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09화 (109/227)

< 제 36장 - 왜곡의 마왕 >

제 36장 - 왜곡의 마왕

마계의 수많은 종족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종족은 무엇일까.

여러 이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언제나 언급되는 종족이 하나 있었다.

드래곤.

위대한 일자왕一者王의 후예들.

그들은 날짐승들의 왕인 동시에 들짐승들의 왕이었다. 마계의 존재들 가운데서도 특히나 강인한 육체를 소유했고, 그 육체에 필적하는 강대한 마력 역시 타고났다.

충분히 오랜 삶을 산, 흔히들 에이션트 드래곤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라 할 수 있었다.

신과 같은 자들.

체력과 마력 모두 궁극에 도달한 강자의 표상.

그런 드래곤들 가운데서도 정점에 선 자가 있었다.

칠대죄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마계 역사상 칠대죄악 없이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사람들이 일컬어 부르나니 폭력의 왕.

위대한 드래곤 로드.

폭력의 왕은 산과 같은 존재였다. 재미있게도 이 표현은 실질과 비유 모두를 만족했다.

폭력의 왕의 거체는 몸길이만 수백 미터에 달했다. 꼬리를 말고 몸을 움츠려도 그 거대함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폭력의 왕은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폭력’이란 이명답게 그는 더 없이 강대한 존재였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화산과 같은 존재. 평소에는 그저 침묵할 뿐이지만, 한 번 그 역정을 드러내면 세상 모두를 진감시키는 괴수.

폭력의 왕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그는 눈을 뜨거나 거체를 움직이지 않았다. 깨어난 것은 오직 그의 정신뿐이었다.

폭력의 왕은 생각했다. 이제는 신체의 일부라 해도 좋을 신기- 저 마신왕의 일곱 파편 가운데 하나와 자신의 영혼을 연결시켰다.

신기와 칠대죄악은 그 역사를 함께 했다. 까마득한 옛날, 마신왕이 사라진 그 날 이래 신기는 수많은 주인들의 손을 거쳤다.

신기는 결코 그들을 잊지 않았다. 신기에는 마치 흔적처럼 그들의 마력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그중에 하나. 신기에 남은 가장 거대한 흔적.

‘탐욕의 왕.’

마력에는 소유자의 영혼과 기억이 깃드는 법이었다. 하물며 신기에 남은 마력이었다. 단편적이라 하나 강렬한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탐욕의 왕은 어째서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그의 목숨을 취한 것은 대체 누구였을까.

폭력의 왕은 조용히 잠을 청했다.

신기에 남겨진 기억을 엿보았다.

&

중간 중간 쉬기는 했지만 거의 한나절 내내 비행한 살라미 덕분에 용호는 날이 바뀌기 전에 마몬 가의 던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상을 위주로 살피던 하이 미어 캣들은 용호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라 허둥거렸다. 용호는 그런 하이 미어 캣들에게 앞으로는 공중도 잘 살피라 말한 뒤 하나하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그리고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타리나가 괜스레 스스로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졌다. -

하이 미어 캣들에 이어 용호를 맞이한 것은 마몬 가의 고참 사역마 가운데 하나인 트리엔트였다.

이제는 완전히 마몬 가의 수문장으로 자리 잡은 트리엔트는 용호가 얼마 전에 새로 데려온 트리엔트 두 마리와 함께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진화를 거듭한 그들은 일반적인 트리엔트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강인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본이 ‘나무’인 터라 평범한 트리엔트들은 하기 어려운 동작들도 쉬이 해냈다.

연이어 바둑이와 유리아를 대동한 엘리고스가 용호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다.

“가주 님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엘리고스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마몬 가가 오늘내일하며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때부터 집사장을 해온 엘리고스였다. 다 무너져가던 마몬 가가 다시 우뚝 섰을 뿐만 아니라 다른 던전을 합병하기까지 했으니 감개무량한 것도 당연했다.

엘리고스 옆에 있던 바둑이는 훨씬 더 솔직하게 그냥 왕왕 거리며 좋아했고, 유리아는 치맛단을 살짝 들어올리며 제법 우아하게 예를 표했다. 혀 짧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감축, 감축 드립니다.”

용호는 스컬마냥 껄껄 웃으며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괜히 머리칼을 매만지던 카타리나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한 엘리고스를 데리고 마왕의 방으로 향했다.

[주인님, 일단은 푹 쉬세요. 푹.]

[한나절 내내 날아다닌 살라미도 고생했지만, 한나절 내내 그런 살라미 등에 매달려 있은 주인님도 고생하셨다는 거 아시죠?]

루시아가 조곤조곤 말했다. 용호는 어쩐지 오랜만인 것 같은 옥좌에 앉으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 말대로 지친 것도 사실이었고, 오늘 하루는 쉴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그 전에 해야만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진화의 권능으로 엘리고스를 쳐다본 용호는 씩 웃었다.

“역시.”

