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6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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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놈.”
칼라이를 쓰러트리고 관중석으로 돌아온 용호에게 구시온이 건넨 첫 번째 말이었다.
용호는 너덜너덜해진 스스로를 가리키며 인상을 찡그렸다.
“꽤나 고생했거든? 이 꼴 안 보여?”
던전 상회에서 구매한 전투복이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양 팔 부분이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구시온은 여전히 마뜩찮다는 얼굴로 끌끌끌 혀를 찼다.
“그거야 네가 아직 불꽃과 냉기를 동시에 쓰는 게 미숙해서 그런 거고. 애당초 연습한답시고 이 기술 저 기술 다 쓰면서 질질 끈 게 누군데. 칼라이만 불쌍하지. 간만에 싸움이라고, 기사다움을 보이겠다며 좋아했거늘.”
절레절레 고개까지 내저었다.
칼라이가 싸우기 전에 기사의 명예 어쩌고 했던 게 떠오른 용호는 뺨을 살짝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좀 너무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래도 나도 꽤 고전했다고. 정말로. 칼라이한테 멋진 승부였다고 전해줘.”
“퍽이나.”
말하는 것과 달리 구시온은 낄낄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용호의 성장이 기꺼웠기 때문이다.
용호는 지금까지 구시온이 보아온 그 어떤 가주보다도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함의 원천은 탐욕과 아몬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구시온을 기쁘게 했다.
“가만히 있어봐. 간만에 서비스 좀 해주지.”
구시온이 돌연 솥뚜껑 같은 손을 용호에게 뻗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용호였지만 다행히 물러나거나 하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다. 구시온의 손이 용호의 머리 위 허공을 지나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
다 찢어진 넝마조각 같던 용호의 전투복이 다시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다. 구시온 개인의 마법인지, 아니면 투기장의 어떤 특별한 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마력이랑 체력은 어떻게 안 되나?”
용호의 물음에 모처럼 우쭐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시온이 인상을 구겼다.
누가 탐욕의 왕 아니랄까봐 욕심도 많았다.
“거기까지는 무리다. 애당초 서비스라니까?”
“씁, 어쩔 수 없군.”
용호는 구시온의 말을 한 귀로 흘린 뒤 품을 뒤졌다. 9층 격파 보상으로 얻은 마력 포션 세트 중에서 한 병을 꺼내 마셨다.
예전에 시트리가 구해준 마력 포션과는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시트리가 줬던 물건이 월등히 상급이었다.
무려 9층에서 나온 포션임에도 불구하고 마력이 단번에 차오르지 않았다. 천천히 회복되었고, 마력 강화 효과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그마치 열병이나 되었다. 더욱이 용호 자신의 마력이 시트리에게 마력 포션을 받았을 때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강대해졌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할 터였다.
용호가 마력 포션을 삼키는 모습에 구시온은 호오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씩 웃으며 물었다.
“연달아 10층에 도전하려는 건가?”
지금까지 칼라이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용호를 놀리기 위해 다소 과장했을 뿐, 용호가 입은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일반적이라면 여기서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마력 포션도 열병이나 있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겨우 열병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중 한 병을 소모해가면서까지 연달아 다음 층에 도전하는 것은 용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구시온의 오판이었다. 용호는 매사에 계산을 늘어놓는 타입이 결코 아니었다.
“감이 좋아. 기세를 살려야지. 시간도 아껴야 하고.”
카이완은 강적일 것이 분명했다. 칼라이와의 전투로 오감이 날카로워진 지금이야말로 그녀와 싸우기에 적당했다.
용호는 반쯤 마신 마력 포션을 입에서 떼었다. 마력이 차오르는 속도를 고려했을 때 이 정도만 마셔도 충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거 밀봉하고 나중에 다시 마셔도 되나?’
시트리가 준 마력 포션은 한 번에 한 병을 다 먹어야지만 효과가 나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마력 차는 걸 보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고민하던 용호의 눈에 마침 살랑거리는 카타리나의 꼬리가 들어왔다. 용호는 카타리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카타리나, 너도 좀 마실래?”
