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08화 (108/227)
  • < 제 35장 #2 >

    &

    던전 개조의 시작은 던전의 심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이틀 동안 용호는 어떤 방식으로 란돌트 가를 합병할 것인지 결단을 내렸다.

    티그리우스 란돌트의 마왕 지위는 유지한다. 우선은 사역마로 거두지 않고 단순한 주종관계만을 맺는다.

    물론 언젠가는 사역마로 거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란돌트 가의 던전은 용호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확장기지’인 동시에 서부의 병력을 막아낼 방패였다.

    용호는 란돌트 가에 그리 오래 머물 처지가 못 되었다. 서부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한 층이라도 더 투기장을 돌파해야 했고, 가능하다면 탐욕의 미궁 역시 탐사해야만 했다.

    그러니 가주가 있는 것이 나았다. 더욱이 티그리우스의 권능은 무척이나 유용했다. 사역마로 삼으면 권능이 약화될 것이 확실한 지금 섣불리 아군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티그리우스가 사역마로 삼지 않아도 배신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지만.’

    그래서 결정에 이틀이 필요했다.

    용호는 이미 심적으로는 티그리우스를 신뢰했다. 결투 전후로 보여준 그의 태도가 용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은 조금 더 시간을 두라 말했다.

    무척이나 중요한 사안이었다. 혹시라도 전투 중에 티그리우스가 배신해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안전장치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안전장치가 바로 던전의 심장의 장악이었다.

    [주인- 님!]

    [제 목소리- 들리- 세요?]

    란돌트 가 최심부에 위치한 던전의 심장으로부터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태가 썩 좋진 못했다.

    마치 수신 상태가 안 좋은 곳에서 전화를 받은 것처럼 루시아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잡음까지 섞여 있었다.

    용호는 던전의 심장에 부착한 원거리 통신기의 위치를 옆으로 살짝 옮겼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티그리우스가 허공에 떠오른 빛의 문자들을 조종해 루시아와의 연결 상태를 개선했다.

    던전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루시아의 목소리가 점점 더 명확해졌다.

    [아이우헤호]

    [들리세요?]

    [들리시면 뭐라고 대답 좀 해주세요!]

    [뚜비뚜비 밥밥]

    [주인님은 바~보]

    주절주절 이어지는 루시아의 목소리에 용호는 뺨을 살짝 붉혔다. 마몬 가에 있었을 때라면 귀엽다며 웃었을 터였지만, 여기는 마몬 가가 아니었다. 란돌트 가였고, 용호의 옆에는 티그리우스가 서 있었다.

    용호는 무안함을 감추듯 헛기침을 몇 번 터트린 뒤 낮게 말했다.

    “루시아?”

    [히끅!]

    [주인님? 이번에는 제가 잘 안 들려요. 통신 상태가 불량한 것 같아요.]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필사적으로 딴청을 부리는 푸른 머리칼의 소녀를 떠올린 용호는 결국 키득 웃고 말았다.

    “잘 연결된 것 같네.”

    [헤헤, 제가 주인님 사랑하는 거 아시죠?]

    용호는 대답하는 대신 허공에 꿀밤을 먹였다. 통신 상태가 개선됨에 따라 란돌트 가의 던전의 심장을 경유해 용호와 연결된 루시아는 까르르 웃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티그리우스가 말했다.

    “무척 특이하군요.”

    “응?”

    “감정이 굉장히 풍부합니다. 던전의 영혼을 많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던전의 영혼은 처음 봅니다.”

    그냥 꺼내는 말 같지가 않았다. 티그리우스의 두 눈에는 마법사다운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그…런가?”

    약간 말끝을 흐린 용호는 다시 던전의 심장 쪽을 돌아보았다. 원거리 통신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루시아, 친구가 느껴지지? 란돌트 가의 던전 기능 일부를 마몬 가의 던전에 복속시킬 거야. 이쪽 던전의 영혼이 유도해줄 테니까 작업을 마무리해줘.”

    [알겠습니다!]

    [안녕, 나는 루시아라고 해!]

    루시아가 활기차게 말했다. 마몬 가에 있을 때와는 달리 육성이었기에 용호뿐만 아니라 티그리우스에게도 목소리가 들렸다.

    용호는 루시아의 목소리에서 잔뜩 부푼 기대를 느꼈다. 아마도 처음으로 자신 외의 던전의 영혼을 마주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모양이었다.

    루시아만큼은 아니지만 용호 역시 꽤 흥미진진한 얼굴로 란돌트 가 던전의 영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초.

    루시아가 작게 두근두근 콩닥콩닥이라 중얼거린 그 때 란돌트 가 던전의 영혼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마몬 가의 던전의 영혼과 새로운 연결로를 개설합니다.]