오필리아가 진화 숙련치가 꽉 찼다는 것은 곧 엘리고스 역시 진화 숙련치가 꽉 찼다는 것을 의미했다. 항시 함께 수련하는 두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진화가 가능한지요?”

용호의 두 눈에서 녹색 안광이 번쩍이자 엘리고스가 약간은 기대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엘리고스도 마계의 존재였다. 더욱이 그는 ‘전투 종족’이라 불리는 레드 데몬의 일원이었다. 진화를 통해 강해지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용호는 바로 답하는 대신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눈을 살짝 가늘게 뜬 채 엘리고스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몇 초. 엘리고스가 딱 조바심을 느낄 즈음에 말했다.

“오필리아가 그러더라고. 이번에는 ‘엘리 오라버니’의 마력을 진화시켜달라고.”

특별히 강조한 부분에서 엘리고스가 헛기침을 토했다.

눈에 띄게 당황했다. 용호는 기꺼움과 묘한 분노를 함께 느끼며 물었다.

“엘리고스도 혹시 오필리아한테 부르는 애칭 같은 거 있어?”

“어, 없습니다. 그냥 오필리아입니다. 오필리아라는 이름 자체로 참 예쁘… 헉.”

용호는 마왕답게 사악하게 웃었고, 엘리고스는 세뇌 어쩌고 중얼거리며 허둥거렸다. 본래 피부가 붉은 레드 데몬이었지만 오늘은 훨씬 더 붉어 보였다.

엘리고스에게는 다행히도 용호는 정도를 아는 남자였다. 사실 뭔가 더 파고들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용호 자신이 내상을 입을 것 같아서이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장난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력 특화로 진화 시킬게. 눈을 감아.”

화제가 전환되었기에 엘리고스는 안도의 숨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진화의 권능이 발동했다. 엘리고스의 가능성을 이끌어냈고, 이는 곧 현실의 변화를 야기했다.

엘리고스의 마력이 강해졌다. 더욱이 이번에는 분명한 육체적인 변화까지 동반하였다. 이마에 세 번째 뿔이 돋아났다.

귀를 쫑긋 거리며 엘리고스와 오필리아에 관한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카타리나가 다시 한 번 토끼눈이 되었다.

뿔이 두 개인 것과 세 개인 것 사이에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좋을 간극이 존재했다.

‘더욱이.’

엘리고스의 머리 위에 새로운 빛의 상자가 나타났다.

[레드 데몬 - 타이런트]

오필리아처럼 둘이 아닌 하나였다. 하지만 그 이름이 참으로 강렬했다.

‘폭군?’

짐승에 이어 이번에는 폭군이었다. 용호는 반사적으로 빛의 상자를 건드려 진화 후 모습을 살펴보았다.

오필리아의 경우와 같았다. 지금과 거의 똑같은 일반 형태 외에도 ‘전투 형태’가 따로 존재했다.

어째서 폭군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가 가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역 삼각형으로 잘 발달한 상체였지만 전투 형태 때는 그 이상이었다. 특히 어깨와 두 팔이 발달하였고, 털이 잔뜩 난 두 주먹은 그 자체만으로도 흉악한 둔기를 보는 것 같았다.

곰과 고릴라를 하나로 합치면 이런 모습이 될까?

어찌되었든 야성미가 풀풀 날리는 것만은 분명했다. 온몸에 돋아난 털 사이사이에 자리한 검은 문양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야말로 초 짐승.’

용호는 혼자 납득했다. 손을 거두고 진화의 권능을 해제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레드 데몬 타이런트.

분명 엘리고스의 진화 후 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위화감이 들었다.

‘왜지?’

엘리고스만이 아니었다. 카타리나나 오필리아도 그랬다.

승급명.

고블린 레인저들이나 스컬의 승급명은 이해가 갔다. 홉 고블린은 고블린의 상위종이었고, 스컬의 경우엔 아예 인위적으로 태어난 언데드였으니까. 스켈레톤 솔져나 워리어 같은 상위종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레드 데몬이나 다크 엘프도 그러할까? 아니, 애당초 카타리나는 다크 엘프와 서큐버스의 혼혈이었다. 지금 그녀는 완전히 혼자만의 길을 걷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인간인지 의심될 정도로 강인한 육체 능력을 가졌다 해도 결국엔 ‘인간’이었다. 반대로 엄청나게 약해빠진 육체의 소유자 역시 ‘인간’이었다.

레드 데몬 비스트나 스트라이더 같은 세부 항목이 나눠져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엘리고스 때문만이 아니라, 그간 쌓인 위화감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한 것에 가까웠다.

‘뭐, 물어보면 되겠지.’

다른 종족이라면 몰라도 레드 데몬이라면 그 궁극에 도달했다고 해도 좋을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용호는 가볍게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생각을 털어냈다. 슬슬 다시 잔소리를 일발 장전하고 있는 루시아에게 선수를 친 뒤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

“레드 데몬 타이런트? 그게 뭐냐?”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구시온은 고개를 갸웃했고, 그건 레드 데몬 비스트나 스트라이더의 이름을 들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혀 모르겠다는 구시온의 얼굴에 용호는 미간을 좁혔다.