용호에게 검은 마력을 제공하느라 지친 카타리나였다.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기에 잠시 눈을 깜박였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용호가 내민 마력 포션을 받아 입에 가져갔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그렇지 못했다.
‘가, 간접…….’
뺨이 절로 달아올랐다. 용호는 급히 손부채질을 하며 필사적으로 얼굴의 열을 방출했다. 카타리나도 태연하고, 저 구시온조차도 별 생각 없이 쳐다보는 와중에 혼자 민망해하는 것도 우스웠다.
“왜 그러냐?”
“갑자기 그냥 좀 더워서.”
놀리기 좋아하는 구시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니 역시 흥분할 일이 아니었다.
“와… 진짜로 마력이 회복되고 있어요.”
마력 포션을 다 마신 카타리나가 다시 밝게 웃었다. 용호의 눈에는 카타리나의 입술만 보였다.
[어린 주인이여?]
“흠흠. 지난번에 말했던 다음 단계, 내가 한 게 맞나?”
다행히 아몬의 목소리가 용호에게 현실 감각을 되찾아 주었다.
구시온은 헷 웃으며 답했다.
“그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말이야. 브리가다를 나눠받은 권속에게 힘을 나눠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유하는 것… 그게 다음 단계지. 그리고 그것이 칠대죄악을 가진 왕들이 강력한 예속 사역마를 수하로 두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예속 사역마는 여럿이었지만 가주는 하나였다.
강력한 예속 사역마 모두의 힘을 가주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면 과연 어떤 시너지 효과가 발휘될까.
하나하나가 전설이라 해도 좋을 마몬의 12 사역마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터무니없군.’
어째서 칠대죄악을 가진 자들만이 ‘왕’으로 군림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실로 굉장한 힘이었다.
‘브리가다는 마신왕의 육의 파편… 그 중에서 신기가 되지 못한 파편들.’
신기에 대한 호기심이 치솟았다. 일반적인 브리가다로도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과연 신기가 있다면 어떤 이적을 발휘할 수 있을까.
마계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신기는 현재 모두 주인이 있었다.
칠대죄악을 소유한 여섯 왕인 오만의 왕, 질시의 왕, 색욕의 왕, 나태의 왕, 식탐의 왕, 격노의 왕.
칠대죄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군림하는 폭력의 왕.
저들 가운데 하나를 꺾지 않는다면 결코 신기를 소유할 수 없을 터였다.
용호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일단은 현재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때마침 구시온이 말했다.
“일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10층의 상대는 카이완이다. 상이 특별한 만큼 벌칙 역시 특별하지.”
“상이 뭐지?”
“그건 이기고 나서 자기 눈으로 확인하자고. 벌칙 역시 지금은 알려줄 수 없어. 하지만 적어도 죽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카이완이 몇 층에서 패배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
용호가 연달아 물었다. 구시온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목을 몇 번 움직이다 답했다.
“패배 자체는 여러 번 했지. 아마 투기장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패배를 경험한 가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우리 작은 나리가 궁금해 할 패배라면… 20층이었다.”
카이완을 마몬 가의 가주에서 투기장의 사역마로 전락시킨 벌칙.
20층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층이었다.
“길게 끌 이유는 없겠지. 슬슬 시작하자.”
용호가 가볍게 팔을 돌리며 말했다. 용호 자신뿐만 아니라 카타리나의 마력 역시 거의 다 회복된 상태였다.
구시온은 킬킬 거리며 턱짓으로 투기장을 가리켰다.
“이미 대기 중이다. 카이완 그 아이도 꽤나 몸이 달아있어서 말이야.”
용호는 투기장 쪽으로 돌아섰다. 과연 구시온의 말대로 그 곳에는 잿빛 머리칼의 여인이 홀로 서 있었다.
왜곡의 마왕 카이완.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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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완은 투기장에서 그간 보아왔던 차림이 아니었다.
검정과 빨강이 뒤 섞인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옷과 길게 늘어트린 검. 처연하면서도 표독스러운 얼굴을 감싼 잿빛 머리칼.