    [이 작업에는 10분 전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루시아의 인사에 대답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전에 감정이 있는지 조차 의문이었다.

    [시무루룩]

    [저도 작업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진한 실망이 전해졌다. 용호의 머릿속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 울상을 짓고 있는 푸른 머리칼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용호가 다시 티그리우스에게 돌아섰다.

    “저게… 보통?”

    “제가 만나본 던전의 영혼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아마도… 루시아보다는 제 던전의 영혼 쪽이 일반적인 경우에 속할 것 같습니다.”

    티그리우스가 딱히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정말 루시아가 특이한 경우인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용호 입장에서는 지금의 재기발랄한 루시아가 훨씬 더 좋았다.

    “루시아와의 연결로가 완성되면 던전 개조를 시작할 거야. 오는 중에도 한 번 설명했지만… 아예 요새화를 시킬 생각이야. 지금과는 던전의 모습이 크게 달라질 거고.”

    미안한 기색이 어린 목소리였다.

    티그리우스는 루시아의 풍부한 감정을 목격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눈으로 용호를 마주했다. 엘리고스를 연상시키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병력을 막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겠죠. 이해합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를 마쳤을 때는 다시 평소의 티그리우스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딱딱하고 중후한, 귀족이란 느낌이 물씬 드는 노신사의 얼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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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아가 란돌트 가의 기능 일부를 장악하는 동안 용호는 란돌트 가 한쪽에 마련된 마몬 가의 숙소로 향했다.

    본래 티그리우스는 마왕의 방과 자신의 침실을 마몬 가의 숙소로 제공하려 했지만 용호 쪽에서 사양했다.

    티그리우스는 여전히 란돌트 가의 가주였다. 그 점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손님방이 훨씬 낫지.’

    남의 침실을- 그것도 노신사의 방을 취한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용호는 란돌트 가에 아주 뿌리를 내릴 생각은 없었다. 던전 개보수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투기장을 돌파하기 위해 마몬 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숙소에서 대기 중이던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 용호를 환대했다. 용호는 개중 오필리아와 스컬, 카타리나만을 대동한 채 루시아의 영역이 된 손님용 침실로 이동했다.

    자신을 침실로 따로 부른 이유를 간파한 오필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살짝 짓누르며 말했다.

    “체력 진화로 부탁드릴게요.”

    용호는 웃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선술집의 여주인에서 다시 여우같은 소녀로 돌아간 오필리아였지만 그 날카로운 눈썰미만은 그대로였다.

    “마력이 아니라 체력?”

    “네, 균형은 중요하니까요. 특히 저나 엘리 오라버니 같은 레드 데몬들은 마력만큼이나 육체 능력이 중요합니다. 레드 데몬들에게 마력은 어디까지나 육체를 강화할 ‘수단’이니까요. 강함의 기본이 되는 것은 마력이 아니라 육체 능력인 셈이죠.”

    조곤조곤한 설명은 꽤나 타당했다.

    하지만 용호는 그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엘리 오라버니?”

    “엘리고스 오라버니는 너무 기니까요. 애칭 같은 거죠.”

    오필리아가 화사하게 웃었고, 그 화사함에 용호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엘리고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딱딱하게 말했다.

    “시작하자.”

    오필리아는 이번에도 까르르 웃었다. 눈을 감고 몸을 편하게 늘어트렸다.

    용호는 숨을 골랐다. 오필리아의 양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뒤 머리를 비우기 위해 노력했다. 용호 자신의 ‘생각’이 진화 후 외형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이미 몇 번의 사례를 통해 증명된 바였다. 주군답지 못한 질시가 오필리아의 외모에 혹시라도 영향을 주면 안 되었다.

    용호는 최대한 좋은 생각을 했다.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격렬한 외적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오필리아의 육신 내부에서는 상상 이상의 대격변이 일어났다.

    육체 그 자체의 강화.

    뼈가 더 단단해졌다. 내장 기관과 근육 모두가 강화되었고, 피부는 보다 탄력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어…….’

    무어라 딱 잘라 표현할 수 없었지만 오필리아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더 매력적으로 변했다고 해야 할까? 기분 탓인지 번뇌 어쩌고 하는 아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어 정신을 집중했다. 오필리아의 머리 위로 새로운 빛의 상자들이 떠올랐다.

    [레드 데몬 브레이커]

    [레드 데몬 뱅가드]

    둘 모두 새로운 승급 루트였다.

    진화가 끝났음에도 용호가 여전히 눈을 녹색으로 빛내자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무언가 있음을 간파하고 얌전히 용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용호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허공에 떠오른 빛의 상자들을 하나하나 건드려 보았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것들을 보았다.