아몬이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목소리를 흘려넣었다.

[구시온. 시치미 떼는 것은 그 정도로 해라.]

[나의 어린 주인이여. 그것은 아마도 어린 주인의 영혼이- 진화의 권능이 주인의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편의상 만들어낸 이름일 것이다.]

[구시온이 그 이름들을 모르는 것은 그 때문이고 말이다.]

“진화의 권능이?”

아몬은 불길을 좀 더 키우는 것으로 응답했다. 구시온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진화의 권능은… 아니, 애당초 마왕의 권능은 마왕 개개인의 영혼에 기반 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힘이 아니라 이거지. 작은 나리의 영혼이 가진 힘… 영혼 그 자체라고 할까나?”

비슷한 이야기는 이미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당장 최근에도 오필리아가 마왕의 권능을 설명하면서 영혼의 힘에 대해 언급했었다.

“진화의 권능을 처음 발휘했을 때는 색색의 연기 같은 것들이 보였다며. 그런데 지금은 딱 체계 잡힌 계보도? 아무튼 그런 걸로 바뀌었다고 했지? 그걸 바꾼 건 누구일까?”

“과연.”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납득이 되는 설명이었다.

색색의 연기라는 실로 알아먹기 힘든 형태를 지금의 일목요연한, 마치 게임의 시스템같은 진화 정보 창으로 바꾼 것은 용호 자신이었다.

승급명 역시 그러했다. 용호 자신이 분간하기 쉽도록, 편의상 주어진 이름들이었다.

‘으음, 어쩐지 마음에 쏙 들더라.’

딱 용호 자신의 취향 그대로인 이름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이름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단어들 모두가 용호의 머릿속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잡담은 이쯤 하도록 하지. 9층의 플로어 마스터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구시온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특등석에 자리했다. 아몬 역시도 말없이 그런 구시온의 옆에 자리했다.

용호는 가볍게 몸을 풀듯 어깨를 몇 번 돌린 뒤 투기장으로 향했다. 카타리나는 관중석 제일 앞자리에 앉아 그런 용호를 지켜보았다.

“고생 꽤나 할 거야. 9층의 플로어 마스터들 가운데서도 특히 강한 녀석이니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작은 나리가 벌칙 받는 모습을 볼지도 모르겠군.”

구시온이 시가를 입에 물며 키득 웃었다. 투기장의 각 층에는 여러 명의 플로어 마스터들이 존재했다. 도전자에 따라 서로 다른 플로어 마스터들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번에 나온 9층의 플로어 마스터인 켄타우로스 칼라이는 9층에서 나올 수 있는 플로어 마스터들 가운데서 최강이었다.

하지만 그런 구시온의 예상에도 불구하고 아몬은 그저 조용히 미소지었다. 은은하다고 해도 좋을 불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구시온은 이내 아몬이 어째서 지금 같은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황금빛 갑주를 입고 큰 칼과 방패로 무장한 켄타우로스 칼라이 앞에 선 용호는 아몬과 마장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오늘은 평소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싸울 생각이었다.

탐욕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용호의 오른손에서 녹염이 일었고, 왼손에서 차가운 냉기가 푸른색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브리가다가 발동했다. 관중석에 앉은 카타리나로부터 검은 마력을 이끌어냈다.

녹염과 냉기에 검은 빛이 어우러졌다.

불꽃과 냉기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아직 용호에게 무리였다. 하지만 어둠을- 어느 속성에나 섞일 수 있는 그것을 각각의 속성에 가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켄타우로스 칼라이는 당혹스런 눈으로 용호를 보았다. 용호의 양손에서 일어나는 마력이 심상치가 않았다.

구시온은 입을 크게 벌렸다. 눈을 껌벅이다가 아몬을 돌아보았다.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네가 가르쳐줬냐?’

아몬은 불길로 답했다. 명백한 부정이었다.

“스스로 깨달았다 이건가. 정말이지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우리 작은 나리는.”

브리가다의 다음 단계. 예속 사역마들의 마력을 이끌어내 자신의 마력으로 삼는 것.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금 용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속성력을 융합시켰다. 불꽃과 냉기에 각각 어둠을 가미해 더 큰 힘을 만들어냈다.

켄타우로스 칼라이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까지 투기 장을 찾은 마몬 가의 가주들 가운데서 저런 속성력을 사용한 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칼라이 녀석도 불쌍하지만 10층에서 나올 녀석도 불쌍… 아니군. 10층은 카이완이었지. 고전하는 건 오히려 작은 나리일지도 모르겠군.”

구시온은 씩 웃었다. 짓궂다 못해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아몬은 다시 투기장에 집중하였다.

용호와 켄타우로스 칼라이가 격돌했다. 구시온이 예상했던 미래를 자아냈다.

칼라이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

< 제 36장 - 왜곡의 마왕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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