 고스란히 안고 가야할 짐이었다.
“그렇긴 한데.”
용호도 스카자하의 능력을 알았다. 애당초 스카자하를 찾게 된 이유부터가 투기장에서 입은 부상을 치유하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구시온의 말마따나 스카자하에게 가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시해야 할 일이 있었다.
“구시온 네 말마따나 아직 보상이 끝난 건 아닌 것 같네.”
“응?”
이번에는 구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용호는 팔목에 자리한 아몬을 바라보았다.
“아몬.”
구시온과 달리 아몬은 용호의 말뜻을 이해했다.
진화 숙련치가 모두 찬 것은 용호만이 아니었다.
용호가 아몬을 손에 넣은 지 벌써 몇 달. 그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투를 경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몬의 진화 숙련치가 모두 모였다. 아몬이 이전에 보인 변화는 진화의 권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용호가 충분히 강해졌기에 아몬이 스스로의 힘을 조금 더 개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몬을 진화시킨다.
용호에게 맞춰주기 위해 스스로를 퇴화시켰던 아몬을 조금 더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한다.
허나 아몬은 부드럽게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엄격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어린 주인이여.]
[일단은 스카자하에게 가서 쉴 것을 권한다. 그대는 지쳤고, 그 상태로 내 육신을 진화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지금의 어린 주인이라면 스카자하에게 들을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아몬을 손에 넣은 이래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바라왔던가.
하지만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홍련의 마창 아몬을 진화시키는 일이었다. 만전의 상태로 임해도 부족할 터였다.
미련을 버린 용호는 카이완 쪽을 돌아보았다. 체력이 다해 실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음에 왔을 때도… 카이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쓰러트린 플로어 마스터들 가운데 다시 마주할 수 있었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구시온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걱정 말고 소원이나 잘 생각해 두라고. 뭐, 뻔하겠지만.”
마지막에 다시 음흉하게 웃었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힌 용호는 약간은 사납게 말했다.
“헛소리 작작하고 편지나 줘.”
“무슨 편지?”
용호는 대답하는 대신 방금까지 구시온이 짓던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에 잇소리를 토한 구시온이 품을 뒤적였다.
“쳇. 여기 있다.”
스카자하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소중히 봉인된 편지를 받아든 용호는 새삼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탐욕의 힘 덕분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편지에 담긴 구시온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시온.”
“왜.”
“그냥. 너 생각보다 좋은 놈이라고.”
구시온의 표정이 해괴망측하게 변했다. 용호는 마치 스컬마냥 껄껄 웃은 뒤 카타리나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모양새였다.
“가자, 카타리나.”
“네, 가주님.”
얼른 답한 카타리나가 즐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가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용호와 카타리나가 멀어졌다.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시온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랑 엘룬…이라고 하기엔 좀 어폐가 있으려나? 엘룬은 훨씬 더 사나웠으니까?”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리움도 있었고 즐거움도 있었다. 아련함과 애달픔 역시 섞여 있었다.
아몬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구시온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시가를 꺼내 입에 물며 마지막 애잔함을 토해냈다.
“나리가 보고 싶구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히 떠올랐다.
그날 마지막으로 보았던 왕의 등을 기억했다.
[그만 돌아가겠다, 구시온.]
아몬의 목소리에도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구시온은 씩 웃으며 입에 문 시가를 앞으로 살짝 내밀었고, 아몬은 낮게 웃으며 홍련의 불길을 대기 중에 흩어 놓았다. 그중 작은 불씨 하나가 구시온의 시가에 불을 붙여주었다.
아몬은 사라졌다. 용호와 카타리나의 뒷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구시온은 돌아서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연기를 토했다. 이제는 너무나 멀어진 과거를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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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심장에 안 좋아요!]
< 제 37장 - 생명의 정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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