    둘 모두 건드릴 때마다 오필리아의 몸 위로 반투명한 실루엣이 그려진 것은 이전과 같았다.

    하지만 그 실루엣의 종류가 달랐다.

    ‘변신? 전투모드 같은 건가?’

    승급 후에도 오필리아의 외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평상시 모습 외에도 전투 시의 모습이 따로 있었다.

    레드 데몬 브레이커는 보다 공격적인 형태였다. 전투 모드로 변환한 오필리아는 고양이과 맹수를 떠올리는 야성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양손은 보다 억세졌고, 두 다리 역시 더 길고 단단해졌다. 붉은 피부 곳곳에는 검은 문양이 떠올랐다.

    레드 데몬 브레이커가 공격형이라면 뱅가드는 속도형이었다. 전체적으로 체격 자체가 커지는 브레이커와 달리 뱅가드는 오히려 오필리아의 체형을 보다 가냘프게 바꾸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날렵해 보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선택 자체는 이번에도 오필리아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차피 승급을 할 수 있는 것은 진화 숙련치가 다시 차오른 이후였으니 생각할 시간도 충분했다.

    ‘엘리고스가 기대되네.’

    과연 레드 데몬 비스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과연 얼마나 더 야성적인 짐승남으로 변할까.

    키득 웃은 용호는 오필리아의 어깨에서 손을 놓았다. 육성 대신 동그랗게 뜬 두 눈으로 무슨 일이냐 묻는 오필리아에게 짧고 간단하게 승급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스컬 차례였다.

    마몬 가의 던전에서 대외적으로 가장 바쁜 사역마가 오필리아라면, 스컬은 가장 많은 시간을 훈련에 투자하는 사역마였다.

    중급 훈련장에서도 더 이상 제대로 된 숙련치를 모을 수 없게 된 스컬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바닥을 굴러다니지는 않았다.

    스컬 부대를 그야말로 끝없이, 24시간 내내 조련했다.

    오필리아가 바쁜 일정과 엘리고스와의 대련-이라 쓰고 노인공격이라 읽어야 할-으로 숙련치를 빠르게 쌓았다면 스컬은 조련과 훈련으로 진화 숙련치를 쌓았다.

    지금까지 체력이나 체격 등 주로 육체 능력 상승 쪽으로 진화를 해온 스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지금의 스컬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마법 전사였다.

    자신 앞에 부복한 스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용호는 마력 특화 진화를 행했다. 스켈레톤 메이지와 합체한 이후 이전보다 명확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던 마력이 보다 크고 강하게 변모했다. 용호는 스컬로부터 번개를 느꼈다.

    ‘그래도 아직 승급 단계는 안 떠오르네.’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역시 데스 나이트까지는 아직 갈 길이 꽤 남은 것 같았다.

    스컬까지 진화를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카타리나가 기대어린 눈으로 용호를 보았다. 용호는 짓궂게 웃더니 꼬리를 파닥이며 기대하는 카타리나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1층 돌파하고 진화했던 거 잊었어? 욕심이 많아.”

    카타리나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런 카타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용호가 모두에게 다시 말했다.

    “아무튼 앞으로 며칠 동안은 던전 개조 계획을 세우는 일에 몰두할 거야.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니까… 아마 던전 개편 역시 한 번 해야겠지. 필요한 자재들도 구입해야겠고.”

    서부와의 길목에 위치한 던전답게 란돌트 가의 던전은 이미 꽤나 전투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랐다. 용호가 란돌트 가를 철옹성으로 바꾸어놓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티그리우스는 순순히 용호의 뜻을 따랐다. 그 역시 서부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용호는 그날 바로 티그리우스, 오필리아와 협력해 요새의 초안을 기획했다. 그리고 다음날 던전 개편을 단행했다.

    이전에 마몬 가 1층을 던전 개편했을 때와는 규모부터가 달랐다. 용호가 던전 개편을 실시할 때만 해도 마몬 가 1층은 참으로 작고 작았으니 말이다.

    던전 개편에 걸리는 시간은 약 3일. 그 이후에도 본격적인 요새화를 위한 기초 공사를 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을 소진해야 할 터였다.

    용호는 그 모든 과정의 감독을 오필리아와 티그리우스에게 일임했다. 스컬과 스컬부대는 오필리아의 호위로 잔류시키고, 오직 카타리나만을 데리고 다시 마몬 가로 향했다.

    ‘돌아오는 것은 투기장 9층- 아니, 10층을 돌파한 후.’

    용호와 카타리나를 태운 살라미가 날개를 펼쳤다. 마계의 하늘에 불꽃의 궤적을 새겼다.

    제 35장 - 던전 메이킹 끝, 제 36장 - 왜곡의 마왕으로 이어집니다.

    < 제 35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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