왜곡의 반지에 남아있는 마력을 통해 엿보았던 모습과 같았다. 저 모습은 카이완이 마몬 가의 가주이던 시절과 같았다.
겉으로만 보면 꽤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독이 오른 모습이었다.
카이완은 아무 말 없이 용호를 쏘아보았고, 용호는 잠시 그런 카이완을 말없이 마주했다. 숨을 한 번 크게 고른 뒤 이번 방문 때 특별히 챙겨온 가방을 열었다.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카이완에게 내밀었다.
“케이언의 일지야. 죽기 전까지 쓰던 거야.”
카이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용호는 비로소 지금까지 카이완이 자신을 노려본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호는 이번에도 기다렸고, 카이완은 이를 악물었다. 겨우겨우 책을 받아든 뒤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도 싸움을 재촉하지 않았다. 구시온은 침묵했고, 관중석에 자리한 투기장의 사역마들과 전대 마몬 가의 가주들도 카이완을 기다려주었다.
카이완은 일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일지를 적신 탓이었다.
숨을 헐떡였다. 이내 울음을 참느라 끅끅 거렸고, 끝내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다.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용호는 이번에도 기다려 주었다.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카이완을 안아주었고, 처음 케이언의 죽음을 접했을 때처럼 카이완은 용호를 밀어내지 않았다. 용호의 체온에 의지하며 마음껏 슬픔을 발산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카이완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카이완은 용호의 가슴에서 이마를 떼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른 뒤에야 작은 목소리를 토했다.
“고마워.”
카이완이 용호를 밀어냈다. 스스로도 뒷걸음질을 쳐서 거리를 벌렸다. 용호를 마주했다.
용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별 말씀을.”
일부러 조금은 가볍게 말하자 카이완은 아주 작게나마 웃었다. 그리고 이내 억지로나마 조금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일지 읽을 때 공격하진 않네. 울고 있을 때라든가. 그럼 쉽게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예상 못한 이야기였다. 특등석에서 구경하던 구시온이 껄껄껄 사람 좋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호는 쓰게 웃었다.
“그럴까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잖아?”
거짓말이었다. 애당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카이완도 그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케이언의 일지를 소중하게 한 번 꼭 끌어안은 뒤 돌아섰다. 투기장 밖에 일지를 내려놓은 뒤에야 다시 용호를 보고 섰다.
“그냥 싸우면 재미없겠지. 그러니까 내기를 하자. 날 이기면 무슨 소원이든 하나 들어줄게.”
“내가 지면?”
반사적으로 묻자 카이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글쎄? 딱히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사실 난 지금 너한테 너무 고마워서 뭔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거든.”
시원한 미소가 잠깐이지만 카이완의 입가를 맴돌았다. 아마 지난 수십 년 동안은 지어본 적이 없는 미소일 터였다.
용호는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꽤 심하게 동요했다.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니. 무슨 소원이든.
그런데 동요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저, 저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카타리나였다. 꼬리를 빳빳이 세운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가주님이 이기시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드리 겠습니다!”
“어?”
여기서 카타리나가 갑자기 끼어드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용호의 꺼벙한 시선에 카타리나는 움찔하더니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귀를 축 늘어트린 채 침몰했다.
용호는 다시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카이완은 맑게 웃었다. 아예 배까지 잡고 킥킥 거렸다. 기억 속의 카이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구시온이나 역대 가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놀라거나 당황한 눈으로 카이완을 바라보았다.
“귀엽네.”
카이완은 숨을 가다듬었다. 케이언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환한 미소로 용호를 마주했다.
“다시 한 번 말할게. 고마워. 그러니까-”
황홀한 미소는 짧았다. 애정 가득하던 눈매에 표독스러움이 깃들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육신으로부터 잔뜩 날이 선 마력이 솟구쳐 올랐다.
카이완이 발걸음을 떼었다. 그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하지만 결코 작지 않았다. 카이완의 숨결이 순식간에 용호의 지척을 맴돌았다.
“전력을 다할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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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6장 #2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